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52화 (52/168)

52화

엘레노어가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약간의 원망이 섞인 눈빛이었다. 이즈멜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잡기 싫다. 적어도 이런 기분으로는.

하지만 어차피 엘레노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였다.

“영광입니다, 전하.”

엘레노어와 이즈멜이 천천히 홀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홍해가 갈라지듯, 두 사람 앞에 서 있던 이들이 길을 텄다.

달갑잖은 엘레노어의 마음과는 달리, 하필 길고 느릿한 곡이 흘러나왔다. 엘레노어의 등에 손의 온기가 닿았다.

“엘레노어.”

“네, 전하.”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즈멜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이해해요. 정말로 괜찮아요.”

엘레노어가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즈멜이 작게 속삭였다.

“그렇다기에는 표정이 좋지 않은데.”

엘레노어는 이즈멜에게 그냥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밤 내내 이런 무의미한 대화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슬슬 오르는 술기운에 용기가 나기도 했고.

“몰랐는데, 전하께서 제게 파트너를 청하셨다는 게 알려졌었나 봐요. 소문이라는 게 늘 그렇듯 상상력을 더해 부풀려졌고…….”

예상하지 못한 이유에 이즈멜의 턱이 벌어졌다.

“그런데 제가 아닌 왕녀님과 함께 입장하시니, 꼭 제가 전하께 들이대다가 차인 것 같은 상황이 된 거죠.”

“그건 사실과는 전혀 다른…….”

“아시잖아요. 이런 부류의 이야기에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즈멜이 고개를 떨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안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전하 때문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어요. 기분이야 좀 나쁘지만, 사실 그냥 해프닝일 뿐이고요.”

이즈멜이 말없이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순간 엘레노어의 심장이 쿵 하고 울리며 뺨에 열이 훅 끼쳤다. 흐트러짐 없이 빗어 넘긴 백금발과 붉은 눈동자가 야속할 만큼 아름다웠다.

반짝거리는 그를 보고 있으니 엘레노어는 제가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의아하게 느꼈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전하 때문은 아니지만…….”

그는 제국의 황태자다. 엘레노어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장갑 너머의 온기가 아득할 만큼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오늘은 전하가 조금 미운 것 같아요.”

“엘레노어.”

엘레노어가 아무 말도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미워하다가 금방 용서해드릴게요. 전하는 오래 미워할 수 있는 분이 아니고, 저는 상처를 오래 곱씹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음악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엘레노어가 이즈멜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아까 벌컥벌컥 들이켰던 샴페인 때문일까. 아니면 그 뒤에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던 것이 문제였나. 엘레노어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끼고 휘청거렸다.

“어……?”

“조심해야지.”

뒤에서 엘레노어를 지켜보고 있던 카이델이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카이델이 그녀를 붙잡은 탓에 추한 꼴은 면했지만, 발목이 꺾이면서 구두가 벗겨졌다. 엘레노어가 치마폭에 가려진 구두를 찾으려 허리를 숙였다. 그런 엘레노어의 앞에 카이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순간 장내가 크게 술렁였다. 이 순간 담담한 것은 카이델 하나뿐이었다. 그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균형 잡기 힘들면 어깨를 짚어.”

엘레노어는 엉겁결에 카이델의 어깨를 살짝 짚고 서서 그가 구두를 바로 신겨 주는 것을 기다렸다. 발끝에 언뜻 온기가 닿자, 엘레노어가 흠칫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엘레노어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세상에. 너 아주 제대로 빠졌구나?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뫼젠의 왕녀 힐데가르트였다. 엘레노어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이델이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러니 부디 정중하게 대해 주십시오.】

【노력은 해 보겠지만 쉽진 않을 것 같아.】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이즈멜이 엘레노어에게 왕녀를 소개했다.

“뫼젠의 왕녀야. 제국어를 할 줄 모르니, 할 말이 있다면 공작이 중간에서 통역해 줄 거야.”

“아…….”

엘레노어가 이즈멜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왕녀가 다가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씩 웃었다.

【안녕, 벨리움의 공주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엘레노어가 뫼젠어로 인사를 건네자 왕녀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이즈멜과 카이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레노어가 뫼젠어를 할 줄 안다고?’

그렇다면 방금도 다 들었을 테고…….

힐데가르트와의 짧은 대화를 곱씹던 카이델이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뫼젠어를 할 줄 알아?】

힐데가르트가 고양이 같은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엘레노어는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주 유창하지는 않지만,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하답니다. 저희 오빠가 통역을 돕고 있다고 들었어요.】

【오빠……? 카이델이? 그럼 둘은…….】

금지된 사랑?

힐데가르트가 엘레노어와 카이델을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엘레노어가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드와이트요. 드와이트 에버렛.】

【드와이트라고?】

엘레노어의 말에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밝아졌다. 약간 당황스러울 정도로 급격한 변화였다.

【그러니까, 너는 드와이트의 동생이라는 거지? 가족?】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게 웃었다.

【네. 사실 쌍둥이예요. 많이 닮지는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눈이 똑같네! 그래서 아까 드와이트가 자꾸 네 쪽으로 간 거구나.】

힐데가르트가 엘레노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처음의 새침함은 이제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아, 맞아. 무도회 파트너는 정말 미안하게 됐어. 내가 너무 경우가 없었던 것 같아. 용서해 줄래?】

“네, 왕녀님.”

【그냥 힐데라고 불러 줘. 엘레노어라고 불러도 될까?】

힐데가르트는 엘레노어의 손을 꼭 붙잡고 들뜬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심지어는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비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 말이다.

이즈멜과 카이델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 여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걸까? 말려야 하나?’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뭘 잘못 먹은 건가.’

이즈멜이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힐데가르트와 이즈멜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엘레노어에게 뭔가 실례라도 저지를까 봐 전전긍긍하는 얼굴이었다.

힐데가르트가 엘레노어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늘 저 남자에게 화난 건 전부 나한테 풀어도 돼. 내 잘못이니까.】

【네?】

【너무 골려 주고 싶어서 내가 선을 넘었어. 네가 보낸 편지를 받고 너무 뛸 듯이 기뻐하길래…….】

결국, 그게 다 카이델 좋은 일이었지. 그 녀석도 딱히 맘에 들지는 않는데 말이야.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굳게 닫았다.

엘레노어가 긴 숨을 내뱉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래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그때 힐데가르트가 엘레노어의 팔을 꼭 붙잡았다. 엘레노어가 이즈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제발 내가 이런 말 했다고는 전하지 말아 줄래? 분명 약점이라도 잡았다는 것처럼 굴 거야.】

【네, 그럴게요.】

엘레노어가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드와이트도 같이!】

***

오해의 청산과 깔끔한 용서.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즐겁게 대화를 나눈 뒤 웃는 낯으로 작별 인사를 주고받았다. 완벽한 마무리였다.

【내 의견을 말해 줄까?】

그런데 왜 왕녀가 그녀의 소파에 길게 누워 과자를 먹고 있는 걸까.

벌써 며칠째였다. 처음에는 생글생글 웃으며 예의 바르게 그녀를 응대하던 엘레노어는 어느 순간 그녀의 존재와 상관없이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요.】

【그냥 일하면서 들어 봐.】

힐데가르트가 엘레노어의 시큰둥한 반응과 상관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녀는 요즘 딱 두 가지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는데 첫째는 에버렛 가의 장남 드와이트 에버렛이고, 둘째는 에버렛 가의 장녀 엘레노어 에버렛이었다.

【나는 이드리안인가, 걔가 괜찮더라. 싹싹하고 센스도 있고.】

【아드리안이요?】

【아, 맞아. 아드리안.】

매번 헷갈린다니까. 힐데가르트가 깔깔 웃었다.

【시에나였나? 조카도 야무지고 귀엽잖아. 나도 그런 여동생이 있었으면 정말 예뻐했을 텐데.】

“저도 그런 생각 가끔 해요.”

힐데가르트는 아이들과도 안면을 텄다. 대화를 주고받지는 못하지만, 수업이 있는 날마다 온갖 간식을 선물해 주는 그녀를 아이들도 잘 따랐다.

【하긴 루카스랑 데미안도 귀엽지. 저희 형들처럼 크면 안 되는데……. 드와이트처럼 귀엽고 순하게 잘 컸으면 좋겠다.】

잘못 들었나?

엘레노어의 눈썹이 꿈틀하며 뺨에 잘게 경련이 일었다.

【누구요?】

【드와이트. 너희 오빠 말이야. 같이 저녁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바빠 보이더라.】

【저는 루카스랑 데미안이 형들처럼 잘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번에는 힐데가르트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하긴. 너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무도회 날 카이델이 하는 걸 보고 정말 기겁했다니까.】

【좀 차가운 인상이기는 해도 다정하시잖아요. 처음에는 저도 좀 무서웠어요.】

【아니, 좀 무서운 수준이 아니었어. 아카데미에서 유명했지.】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관심을 보이자 신이 난 힐데가르트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카이델을 짝사랑하던 여자애들이 꽤 많았어. 그때도 생긴 건 지금처럼 멀끔했거든.】

【그랬을 것 같아요.】

【교실에 들어가면, 카이델 책상 위에 선물 같은 것도 종종 쌓여 있고 그랬지. 그런데 걔는 그걸 매번 분실물 상자에 툭 가져다 두더라니까! 한번 열어 보지도 않고 말이야. 너무하지 않아?】

어린 날의 카이델을 그려보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 생각엔…… 정말 몰라서 그런 것 같은데요.】

【에이, 설마.】

힐데가르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곰곰이 생각해 보던 엘레노어가 말했다.

【그럼 선물을 직접 가져다주면 되잖아요.】

【내가 알기로 딱 한 명이 그걸 시도했어.】

【그런데요?】

【카이델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울어 버렸지.】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힐데가르트가 몇몇 에피소드들을 더 풀어주었다. 카이델이 아카데미를 2년이나 조기 졸업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엘레노어는 카이델이 어떤 학생이었을지가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요즘은 정말 많이 부드러워진 거야. 그때는 정말 옆에 서 있으면 칼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고.】

솔직히 나도 좀 쫄았었어.

힐데가르트의 고백에 엘레노어가 작게 웃었다.

똑똑.

그때 문밖에서 알베르가 기척을 냈다. 직접 문을 열어 준 엘레노어가 그의 손에 들린 작은 봉투를 발견했다.

“그건 뭐예요?”

“아가씨께 도착한 초대장입니다.”

초대장?

엘레노어가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젠트 공작가에서 온 것입니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엘레노어를 휘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