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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48화 (48/168)

48화

셋 중에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느냐니.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질문에 엘레노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그런 것 아니야.”

엘레노어는 무작정 잡아떼며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클로에라는 하녀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 아니긴요. 아가씨, 저희는요. 예전에 꼬마 아가씨 도련님들이 처음 저택에 왔던 날부터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고요.”

옆에 앉아 있던 에밀리도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제가 글은 모르지만, 이런 남녀 연애사만큼은 아가씨보다 훨씬 전문가일걸요? 아무리 숨기셔도 다 안다고요.”

“맞아요, 아가씨. 에밀리랑 마구간 지기 요헨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아세요?”

“마리!”

서로의 연애사를 하나하나 끄집어내며 티격태격하는 셋을 지켜보다 보니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우물쭈물하던 엘레노어가 입을 열었다.

“……티 났어?”

엘레노어의 말에 하녀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물론이죠.”

“제가 아가씨 책상에 매번 편지를 가져다 두는 것은 아시죠? 딱 느낌이 왔다고요. 아, 이건 연애편지다!”

“저는 현관에서 매번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봤잖아요. 공작님은 아가씨 앞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시던데요, 뭐.”

“아드리안 도련님은 말해 뭐해요. 그게 소꿉친구를 보는 눈빛은 아니지요. 암, 아니고말고.”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할수록 복잡하기만 했다. 차라리 수학 문제를 푸는 게 쉬웠다.

에밀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서 셋 중에 누가 제일 마음에 드세요?”

“모르겠어. 세 사람 다 너무 달라.”

“어떻게 다른데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 리안은, 확실히 편안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고……. 가끔씩 툭툭 던지는 말들이 설레.”

엘레노어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리안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

“황태자 전하는요? 전하는 어떤 분이세요?”

“전하는…… 장난도 많고 유쾌한 분이셔. 말을 워낙 재밌게 잘하셔서 같이 있으면 시간이 정말 빨리 가.”

“낭만적이시고요.”

“그것도 그렇지. 전하의 말장난에 이리저리 휘둘릴 때가 많은데, 그게 싫지는 않아. 오히려…….”

술술 이야기하던 엘레노어가 말을 딱 멈췄다. 그러자 하녀들이 눈을 빛내며 다음 말을 채근했다.

“오히려?”

“기분 좋아.”

엘레노어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녀들이 엘레노어가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공작님은요?”

“카이델? 카이델은…….”

엘레노어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첫 만남부터 무도회, 황궁 오찬, 데미안이 연못에 빠졌던 날, 우연히 길에서 만났던 날, 그리고 생일 카드까지.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뇨? 각하께는 아무 감정이 안 드세요?”

“그런 게 아니야. 전하나 리안을 볼 때랑은 좀 다른 느낌이 있어. 아주 묘한……. 그걸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래.”

짝, 손뼉을 쳐 분위기를 환기한 엘레노어가 조언을 구했다.

“너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하녀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마리가 입을 열었다.

“그야 아가씨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죠. 아가씨 마음이 향하는 사람을 만나시면 돼요.”

“내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으면 어떡하지?”

엘레노어가 눈썹 끝을 축 늘어뜨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면 알아봐야죠.”

“어떻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 알아가는 방법이야 똑같죠. 같이 시간을 보내보세요. 이야기도 나눠 보고, 차도 마셔 보고…….”

“세 사람 모두랑?”

아드리안도 그러라고 하긴 했지만.

엘레노어가 약간의 찝찝함이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에밀리가 화통하게 대답했다.

“안 될 게 뭐예요? 사과 하나를 사도 다 따져 보고 사는데, 짝을 찾을 때는 더 신중해야죠!”

“그렇긴 해. 그래도 세 사람 다 너무 대단한 사람들이잖아. 내가 그렇게 따지고 있다는 게 좀…….”

클로에가 엘레노어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아가씨가 뭐가 어때서요? 저희 눈에는 아가씨가 훨씬 아까워요. 누가 됐든, 아가씨의 짝이 될 분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행운아라고요.”

“그래요, 아가씨. 꼭 셋 중에 고르란 법도 없어요. 마음이 가지 않으면 그걸로 그만인 거예요.”

에밀리가 엘레노어의 손을 꼭 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아가씨만 생각하세요. 딱 아가씨 마음만요. 그게 정답이에요.”

***

【맛있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괸 힐데가르트가 드와이트를 보며 물었다. 드와이트는 입안이 케이크로 가득했던 탓에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힐데가르트는 수도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디저트 카페에 드와이트를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메뉴에 있는 모든 메뉴를 전부 다 주문한 뒤, 드와이트에게 하나하나 맛볼 것을 권했다. 정작 그녀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말이다.

【옳지. 잘 먹으니 좋다.】

【전하께서는 안 드십니까?】

【나? 먹고 있으니 편하게 먹어. 차도 마시면서.】

힐데가르트가 생긋 웃으며 찻잔을 밀어놓았다. 드와이트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얼른 그것을 받아 마셨다.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어차피 여기서 몇 달 머물게 됐으니까, 나도 제국어를 좀 할 줄 알면 좋을 것 같아서. 예전에 아카데미에 다닐 때 잠시 배우기는 했었는데 워낙 오래전이라 전부 잊었거든.】

힐데가르테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제국어를 가르쳐드릴 만한 스승을…….】

【그럴 게 뭐 있어? 드와이트, 네가 있는데.】

사레들린 드와이트가 잔기침을 마구 뱉어냈다. 드와이트의 뽀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 제가 어떻게…….】

【뭐 엄청나게 배울 건 아니고, 그냥 몇 마디 정도 할 줄 알면 좋겠다 싶어서.】

그 정도야 뭐.

드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말이 궁금하십니까?】

【오늘따라 더 죽상이다.】

【……예?】

드와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힐데가르트가 손을 뻗어 드와이트의 소매를 쥐고 이리저리 흔들며 재촉했다.

【빨리.】

【진심이십니까?】

【응. 빨리 가르쳐 줘. 빨리!】

드와이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힐데가르트와 있으면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다.

그녀라면 자다가도 이를 가는 제 상사와 달리, 드와이트는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사실 온갖 관광지들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꽤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힘든 것은 힘든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전하께 사용하시지는 않을 것이라 약속하셔야 합니다.】

【그럼, 당연하지. 나도 상식이라는 게 있는 사람인데.】

정말 그렇습니까?

드와이트가 의심이 어린 눈으로 힐데가르트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힐데가르트는 예쁜 눈을 사르르 접어 웃으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따라…… 더 죽상이다.”

힐데가르트가 드와이트의 말을 열심히 따라 했다. 하나를 익히면 또 다른 문장을 가르쳐달라 보챘는데, 무엇하나 드와이트를 당황하게 하지 않는 말이 없었다.

약간 어눌하지만, 의미는 정확하게 전달될 정도가 되자, 힐데가르트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정말 전하께는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차라리 저한테 쓰십시오.】

【내가 너한테 저런 말을 왜 쓰겠어? 네가 얼마나 귀여운데.】

【귀엽…….】

【말 나온 김에, 귀엽다는 말은 어떻게 해?】

힐데가르트가 드와이트 쪽으로 몸을 확 기울이며 물었다. 갑자기 훅 가까워진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당황한 드와이트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귀엽다.”

“귀, 엽다. 귀엽다…….”

드와이트를 따라 몇 번 중얼거리던 힐데가르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드와이트, 귀엽다.”

이제 순진한 드와이트의 몸에서 원래의 흰 살결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어쩜 이리도 투명한지.

힐데가르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차올랐다. 재수 없는 황태자만 보면 당장 돌아가고 싶지만, 그 막내 보좌관은 그녀의 취향에 딱 맞았다.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데. 돌아가야 한다는 게 아쉽네.’

여기 있는 동안은 놓아주지 않을래.

***

“어제 하루는 즐겁게 보냈습니까?”

조찬 자리에서 이즈멜이 부드럽게 물었다. 황제에게 꾸중을 들은 이후로 그는 최대한 온건하고 다정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한 편의 연극이라 생각하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힐데가르트도 이즈멜의 연극에 장단을 맞춰 주며, 제법 고상한 척 앉아 식사를 이어 갔다.

【제국어 공부를 좀 했어요.】

드와이트가 왕녀의 말을 통역했다. 이즈멜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웬일로 쓸모 있는 생각을 했군.

【들어 보시겠어요?】

힐데가르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드와이트는 어쩐지 등줄기가 섬찟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말을 전달했다.

“그러지요.”

이즈멜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 잔으로 손을 뻗었다. 힐데가르트가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더 죽상이다.”

쿨럭. 이즈멜이 머금었던 물을 다시 토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힐데가르트는 제가 외워 둔 문장들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너는 참 재미가 없구나. 아, 오늘도 너를 보아야 한다니 슬프다. 미안하지만 너는 그 색깔이 어울리지 않아. 나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힐데가르트가 뿌듯한 얼굴로 말을 마쳤다.

【이 정도.】

이즈멜의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의 이마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그는 평정을 지키려 애썼지만, 커트러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말을 어디다 쓰려고.”

이즈멜의 말을 드와이트가 전달하자 힐데가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평화로운 연극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보며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뭐든 배워 두면 언젠간 적절하게 써먹을 곳이 있더라고.】

힐데가르트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오늘 당신은 뭐 할 건데?】

“일해야지. 그대는?”

【당신이 일하는 걸 구경할 생각이야.】

이즈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힐데가르트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가장 괴롭게 하는 방법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임을 깨친 그녀였다.

“난 정말 일만 할 거야. 재미있는 일 같은 것은 없을 거라고. 나가서 뭐든 해. 구경을 하든 사치를 하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 주지.”

이즈멜이 달래듯 말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강경했다.

【오늘은 집무실 구경이 하고 싶네. 걱정하지 마. 얌전하게 있어 줄 테니까.】

방에 있다는 것 자체로 방해가 돼. 아니, 그대의 존재는 그 자체로 내게 해가 돼.

【안 돼? 폐하께서는 우리가 친해지길 바라시는 것 같던데.】

힐데가르트가 황제를 들먹이며 커다란 눈을 반짝였다. 연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촉촉하게 빛났다. 금방이라도 눈물 폭탄을 터뜨릴 수 있다고 경고하는 듯한 눈이었다.

젠장. 이즈멜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패색이 한층 짙어졌다.

“그래, 마음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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