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생일 축하해, 엘렌.”
참나무 가지에 매달린 그네가 바람에 앞뒤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네는 엘레노어의 추억과 정확하게 같은 모습이었다.
“이거 어렸을 때 내가 좋아하던…….”
엘레노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멀뚱히 서서 그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물밀듯 밀려왔다.
엘레노어는 새롭게 주어진 삶에 곧잘 적응했지만,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종일 그네에 앉아 천천히 앞뒤로 흔들거리고 있자면, 한국에서 고여진으로 살았던 전생의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어깨를 가볍게 떠밀었다.
“온종일 거기 앉아 있었지. 불러도 모를 만큼 골똘히 생각에 잠겨서. 앉아 봐.”
엘레노어가 천천히 다가가 그네에 앉았다. 약간 삐걱거리는 느낌까지 전과 같았다.
“세상에. 느낌까지 그때 그대로야.”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엘레노어의 뒤에 서서 그네를 밀어 주기 시작했다.
“기억나? 폭풍우 때문에 그네가 날아가 버렸을 때, 너 정말 서럽게도 울었잖아.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던 애가.”
“그랬지. 기억나. 열 살 때쯤이었나?”
“여덟 살. 딱 지금 시에나랑 데미안 나이였지.”
“와, 시간 진짜 빠르다.”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그러게, 동의하며 낮게 웃었다. 엘레노어는 그와 조금 어색한 상황이었다는 것도 잊고 한참이나 그가 밀어 주는 그네를 탔다.
“어떻게 그네를 선물할 생각을 했어?”
엘레노어가 다리를 앞으로 쭉 뻗으며 물었다.
“이것저것 많이 생각했었는데…….”
그때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아드리안의 뺨을 가볍게 긁었다. 진한 꽃향기와 함께 간질간질한 감각이 피어났다. 아드리안이 두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잠시 서서 말을 고르던 아드리안이 입술을 뗐다.
“나는 네 친구니까. 네가 어떤 걸 받으면 기뻐할지, 그 정도는 당연히 알지.”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아왔으니까.
아드리안의 머릿속에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 기억의 어떤 지점을 골라도 엘레노어가 있었다. 그것이 싫어 애써 도망쳤던 순간에도 그녀가 있었다.
엘레노어가 발로 땅을 짚어 그네를 멈췄다.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친구잖아.”
“리안.”
“그냥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어색하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앞으로 걸어와 섰다. 엘레노어는 그넷줄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색했던 거, 티 났어?”
“응. 엄청.”
아드리안이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그냥 너를 어떻게 봐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대해야 할지, 아니면 뭔가 대답을 건네야 하는 건지.”
엘레노어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알겠지만, 지금까지는 이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거든.”
더 정확하게는 할 기회가 없었지.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내 감정이 어떤지도 모르겠고.”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에게 솔직한 제 마음을 털어놓았다.
카이델의 마음, 이즈멜의 마음, 그리고 아드리안의 마음. 엘레노어는 이제 그들의 마음을 알았다. 하지만 제 마음만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었다.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따져 보고 재 보고…….”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혼란스러움을 가득 담은 초록색 눈동자가 잘게 진동했다.
“정말 그래도 된다고? 아닌 것 같은데.”
“어쩌겠어. 벨리움에서 제일 인기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이상 감당해야지.”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천천히 생각해. 필요한 만큼 시간을 들여서. 네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을 테니까. 우리 사이가 소원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
“응, 정말. 그러니까 인제 그만 피해.”
“안 피할게.”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소매를 덥석 붙잡고 물었다.
“그럼, 우리 아직 친구 맞지?”
“제일 친한 친구지.”
아드리안이 흔쾌히 대답했다. 엘레노어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져갔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손을 툭 얹으며 눈을 맞췄다.
“올해도 생일 축하해, 엘레노어.”
***
드와이트가 소파에 누워 잠든 데미안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엘레노어가 그런 드와이트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피곤했나 보다.”
“그러게. 아버지가 좀 무리하셨지. 산책을 두 시간이나 했잖아.”
“아버지가 데미를 그렇게 예뻐하실 줄 몰랐어.”
“엘렌, 네가 어렸을 때 딱 그랬대.”
드와이트가 손님방 침대에 데미안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엘레노어는 드와이트를 따라 나가는 대신, 침대 끝에 걸터앉아 데미안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살짝 떼어내 주었다.
‘아무리 성숙하게 굴어도, 자고 있을 땐 완전히 아기 같네.’
주먹을 꼭 말아 쥐고 잠든 데미안은 아기 천사 같았다.
잠시 지켜보다 나가려고 했는데,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데미안은 이상할 만큼 마음이 쓰이는 아이였다.
그때 데미안이 부스스 눈을 떴다. 엘레노어와 눈을 마주친 데미안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쉬이. 더 자도 돼.”
엘레노어가 이불을 조금 더 끌어 덮어 주었다.
“선생님은 나가 줄까?”
데미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럼. 잠깐 이야기나 나누자.”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데미안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산책을 다녀왔다면서?”
“네. 엄청 멀리까지 갔어요.”
“아버지는 신이 나시면 누군가 옆에서 말려 주기 전에는 멈추지 않으셔. 힘들다 싶으면 꼭 말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해가 질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실지도 모르거든.
엘레노어가 속삭이자 데미안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네, 하고 대답하는 데미안의 얼굴에서 잠기운이 약간 가셨다.
“그런데, 데미.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도 돼?”
잠시 망설이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데미는 아카데미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잖아. 왜 그랬던 거야?”
데미안은 흠칫했지만, 전처럼 움츠러들지는 않았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데미안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집에서 나가야 하니까요.”
“집에서 멀리 떨어지는 게 무서웠어?”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집에 다시 못 갈까 봐…….”
“집에 다시 못 가다니?”
데미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데미안은 나이가 차는 대로 아카데미로 보내시지요. 그편이 모두에게 나을 겁니다.’
외숙은 틈이 나는 대로 데미안을 멀리 떠나 보내려 들었다. 카이델은 외숙과 친하지 않았지만, 그 조언만큼은 그럭저럭 괜찮은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아카데미라. 공작저보다는 낫겠지.’
카이델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데미안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카이델이 저를 싫어한다고 믿고 있었던 데미안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지금은 괜찮아요.”
데미안이 힘주어 말했다. 카이델이 그런 의도로 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조금은 어렵지만, 카이델이 저를 걱정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은 느껴졌다.
“이제는 조금만 무서워요. 엄청 조금. 친구들도 같이 갈 거니까 괜찮아요.”
데미안이 엄지와 검지로 조그마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꼬물거리는 손가락을 지켜보던 엘레노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와, 용감하네.”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머리 위에 손을 짚어 보며 중얼거렸다.
“그새 많이 큰 것 같아. 처음 봤을 때보다.”
“키요?”
“응.”
“나중에는 형만큼 커졌으면 좋겠어요.”
“형보다 더 쑥쑥 자랄 거야. 그러려면 고기도 채소도 많이 먹고 운동도 해야겠지.”
카이델은 웬만한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데미안은 또래보다 왜소한 편이지만, 유전자라는 게 있으니 갑자기 쑥 큰대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나중에 카이델을 만나면 물어봐야지. 어렸을 때부터 키가 컸었냐고.’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도 잘하잖아. 마음도 쑥 자란 거지.”
엘레노어의 말에 데미안이 배시시 웃었다.
“그건 루크랑 에나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
“둘은 말이 너무 많아요. 조금도 안 쉬고 이야기를 해요.”
“좀 그렇지. 그래서 불편해?”
데미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좋아요. 에나는 내가 이야기를 잘 들어 줘서 좋대요. 그냥 말을 안 하고 있었던 건데.”
엘레노어가 웃음을 터뜨리며 데미안을 꼭 끌어안았다. 데미안에게서는 보송보송한 햇빛 냄새가 났다. 마음이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네가 좋아. 왜냐하면, 정말 너무 귀엽거든…….’
***
“엘레노어.”
등 뒤에서 들려온 드와이트의 목소리에 엘레노어가 재빨리 돌아섰다. 잠옷 차림의 드와이트가 비척비척 다가오고 있었다.
“깜짝이야.”
“방에 갔는데 없길래.”
“나 찾았어? 왜?”
드와이트가 상자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낮에 카이델에게 받았던 선물 상자였다.
“아무래도 이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서.”
엘레노어가 상자 안에 든 것을 꺼내 들었다. 보석함 모양의 오르골이었다. 연한 분홍색 상자에 튤립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그렇긴 하네. 너랑은 별로…….”
엘레노어가 오르골을 열자 그 안에 있던 카드가 툭 떨어졌다. 드와이트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이것도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닌 것 같고.”
엘레노어가 재빨리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아무튼 전해 줘서 고마워. 잘 자.”
엘레노어는 반쯤 뛰는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방에 들어가니 창가에 놓인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반듯하게 놓인 이즈멜의 선물 옆에는 알베르와 하녀들이 두고 간 작은 선물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엘레노어가 이즈멜이 선물한 노트를 집어 들었다. 첫 장에 그가 제 서명을 작게 남겨둔 것이 보였다.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제국년 475, 내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애정을 담아.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애정.
엘레노어가 뺨을 살짝 붉히며 살짝 미소 지었다. 지극히 이즈멜다운 표현이었다.
“전부 근사한 선물이었어.”
엘레노어는 오르골의 태엽을 감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았다.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서정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아, 맞아. 카드가 있었지.’
엘레노어가 상자를 다시 열어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졌지만 단정한 느낌이 드는 글씨체가 카이델을 닮아 있었다.
두껍고 빳빳한 종이에는 아무런 문양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희미하게 상앗빛이 도는 카드 위에는 서명조차 없이 딱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이마저도 그답다고 해야 할까.
엘레노어는 오르골의 태엽을 다시 감은 뒤, 카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대는 고민도 걱정도 없이, 그저 단잠만을 잤으면 해.」
조금은 뜬금없는 그 한 줄의 편지가 엘레노어의 안에 박혔다.
묘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