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힐데가르트는 익숙한 인영에 눈살을 찌푸렸다.
【카이델?】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녀 전하.】
카이델이 깍듯하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그 손을 무시한 채 폴짝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하나로 바짝 올려 묶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말꼬리처럼 흔들거렸다.
【허, 전하는 무슨. 그냥 힐데라고 불러.】
【아닙니다, 전하.】
【몸만 커졌지, 너 정말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여전히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쥐뿔도 없어.】
힐데가르테가 도발하듯 턱을 치켜들었다.
【안에서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델은 제 할 일만을 묵묵하게 할 뿐이었다.
힐데가르테가 홱 뒤돌아 카이델과 눈을 맞췄다.
【네가 계속 졸졸 따라다닐 거니?】
【예.】
【계속 그렇게 돌덩어리처럼 재미없이 굴 예정이고?】
【제가 그렇습니까?】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카이델의 눈썹이 꿈틀했다.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이라, 힐데가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래 있지는 말아야겠구나.】
카이델이 눈썹을 으쓱해 보였다. 듣던 중 잘된 일이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요.”
말끔하게 예복을 갖춰 입은 이즈멜이 일어나서 왕녀를 맞이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준비하고 맞이했을 텐데. 어쨌든 오셨으니 편히 쉬다 가시지요.”
옆에 서 있던 카이델이 이즈멜의 말을 통역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고, 편안히 머물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도 빠뜨리지 말고 제대로 전하렴. 나도 저 정도 제국어는 할 줄 알아. 생긴 건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성격은 영 아닌 것 같네.】
카이델이 왕녀의 말을 잘라내며 이즈멜에게 말했다.
“만나서 반갑다고 하십니다.”
“아닌 것 같은데. 날 보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또 전하의 외모에 대해 칭찬하셨습니다.”
“그래?”
보는 눈은 있어서.
이즈멜은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왕녀를 만찬장까지 에스코트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힐데가르트와 이즈멜은 끔찍이도 맞지 않았다.
이즈멜은 힐데가르트의 무례함에 질색했고, 힐데가르트는 이즈멜의 오만함을 경멸했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제법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통역을 맡은 카이델이 둘 사이에 오가는 날 선 말들을 제 선에서 잘라냈기 때문이었다.
‘정말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게 맞나?’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카이델의 무표정한 얼굴은 어떠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카이델이 늘 두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한 번도 제시간에 맞춰 오는 법이 없군. 어찌나 제멋대론지.”
【아침 먹는 자리에 누가 머리를 저렇게 넘기고 온담. 겉멋만 잔뜩 들어서는…….】
식탁 앞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를 연신 힐끔거렸다. 눈이 마주치자 힐데가르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우도 홀릴 듯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이즈멜의 눈에는 살쾡이의 그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방금 저 여자가 뭐라고 한 거지?”
“그게…….”
“솔직하게 말해, 드와이트.”
두 사람 사이의 골이 깊어갈수록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이들의 고충 역시 깊어만 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통받고 있는 것은, 뫼젠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급히 차출된 드와이트였다.
“그…… 전하의 머리 스타일이 아침 식사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드와이트가 진땀을 빼며 이즈멜에게 왕녀의 말을 전달했다. 이즈멜의 이마에 빠직, 핏줄이 섰다.
“이런 것을 보통 예의와 격식이라고 부른다고 전해.”
본인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덕목이니, 알 턱이 있나.
이즈멜이 우아하게 물 잔으로 손을 뻗으며 코웃음을 쳤다.
【드와이트, 저 인간이 방금 뭐라고 했어?】
【이런 것이 예의와 격식이라고…….】
【웃기고 있네.】
【죄송하지만, 방금 그것도 통역해야 하는지요?】
【오, 그럼. 내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렴.】
어쩐지 카이델 그 자식은 믿음직스럽지가 못했어. 제대로 전달하는 것 같지가 않더라니까.
힐데가르트가 제 접시의 달걀노른자를 포크로 툭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새하얀 접시에 노른자가 이리저리 튀었다. 이즈멜은 그것을 보며 비위가 상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에. 하다 하다 식사 예절조차 없군. 루카스도 저것보다는 우아하게 먹겠어.”
이즈멜이 이마를 짚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힐데가르트는 일부러 포크로 샐러드를 휘적거리며 이즈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감상했다.
【나는 그대가 꽤 마음에 들어, 드와이트.】
힐데가르트가 옆자리에 앉은 드와이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진땀을 빼고 있는 그는 어딘지 조금 어리숙하고 순진해 보였다.
귀엽네. 난 귀여운 게 좋더라.
【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런데, 내가 여기 머무는 동안은 그대가 날 보좌해 주었으면 좋겠어. 통역도 해 주고,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 주고.】
【제가 말입니까?】
드와이트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돼?】
힐데가르트가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드와이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왜 그런 표정이지?”
이즈멜이 드와이트를 보며 물었다.
“왕녀 전하께서 지내시는 동안 저더러 보좌해 줄 수 있는지 여쭤보셨습니다.”
“그대는 나를 보좌해야지. 안 된다고 전해.”
이즈멜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 그럼 피곤해지겠네.】
힐데가르트가 와인처럼 붉은 크랜베리 주스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고.】
***
“중요한 손님이라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어찌 뫼젠의 왕녀를 그리 박대해! 대체 무슨 정신으로!”
“제가 언제 또 박대를 했다고…….”
억울함에 이즈멜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던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박대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식사 때마다 꼬박꼬박 정찬을 준비했지, 가장 좋은 방도 내어주었지, 정말 심한 말들은 속으로만 했는데 말이다.
“어찌나 서글프게 울던지, 보는 내가 서러울 지경이더구나. 뫼젠의 국왕이 보았다면 아마 벨리움과 국교를 끊겠노라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황제는 한참이나 꾸지람을 늘어놓았다. 이즈멜이 성년이 된 이후로 이토록 큰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즈멜의 머릿속에 힐데가르트의 얄미운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만으로도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석 달 정도 머물 생각이라 하더구나.”
“석 달이나 말입니까?”
이즈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무튼,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라.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맞춰 줘.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으냐.”
“알겠습니다.”
“듣기보다 아름답고 교양 있는 여성이던데. 잘 지내 보아라. 네게 좋은 짝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름답고 교양 있는? 좋은 짝?
억지로 감정을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이즈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황제는 힐데가르트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알았느냐?”
호적수를 만난 이즈멜이었다.
***
엘레노어는 책상 앞에 앉아 아이들의 숙제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중이었다. 데미안과 시에나의 숙제는 언제나 그렇듯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시에나였다.
“시에나가 정말 많이 늘었어. 이제는 수학 말고는 데미안이랑 거의 비슷하겠는데?”
시에나는 승부욕이 무척 강했다. 남보다 뒤처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시에나에게 데미안의 존재는 확실히 자극제가 되는 듯했다.
‘약간 걱정스러울 때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공부에는 그런 근성도 필요하지. 나도 전생에서는 그랬었고.’
-늘 최선을 다하는 시에나.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 오늘도 잘했어 :)
엘레노어가 시에나의 노트 구석에 푸른색 잉크로 작게 메모를 남겼다.
데미안의 노트를 촤라락 넘겼다. 반듯한 글씨로 답지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풀이를 보고 있으니 감탄이 나왔다.
“데미안은 구술 면접 준비를 좀 일찍 시작해야겠다. 이미 아카데미 신입생 수준은 지나도 한참 지났어.”
-선생님보다 글씨를 잘 쓰는 것 같은 데미안. 늘 지금처럼만!
다음은 루카스의 차례였다. 엘레노어가 마음의 준비를 하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가씨이-! 아가씨 계세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그때 문밖에서 하녀들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녀들은 평소 엘레노어가 일하는 시간에는 방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일하는 동안 방해받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와.”
엘레노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이것 좀 보세요. 황궁에서 아가씨 앞으로 보낸 거예요!”
갑작스럽게 분홍빛 장미 다발을 안아 들게 된 엘레노어가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엄청나게 근사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찾아와서는, 이 편지를 꼭 아가씨께 전달해 달라는 거예요.”
“황태자님이 직접 부탁하셨다면서요!”
꺄아. 하녀들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저들끼리 손을 맞잡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엘레노어가 금박으로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아가씨, 읽어 주시면 안 돼요? 저도 듣고 싶어요.”
“저도요.”
“저도 궁금해요!”
하녀들의 성화에 엘레노어는 편지를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엘레노어 에버렛 백작 영애.”
엘레노어가 한 줄을 읽자마자 하녀들의 광대가 흐뭇하게 솟았다.
“친애하는! 근사한 표현이다.”
“쉿. 아가씨, 제발 계속 읽어 주세요.”
엘레노어가 약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음 줄을 읽어 나갔다.
“곧 있을 황궁 연회에서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기를 정식으로 청합니다. 영애와 함께 입장할 기회를 제게 주신다면 무척 영광일 것입니다.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의 첫 춤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하녀들은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틀어막았다.
“……발등에 온통 멍이 드는 한이 있더라도.”
엘레노어의 얼굴이 장미보다 더 짙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민망해진 엘레노어가 편지를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러자 하녀들이 참았던 환호성을 터뜨렸다. 엘레노어의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소리였다.
“당연히 승낙하실 거죠?”
“그래야지. 약속했던 거니까.”
엘레노어가 의연한 척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가서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요. 분명 그림처럼 잘 어울리실 텐데!”
“황태자 전하께서 아가씨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그럼 우리 아가씨가 장차 황태자비가 되시는 건가……?”
“에밀리!”
장난기가 섞인 하녀의 말에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말도 안 돼. 그런 말 하면 못써.”
엘레노어가 고개를 힘껏 내저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하녀들의 얼굴에 떠오른 장난스러운 미소는 점점 더 짙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하긴, 공작 부인이 되실지도 모르지요.”
“후작 부인이 되실지도 모르고요.”
엘레노어의 얼굴은 이제 화분에 핀 제라늄만큼이나 붉었다.
“그래서 아가씨. 아가씨는 어떤 분이 제일 마음에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