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건 아까 너무 긴장해서 어딜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엘레노어가 횡설수설하며 변명 같은 말을 마구 늘어놓았다. 엘레노어의 온몸이 사과처럼 새빨갛게 익어 갔다.
“아무튼, 요약하면 이제는 괜찮다는 얘기예요.”
“아쉽네.”
카이델이 희미하게 웃으며 엘레노어의 손을 놓아주었다. 엘레노어는 손에 남은 온기가 사라지는 것이 어쩐지 아쉬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
입장 순서를 기다리던 힐데가르트가 드와이트에게 말했다.
【네 상관에게 표정 좀 풀라고 전해 줄래?】
“전하, 왕녀님이 좀 더 표정을 부드럽게 하는 게 어떠시냐고 하십니다만…….”
이즈멜이 힐데가르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제발 그 입 좀 다물라고 전해.”
【전하께서 조금 조용히 계시고 싶으시다고…….】
드와이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전달했다.
【언제까지 삐져 있을 건지 물어봐 줄래? 나도 양심상 오늘은 얌전히 있을 생각이었다고.】
【지금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왜. 눈치 보이니?】
드와이트가 순한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자 힐데가르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저 귀엽고 착한 남자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알았어. 마음대로 해.】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때 시종이 입장 순서가 되었음을 알렸다.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한 이즈멜이 힐데가르트에게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가지.”
자연스럽게 손을 얹은 힐데가르트가 어깨를 쭉 펴고 걸어 나갔다. 완벽하게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에, 이즈멜이 미간을 잠시 찡그렸다. 그나 그녀나, 이런 연극에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익숙한 이들이었다.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이즈멜이 고개를 들어 아래에 모인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곧바로 그가 기다리던 이를 찾아냈다.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연회장의 빛을 홀로 머금은 듯, 환하게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엘레노어…….’
이즈멜의 동공이 확장되며, 그가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의 그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곳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엘레노어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그녀의 시선이 왕녀에게로 미끄러져 가는 것에 이즈멜은 목이 탔다. 입안이 바싹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카이델?’
그리고 이즈멜은 엘레노어가 홀로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적당히 구색만 갖추던 평소와 달리, 완벽하게 연미복을 갖춰 입은 카이델이 제 옆에 선 엘레노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카이델과 이즈멜의 시선이 만났다. 정중한 눈인사를 건넨 카이델은, 다음 순간 엘레노어의 손을 보란 듯이 감싸 잡았다.
그래, 아주 보란 듯이.
이즈멜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있었으니, 힐데가르트였다. 힐데가르트가 엘레노어를 위아래로 가볍게 훑었다.
‘호오, 저 여잔가 보네. 이즈멜 같은 남자가 좋아할 스타일이라면 뻔하지. 얌전하고 고루한 사교계 화초 스타일.’
그 옆에 선 카이델을 본 힐데가르트가 히죽 웃었다.
‘아까 급하게 일어났던 게 이런 이유였구나? 재밌네.’
음악이 시작되고, 이즈멜과 힐데가르트가 무도회의 첫 춤을 시작했다. 이즈멜은 보란 듯 깍듯하고 예의 바르게 그녀를 대했고, 힐데가르트도 아름다운 미소로 응답했다.
사람들은 퍽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남녀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쪼잔한 놈.’
‘망나니.’
‘자기만 싫은 티 낼 줄 아나? 나도 싫거든, 이 좀생이야.’
‘도대체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지? 자기 나라로 사라지든 저세상으로 사라지든, 제발 내 눈앞에서 좀 사라졌으면.’
방긋방긋 웃으며 서로에게 저주를 퍼붓는 두 사람이었다. 두 번째 곡이 시작되자 카이델과 엘레노어가 플로어로 걸어 나왔다.
이즈멜의 시선이 자연히 그 둘에게로 이끌리듯 향했다. 그 모습을 본 힐데가르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녀가 외워 둔 제국어 한 마디를 툭 건넸다.
“오늘따라 더 죽상이다.”
이즈멜이 힐데가르트를 보며 못마땅하게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러자 힐데가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거봐. 배워 두면 다 쓸데가 있다니까.
***
춤곡이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빙글빙글 돌아 카이델의 팔에 안긴 엘레노어가 갑자기 씩 웃었다. 카이델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그녀가 웃으니 따라 웃었다.
“왜 갑자기?”
카이델이 물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발을 밟지 않았다는 게 신기해서요.”
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레노어는 카이델의 발을 꾹 밟고 말았다.
“저런.”
“말을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잘하고 있었는데……!”
엘레노어가 힐끔 이즈멜과 왕녀 쪽을 쳐다보았다. 한 번 발을 밟기는 했어도, 이렇게 실수 없이 한 곡을 끝마친 것은 처음이었다.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달래듯 부드럽게 웃었다.
“실수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묻지 말 걸 그랬어.”
음악이 서서히 잦아들고,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천천히 홀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는 약간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엘렌.”
엘레노어가 돌아섰다. 아드리안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리안.”
“전하와 함께 참석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엘레노어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카이델이 순식간에 저를 둘러싼 이들에게서 인사를 받느라 분주해진 사이, 엘레노어는 아드리안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늘 정말 예쁘다.”
아드리안이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넌 무도회가 있을 때마다 그렇게 말했잖아.”
“매번 그렇게 느꼈으니까.”
“윽, 느끼해.”
엘레노어가 콧등을 찡긋했다.
“익숙해져야 할 거야.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대부분은 네가 기겁할 만한 것들이거든.”
“예를 들면?”
“나랑 춤출래?”
아드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뻔뻔하게 손을 내밀었다. 엘레노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춤추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맞아. 정말 싫어하지.”
“그런데?”
아드리안이 곱게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좋아하는 걸 혼자 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걸 너랑 하는 게 좋으니까.”
엘레노어의 말문이 막혔다. 아드리안은 자연스럽게 엘레노어의 손을 잡고 빈자리를 찾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들 우리만 쳐다봐.”
엘레노어가 주변을 살피며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입장했을 때야 그러려니 했지만, 연회가 한창인 지금까지 시선이 쏠리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네가 예뻐서 그래.”
“자꾸 막 귓속말을 하는데?”
“내가 부러운가 보지.”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일찍 도착해 이런저런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던 그는 사람들이 엘레노어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을 들었다. 황태자와 관련된 시시껄렁한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을 아는 아드리안에게는 그저 우습기만 한 말들이었지만, 엘레노어가 그것을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드리안은 엘레노어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애썼다.
드와이트도 중간중간 엘레노어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건넸다. 카이델과 아드리안, 드와이트가 번갈아 엘레노어의 곁을 지켰다.
“마실 것 좀 가져다줄까?”
“좋지.”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에버렛 영애.”
엘레노어가 돌아섰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이젠트 공녀님.”
“그냥 아나이스라고 불러줘요. 나도 엘레노어라 불러도 괜찮겠죠?”
“물론이에요.”
당황한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이스가 생긋 웃었다. 아까 느꼈던 싸늘함은 엘레노어만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다정한 미소였다.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네요. 사교 모임에서도 잘 못 본 것 같고.”
“죄송합니다.”
“어머, 사과할 필요 없어요. 엘레노어가 얼마나 바쁜지는 나도 잘 아는데요, 뭘.”
아나이스가 팔을 뻗어 엘레노어의 어깨를 친근하게 감싸 안았다. 엘레노어는 얼떨결에 그녀와 함께 산책하듯 연회장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도 제가 초대장을 보낸다면 와주시겠지요?”
“물론이에요.”
“고마워요. 전하께 몇 번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늘 궁금했답니다. 어떤 분이시기에 전하께서 그토록 칭찬하시는지요.”
엘레노어가 아나이스를 보며 물었다.
“전하께서요?”
“저와 전하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교류해 왔어요. 이번에 엘레노어에게 파트너를 청하시기 전까지는 매번 제가 전하와 함께 연회에 참석했었지요.”
“아…….”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경고인가?
전하는 내 거니까 떨어져,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아나이스가 풋 웃었다.
“표정 풀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는 알지만, 전하와 난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오히려 전하와 엘레노어가 맺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랍니다.”
“소꿉친구 같은 사이인가요?”
“그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에 가까울 거예요.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할 수 있지요.”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깔끔하고 공적인 파트너를 원하시고, 저는 전하와 함께 있으면서 제가 원하는 것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거래예요.”
시원시원하게 설명한 아나이스가 시종에게서 샴페인 잔을 받아 들어 엘레노어에게 건넸다. 엘레노어는 어색함에 그것을 벌컥벌컥 마셨다.
“오늘 힘들지요? 다들 엘레노어에 대한 이야기만 떠들어대니…….”
“저에 대한 이야기요?”
엘레노어의 미간에 옅은 골이 팼다.
“그냥 질투 섞인 말들이에요. 전하께서 영애에게 파트너를 청하셨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파다했거든요. 그런데 떡하니 왕녀와 나타나셨으니 남 말하기 좋아하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것이지요. 금방 지나갈 테니 신경 쓰지 말아요.”
엘레노어는 멍한 얼굴로 아나이스가 소문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는 것을 듣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까부터 왜 사람들이 자꾸만 그녀를 힐끔거렸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아까부터…….’
그것은 그냥 제멋대로 상상해 떠들어대는 말들에 불과했다. 따지고 보면 몹시 나쁜 종류의 소문도 아니었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기분은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무엇도 하지 않았는데, 우스운 꼴이 되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분노가 솟았다.
“엘레노어, 전하께서 이쪽으로 오시네요.”
엘레노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나이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조금 긴장한 듯한 표정의 이즈멜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때가 좋지 않았다. 이 순간 엘레노어는 이즈멜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엘레노어.”
“전하.”
엘레노어가 딱딱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름다운 엘레노어를 보시느라 저는 보지도 못하셨나 봐요. 인사는 받은 것으로 치지요.”
아나이스가 너스레를 떨며 엘레노어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춤을 청하세요, 전하. 그렇게 얼어계시지 마시고요.”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평소의 장난기가 오늘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즈멜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대와 춤출 수 있는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