53화
「아름다운 엘레노어에게.
오늘은 그대의 마음이 좀 풀렸을까. 아직 내가 미워?
무척 깊이 반성 중인,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전하께.
안 미워요.
그날 일은 전부 잊은,
엘레노어 에버렛」
***
「아름답고 너그럽기까지 한 엘레노어에게.
겨우 네 글자로 나를 이토록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대 하나임을 알까.
왕녀와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대와 있을 땐 점잖게 행동한다니, 신기한 일이야. 요즘은 황궁에서도 퍽 얌전하게 지내고 있어. 그대 덕인 듯해.
(드와이트의 덕도 크지. 왕녀가 돌아가고 나면 제대로 보상할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어. 요즘 날이 좋은데 정원을 같이 걸을까?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그대의 영원한 친구,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제 영원한 친구이신 전하께
아니요.
일하느라 너무 바쁜,
엘레노어 에버렛」
***
「아름답고 너그럽지만 일이 너무 바쁜 엘레노어에게
……정말 안 미운 거 맞아?
겨우 세 글자로 내 가슴을 이토록 철렁 내려앉게 하는 이도 그대 하나뿐일 거야.
제발 미워하지 말아 줘.
그대는 그게 무슨 대수냐고 묻겠지. 그저 평소보다 입을 꾹 다물거나, 활짝 웃어 주지 않는 것이 전부일 테니까.
사실 나도 몰랐어. 내가 밉다는 그대의 한 마디에 며칠 밤을 뒤척이게 될 줄은. 그대가 받은 상처에 내 가슴이 저미어 올 줄은.
왜일까. 알 것 같은데, 또 모르겠어. 부디 내게 그 이유를 알아갈 기회를 줘.
다시 안절부절못하는 중인,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아가씨, 마차가 도착했어요!”
문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는 이즈멜의 편지를 재빨리 책상 서랍 안에 넣고 방을 나섰다.
“안녕, 리안. 일찍 왔네?”
“너도. 천천히 나와도 괜찮았는데.”
오늘은 아드리안과 함께 인쇄소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학습지의 잉크가 심하게 뭉치거나 번져 알아보기 힘들다는 불만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는데, 그것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엘레노어가 자리에 털썩 앉자, 마차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최근에 잉크 번짐 문제 때문에 교환한 게 몇 건이었지?”
“이번 달에는 지금까지 열여덟 건.”
“지난달에는?”
“서른두 건.”
엘레노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검수를 더 꼼꼼히 하고, 예비 부수를 좀 더 찍어내는 게 최선 아닐까.”
아드리안이 제안했다. 엘레노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일 것 같다. 그래도 일단 한번 둘러보자.”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금세 마차가 멈춰 섰다. 먼저 내린 아드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엘레노어가 자연스럽게 아드리안의 손 위에 제 것을 포갰다. 길고 예쁜 그의 손가락이 엘레노어의 손을 완전히 감싸 잡았다.
엘레노어가 땅에 발을 딛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아드리안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엘레노어는 평소였다면 느끼지 못했을 그 미묘한 차이를 실감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안녕하세요, 레니.”
인쇄소로 들어선 엘레노어가 비질을 하던 남자 직공에게 인사를 건넸다. 깜짝 놀란 그가 모자를 벗어 들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일찍 오실 줄 모르고……. 죄송합니다. 일단 안쪽 사무실에서 기다리시지요.”
“아니에요. 저희가 너무 일찍 온 건데요.”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이 사무실로 들어가 가죽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창문 좀 열까?”
“응?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해. 난 괜찮아.”
공기에서는 잉크 냄새와 먼지 냄새가 났고, 바깥에서는 달칵달칵 활자판을 짜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는 이 분위기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때 레니라는 직원이 호밀빵 몇 덩어리와 홍차를 내어왔다.
“부족하지만 지금은 있는 게 이것뿐이라…….”
“너무 먹음직스러운걸요. 맛있게 먹을게요. 감사해요.”
엘레노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사래를 쳤다. 그때 문 뒤에서 빼꼼,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맑고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그녀와 아드리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엘레노어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저 꼬마 아가씨는…….”
“아, 제 딸 헤스입니다. 헤스, 인사드려야지.”
“안녕, 헤스.”
엘레노어가 인사를 건넸다. 헤스는 아빠의 바지를 꼭 붙잡고 그의 등 뒤에 몸을 숨겼다.
“죄송합니다. 아직 어려서…….”
“괜찮아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을 두셨네요.”
레니가 문을 닫고 멀어지자 엘레노어가 자리에 앉아 호밀빵을 손으로 뜯었다. 빵은 약간 거칠었지만 씹다 보니 나름대로 풍미가 있었다.
“리안, 넌 안 먹어?”
“응?”
아드리안이 접시 위에 놓인 빵 조각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평소에 그가 즐기는 것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이었다.
‘엘레노어도 이렇게 거칠고 투박한 음식에는 익숙하지 않을 텐데.’
가끔 엘레노어는 귀족 집안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로는 보이지 않는 일을 했다. 이제야 익숙해졌지만, 어렸을 땐 엘레노어의 행동이 참 별나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직접 침대를 정리한다든지, 아무렇지도 않게 무거운 가구를 들고 옮긴다든지, 식사가 끝나면 접시를 부엌에 가져다 둔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아드리안이 왜 그런 일을 네가 하느냐고 묻자 엘레노어는 대답했다.
“왜, 내가 하면 안 돼?”
“물론 해도 되지. 그냥 이유가 궁금해서.”
“그렇게 물으니까 은근히 대답하기 어렵네. 나한테는 이게 자연스러운 일이라.”
머리를 긁적이던 엘레노어가 대답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냥 내가 하는 거야.”
아드리안이 그의 별난 친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는 낡고 먼지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질긴 빵을 꼭꼭 씹고 있었다.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엘레노어의 그런 별나고 독특한 부분들이 그녀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맛있어?”
“응. 줄까?”
엘레노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엘레노어가 먹기 좋은 크기로 떼어낸 빵 덩어리를 아드리안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아이들을 챙기는 것이 몸에 익었는지, 무척 자연스러웠다.
“보기보다 맛있지?”
“좀 시큼한데.”
“호밀빵이 그냥 빵보다 몸에는 더 좋아.”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말은 못 들어봤는데. 근거 있는 말이야?”
엘레노어가 흠칫했다. 가끔 무심코 전생의 상식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가 있었다.
“예전에 무슨…… 책에서 읽었어.”
“무슨 책?”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엘레노어가 급하게 말을 돌렸다.
“아, 널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어.”
“뭔데?”
“너 이젠트 공녀님이랑 잘 알아?”
“잘 알지는 못해. 그래도 몇 번 보기는 했지. 투자자니까.”
아드리안이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그런데 왜?”
“다음 달에 열리는 티파티 초대장을 받았거든. 약속한 게 있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어서.”
엘레노어가 뺨을 긁적였다.
“잘된 일이네. 이젠트 공녀가 여는 파티에 초대받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거든.”
“그래?”
“인맥을 넓히기에 좋은 기회일 거야. 그 모임에 끼고 싶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인맥이라…….”
난 별로 안 끼고 싶은데.
떨떠름한 엘레노어와 달리 아드리안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공녀님은 어떤 분이셔?”
“글쎄. 특별히 나쁜 기억은 없는데. 친절하셨고…….”
“별로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네. 너한테 안 친절한 사람도 있어?”
엘레노어가 입술을 삐죽이자 아드리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잘 없긴 하지.
그때 끼익, 문이 조금 열렸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아까 보았던 아이가 문틈으로 두 사람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헤스?”
아드리안이 아이를 불렀다.
“들어올래?”
잠시 망설이던 헤스가 쭈뼛쭈뼛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람쥐처럼 통통한 뺨과 삐뚤빼뚤한 앞머리가 깜찍했다.
아드리안이 헤스를 번쩍 들어 소파에 앉혀 주었다.
“헤스는 몇 살이야?”
그가 묻자 헤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심각한 얼굴로 한참 꼬물거리던 헤스가 새끼손가락을 간신히 접었다.
“네 살?”
“녜.”
아드리안이 눈을 휘며 활짝 웃었다. 헤스는 아드리안이 마음에 드는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엘레노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헤스는 네가 마음에 드나 보다. 난 쳐다봐 주지도 않네.”
“좀 우쭐해지는데?”
아드리안이 헤스의 손장난에 장단을 맞춰 주며 대답했다. 처음엔 방에 들어오는 것도 수줍어하던 헤스는 어느 순간 아드리안의 무릎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엘레노어가 불쑥 말했다.
“넌 나중에 정말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아.”
쿵.
엘레노어가 별 뜻 없이 뱉은 말에 아드리안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의 시선이 엘레노어에게로 스르륵 이끌리듯 향했다.
아드리안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그럴걸. 나도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이들도 나를 좋아하니까.”
엘레노어를 힐끔 쳐다본 아드리안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그게 뭔데?”
“남편 역할은 그것보다 훨씬 잘할 수 있어.”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자, 아드리안이 장난처럼 콧등을 찡긋하며 웃었다.
엘레노어가 못 들은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엘레노어의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인쇄소 사장, 아서가 들어왔다.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딱 좋을 때 오셨어요!”
엘레노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열렬하게 그를 환영했다. 이 순간 엘레노어에게는 그가 꼭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찍어내는 과정을 볼 수 있나요?”
“물론이지요. 가실까요?”
엘레노어가 삐걱대며 앞장서 걸어갔다. 아드리안이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럼쟁이 아가씨에게 다가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잉크를 바꾸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가격 차이가 꽤 큽니다.”
“어느 정도로요?”
아서의 대답을 들은 아드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엘레노어가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보다는 차라리 검수원을 하나 더 고용하고, 여유분을 좀 더 찍는 것이 나을 겁니다.”
“엘레노어와도 그 이야기를 하기는 했는데…….”
아드리안이 엘레노어 쪽을 쳐다보았다.
“엘레노어, 어떻게 생각해?”
엘레노어가 아드리안과 눈을 맞췄다.
“응?”
“역시 아까 말한 대로 하는 게 나을까?”
“그것도 괜찮지만……. 근본적인 해결법은 아닌 것 같아.”
엘레노어는 인쇄소 안의 풍경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직원 한 명이 인쇄물을 수레에 차곡차곡 싣고 나르는 것이 보였다.
그때 문득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소소한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아니면 이런 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