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승패는 서서히 뒤바뀌었다. 이즈멜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지루해!’
집무실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힐데가르트는 좀이 쑤셔 온몸을 비틀었다. 이즈멜은 정말이지 일만 하고 있었다. 자세 한 번 바꾸지 않고 말이다.
얌전히 앉아 정치니 경제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지루해 여행을 떠난 것인데, 이곳에서도 그러고 있다니.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나마 드와이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였다.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본 이즈멜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지루하면 돌아가서 쉬지.”
【지루하긴.】
“그럼 계속 그렇게 앉아 있으시든지.”
힐데가르트는 오기로 버텼다. 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남자에게 질 수는 없었다.
그때 수석 보좌관, 헨리가 들어와 이즈멜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 순간 이즈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뭘 받았길래 저래?’
힐데가르트는 그런 이즈멜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녀가 그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는 손바닥만 한 종이를 보고 실실 웃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예요?】
“답신이 와서.”
“무슨 답신?”
이즈멜이 옆에 서서 통역 중인 드와이트를 힐끔 올려다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냥, 개인적인 일이야.”
여자네.
힐데가르트가 눈을 반짝였다.
이즈멜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던 나머지, 힐데가르트가 소파에 눕다시피 앉은 것도, 그녀가 제 물건을 마음대로 건드리는 것도 묵인했다.
【펜 좀 빌릴게요.】
“마음대로.”
【종이도.】
힐데가르트는 이즈멜의 주변을 얼쩡거리며, 그가 읽고 또 읽고 있는 답장의 문자를 눈에 익히곤 빠르게 옮겨 썼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기사에게 그것을 들이밀었다.
기사는 꼬불꼬불한 글씨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무도회 파트너를 승낙하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무도회? 무슨 무도회?】
【모레 황궁에서 큰 무도회가 열린다고 하던데요. 떠들썩하더군요.】
힐데가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져 물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알리지 않았어?】
【전하께서는 원체 그런 자리를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납득한 힐데가르트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녀의 입가에 매끈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엔 참석할래.】
【알겠습니다. 파트너로는…….】
【황태자.】
힐데가르트가 턱을 당당하게 치켜들고 대답했다.
【예? 하지만…….】
【당연히 황태자지. 내가 달리 누구랑 참석하겠어? 격이 맞아야 하잖아.】
잠시 잠잠하던 악동 같은 본능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일 황제 폐하와 오찬을 즐기기로 되어 있던가?】
***
이즈멜은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들었다. 무도회에 왕녀와 함께 입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싫습니다.”
“싫다니?”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되겠습니다.”
이즈멜의 말에 황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단호한 거절에 황제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왜지?”
“선약이 있습니다. 이렇게 당일에 그것을 저버릴 수는…….”
이즈멜의 말에 황제가 버럭 역정을 냈다.
“바보 같은 소리!”
이즈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뫼젠의 왕녀가 요청해 온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실 왕녀가 요청하기 전에 네가 먼저 청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고. 네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황제의 말에 이즈멜이 반박했다.
“왕녀가 급하게 방문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입니다.”
“네가 평범한 귀족 영식이었다면 아무래도 괜찮았겠지. 하지만 이즈멜, 너는 황족이다. 그것도 황태자야.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느냐?”
“압니다. 하지만…….”
“신의를 지키는 것은 답이 되지 않아. 너는 사사로운 한 개인, 그 이상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황태자로서 생각하고 판단해.”
이즈멜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 속, 입안이 바싹 말라갔다.
이런 면에 있어서 그의 아버지는 늘 엄격하고 이성적이었다. 평소에는 이즈멜도 그런 아버지의 냉철함을 본받기 위해 애썼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즈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명령이십니까?”
“아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이즈멜, 네가 선택할 일이지.”
한참이나 부자는 눈을 맞추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건조하고 진지한 시선이 오갔다.
“알겠습니다.”
집무실로 돌아가는 이즈멜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무도회가 열리기까지는 이제 겨우 반나절도 남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즈멜은 자문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제가 할 선택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기분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이즈멜의 눈에 왕녀와 드와이트가 함께 정원을 산책하는 것이 보였다. 이즈멜이 굳은 표정으로 둘을 향해 다가갔다.
“드와이트.”
“예, 전하.”
“지금 당장 엘레노어에게 전할 말이 있어. 그대가 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드와이트가 빠릿빠릿한 동작으로 이즈멜의 뒤에 따라붙으며 물었다.
“그럼 왕녀 전하는…….”
“카이델을 부르지. 지금은 저 여자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이즈멜과 힐데가르트의 눈이 마주쳤다. 이즈멜은 무감정한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둘 사이에 냉기가 감돌았다.
‘내가 좀 심했나?’
힐데가르트가 슬쩍 어깨를 움츠렸다. 당장이라도 버럭 소리를 지를 줄 알았던 이즈멜은 아무런 말 없이 드와이트와 함께 멀어졌다.
***
갑작스럽게 불려온 카이델이 힐데가르트에게 이즈멜의 기분이 바닥을 친 이유에 대해 물었다. 힐데가르트가 부루퉁한 얼굴로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그래서, 전하를 괴롭게 하고 싶어서 무도회에 참석하기로 하셨다고요.】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너무 나쁜 사람 같다. 상식 밖의 일도 아닌데.】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카이델이 아무 말 없이 힐데가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 마디 말보다 효과적인 질책이었다.
힐데가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내가 좀 못되게 행동한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도 나한테 계속 재수 없게 굴었단 말이야.】
【전하께만 잘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전하의 파트너로 참석하게 되어 있었던 영애에게도 피해를 끼치신 거지요.】
【피해라니. 구원이겠지.】
엘레노어를 떠올린 카이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힐데가르트가 쿠키를 와작와작 먹으며 무어라 끊임없이 재잘거렸지만, 카이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기대하는 것 같았는데.’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 춤 연습을 하고 있다며 해사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카이델이 검지로 아랫입술을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아까부터 그런 얼굴이야. 너도 나한테 화났어?】
【약간.】
【눈물 나는 충심이네. 부러운데.】
힐데가르트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역시 드와이트가 너보다 훨씬 나아. 너랑 있는 건 재미없거든.】
【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즈멜이 그 여자한테 보낸 것 같던데.】
【그 여자?】
카이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즈멜이 좋아하는 사람 말이야. 전 파트너.】
엘레노어?
가만히 앉아 있던 카이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있을 게 아니었다. 이즈멜과 함께 가지 않을 것이라면,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왜? 어디 가는데? 나는 어쩌라고!】
【책을 읽든 명상을 하든 하십시오. 혼자 보내는 시간도 가끔은 좋습니다.】
성의 없이 대꾸한 카이델이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왕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이건 너무 과하게 화려하지 않아? 난 좀 더 수수한 게 좋은데…….”
상앗빛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선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싸고 화려한 드레스였다.
움직일 때마다 촘촘하게 박힌 보석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빙글빙글 돌면 꽃잎 같은 치맛단이 둥글게 펼쳐졌다가 깃털처럼 사뿐 내려앉았다.
“과하기는요. 완벽하게 아름다워요.”
“더군다나 오늘 같은 날은 몇 배로 신경 써야 해요. 모두 아가씨만 쳐다볼 거라고요.”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은 하녀들의 고집을 절대 꺾을 수 없을 듯했다.
“이리 앉으세요. 머리를 만져 드릴게요.”
하녀들은 능숙하게 엘레노어의 머리를 틀어 올리고, 평소보다 몇 배의 공을 들여 화장했다. 그녀들의 얼굴에서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엘레노어는 거울 속의 자신이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분명히 평소와 같은 눈코입인데 무언가 달랐다. 그러니까, 예뻤다.
‘뭐야, 나 예쁘잖아.’
엘레노어의 심장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꼭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하께서 보시면 다시 한번 반하실 거예요.”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엘레노어가 보기에도 오늘의 그녀는 예뻤다. 평소의 그녀를 보고도 호감을 느꼈으니, 한 번 더 반한대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엘레노어, 잠시 들어가도 될까?”
드와이트였다.
“응, 들어와.”
엘레노어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방으로 들어온 드와이트가 하녀들을 물렸다.
“나 어때 보여?”
“예쁘다. 깜짝 놀랐어.”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셔야 할 텐데. 그분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막 번쩍번쩍하시는 분이잖아.”
엘레노어가 수줍게 웃었다. 그러자 드와이트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것 때문인데, 엘레노어. 전해야 할 말이 있어.”
잠시 머뭇대던 드와이트가 이즈멜의 말을 엘레노어에게 전달했다. 뫼젠의 왕녀가 벨리움을 방문했고, 부득이하게 그녀의 파트너로 참석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랑 같이 입장하면 될 것 같아. 나중에 데리러 올게.”
드와이트가 말을 마친 뒤 엘레노어의 얼굴 기색을 살폈다. 엘레노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이따 보자.”
“그럼 난 다시 황궁으로 가 볼게.”
“응, 그래. 전달해 줘서 고마워.”
방문을 열려던 드와이트가 다시 한번 엘레노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아?”
“뭐가?”
“많이 기대했었잖아.”
엘레노어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드와이트의 등을 떠밀었다.
“기대는 무슨. 정말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
“그럼 다행이고. 나중에 보자.”
약간의 찝찝함이 남은 얼굴로 드와이트가 방을 나섰다. 엘레노어는 아주 천천히 화장대 앞 의자에 다시 앉았다.
“잘된 거야. 부담스러웠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공적인 일 때문인데 이해해야지.
엘레노어가 거울을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거울 속에는 여전히 인형처럼 예쁜 모습의 그녀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까처럼 설레고 즐겁지는 않았다. 잔뜩 들떴던 마음이 푸시시,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았다.
“정말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다고.”
엘레노어가 다시 한번 힘주어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괜찮았다. 하나도 실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