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케이크를 한 조각씩 나누어 먹은 뒤, 백작 부부는 일찍 자리를 떴다.
백작은 아이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부인이 엄한 표정을 짓자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백작 부인의 짐작대로, 두 사람이 사라지자 남자들의 얼굴이 한층 편안해졌다.
엘레노어는 거실 중앙에 앉아 크고 작은 선물들을 하나하나 풀어 보기 시작했다. 엘레노어가 눈에 띄는 화려한 상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건 내가 준비한 거야.”
이즈멜이 살짝 손을 들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포장부터 이즈멜을 닮아 있었다.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열었다.
“와인?”
“드와이트한테 그대가 좋아하는 것에 관해 물었더니 그렇게 대답해 주더라고.”
엘레노어가 드와이트를 찌릿 노려보았다.
많고 많은 것 중에 하필! 훨씬 고상하고 근사한 취미도 많은데 말이다.
“싫어해?”
이즈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아니지만요.”
“그것 말고도 더 있어.”
이즈멜이 웃으며 가볍게 턱짓했다. 조심스럽게 와인을 내려놓은 엘레노어가 상자 아래에 놓인 또 다른 상자 하나를 열었다.
“와……!”
가죽 커버가 씌워진 노트에 금박으로 엘레노어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실로 엮어 만든 노트는 그 자체로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엘레노어는 손끝으로 제 이름을 살살 어루만져 보았다.
“기분 좋은 이야기들로 채워지기를 바라.”
“너무 예뻐서 쓸 수 없을 것 같아요.”
엘레노어가 이즈멜과 눈을 맞추며 뺨을 붉혔다.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기댄 그가 우아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제는 데미안 차례인가?”
아드리안이 구석에서 쭈뼛거리던 데미안의 어깨를 부드럽게 떠밀었다. 데미안이 약간 묵직한 상자를 엘레노어의 무릎에 내려놓았다. 상자를 열어 본 엘레노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카이델이 설명을 덧붙였다.
“데미안이 직접 골랐어.”
“제라늄이 예쁘게도 피었네요. 좋아하는 꽃이에요.”
꽃잎을 살짝 건드려 본 엘레노어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엘레노어는 시에나와 루카스에게 했듯, 데미안의 뺨에도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생각해 보니 꽃 선물은 많이 받았어도, 화분을 선물 받은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이게 훨씬 더 좋네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이 살짝 웃었다.
“나도 꺾는 것보다는 가꾸는 걸 좋아해. 꽃은 살아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우니까.”
“식물을 좋아하세요?”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카이델과 식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의외의 공통점을 찾아낸 엘레노어가 카이델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 앉았다.
훅 가까워진 초록색 눈동자에 당황한 카이델이 멋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라벤더 향기와 평소보다 붉은 입술 앞에서 그는 어색하게 굳고 말았다. 사춘기 소년처럼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저도 좋아해요. 다음에 제가 정원을 구경시켜드릴게요. 다른 때도 그렇지만, 한여름이 되면 녹색으로 반짝거리는 풍경이 제법 근사하거든요.”
“기대되는군.”
“공작 저의 정원도 아름다운가요?”
“나쁘지는 않지……. 그보다는 공작령에 있는 숲이 무척 아름답기로 유명해.”
그대와 함께 걷고 싶은데.
카이델은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을 입안에서 사탕처럼 굴렸다. 나무껍질처럼 쓴맛이 났다.
살면서 수줍음이라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없었건만, 왜 그녀 앞에만 서면 이렇게 숙맥이 되고 마는 것일까.
카이델이 자책하는 사이, 이즈멜이 자연스럽게 분위기의 흐름을 제게로 돌렸다.
“드와이트, 자네 선물도 준비했어. 엘레노어와 같은 것으로.”
이즈멜이 드와이트에게도 선물 상자를 건넸다. 그러자 아드리안이 반색하며 말했다.
“잘된 일입니다. 드와이트 선물로 얼마 전 동대륙에서 들여온 만년필을 준비했거든요.”
“만년필이라. 근사한데. 잠시 봐도 괜찮을까?”
“물론입니다, 전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단 한 사람만이 웃지 못하고 있었다.
‘아, 엘레노어는 쌍둥이였지. 그럼 생일도 같을 테고, 선물도 두 개를 준비했어야 했는데…….’
드와이트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카이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즈멜과 아드리안이 드와이트에게 선물을 건네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이델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그가 선물을 건네야 할 차례였다.
“축하해.”
당황한 카이델이 내내 손에 꼭 쥐고 있던 오르골을 드와이트에게 건넸다. 그는 뒤늦게 아차 했지만, 크림색 상자는 이미 드와이트의 커다란 손에 쥐어진 채였다.
“감사합니다, 각하.”
다행스럽게도 드와이트는 바로 풀어 보는 대신 그것을 소파 옆 탁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를 바라보는 카이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말할까. 나중에 귀띔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엘레노어에게 줄 선물을 다시 사는 게 나을까.
카이델의 고민이 깊어가던 중, 집사 알베르가 가볍게 헛기침해 인기척을 냈다.
“무슨 일인가요?”
“황궁에서 시종장이 도착했습니다. 황태자 전하와 공작 각하께 급히 전달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카이델과 이즈멜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되었든 두 사람을 함께 불렀다는 것은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잠시 실례하지.”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엘레노어와 아이들을 뒤로하고 빠르게 거실을 빠져나왔다. 현관 쪽으로 향하자 시종이 두 사람을 보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카이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위험한 상황인가?”
시종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가지고 온 황제의 서신을 이즈멜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명령하신 일입니다.”
「뫼젠의 왕녀가 방문. 특별히 신경을 기울일 것.」
이즈멜이 서신을 카이델에게 넘겨주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하나?”
“예, 한 시간 뒤에 도착하실 예정이라 합니다. 폐하께서는 각하가 왕녀의 에스코트와 통역을 맡아 주셨으면 하셨습니다. 그리고 왕녀의 방문에 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은 전하께 일임하겠노라 전하셨습니다.”
시종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즈멜과 카이델의 얼굴이 와락 구겨져 들어갔다.
“그럼, 이동하실 마차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공손히 고개를 조아린 시종장이 현관을 빠져나갔다.
제길. 이즈멜이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짓씹듯 중얼거렸다.
“당분간 황궁이 시끄럽게 생겼군. 얼마 전 바르칸에서 친 사고로 소문이 자자하던데.”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카이델의 말에 이즈멜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말도 없이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것부터가 무례한 일이야. 도착하기도 전부터 스스로 제 경우 없음을 증명한 꼴이라고.”
이번에는 카이델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도 왕녀 때문에 적잖이 짜증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른 날이었다면 특유의 무심한 기질대로 군말 없이 명령에 따랐겠지만, 하필이면 엘레노어의 생일날 나타날 건 뭔가.
힐데가르트 칼리에르 아르 데 뫼젠.
뫼젠 국왕이 가장 사랑하는 딸인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유별난 성격으로 유명했다. 아카데미에서도 고삐 풀린 망아지라 불리며 악명을 떨치다 결국 제 발로 학교를 뛰쳐나갔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누비며 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녀가 국왕인 아버지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무척이나 강했다는 것이다. 뫼젠은 작지만 부강한 나라로, 자원이 풍부한 데다 해상무역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관계가 틀어지면 무척이나 곤란해지는 국가였기에, 힐데가르트가 방문한 나라에서는 어떻게든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려 애썼다.
그것이 쉽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또 까다롭기는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얌전하게 굴다가도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주변을 당황시키고,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기 일쑤였다.
끄응. 작게 침음을 흘리던 이즈멜이 문득 생각난 사실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도 자네가 나보다는 그 여자를 더 잘 알겠지. 아카데미 시절 동문이었다면서.”
“함께 공부한 것은 겨우 2년쯤 됩니다. 친분이 있는 관계도 아니었고…….”
“그 정도면 절친하다고 볼 수 있지. 적어도 제국에서 자네보다 그 여자와 가까운 이는 없는 것 아닌가. 아버지께서 일임하신 책임과 권한을 나는 그대에게 일임하겠어.”
카이델이 턱도 없다는 듯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왕녀는 중요한 손님입니다. 그녀의 뜻이 곧 뫼젠 국왕의 뜻이라는 것,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껏 그녀의 눈 밖에 난 곳치고 뫼젠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곳이 있었습니까? 뫼젠이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국가인지는 굳이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자네의 그 입바른 소리가 오늘따라 듣기 싫군. 뭐랄까, 사람 김 새게 하는 재주가 있어.”
“오늘뿐 아니라 늘 듣기 싫어하셨습니다.”
“그래, 그렇게.”
이즈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쉽지만 엘레노어에게 인사를 전해야겠군.”
두 사람이 거실로 걸어 들어가자 엘레노어가 몸을 일으켰다.
“나쁜 일인가요?”
“응, 내게는 무척 나쁜 일이었어.”
이즈멜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대가 걱정할 일은 아니야. 갑자기 맞이해야 할 객이 왔다는 전갈이었거든.”
“아, 다행이에요.”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싶었는데, 먼저 가 보아야 할 것 같아.”
그러자 러그 위에 앉아 시에나가 구워 온 쿠키를 먹어치우던 루카스가 번쩍 일어났다.
“그럼 나도 가야 해?”
“내가 가는데, 너도 가야지.”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스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카이델도 가 보아야 하나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보며 물었다.
“그렇게 됐어. 바로 황궁으로 향해야 할 것 같은데, 데미안이…….”
“제가 데려다줄 수 있어요.”
엘레노어가 선뜻 제안했다.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아.”
“번거롭지 않아요. 아니면 어차피 내일 수업도 있는데, 오늘은 여기서 재울게요. 데미만 불편하지 않다면.”
시에나의 옆에 앉아 눈치를 살피던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떻게 하고 싶어?”
엘레노어가 묻자 데미안이 카이델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카이델이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있을래요.”
“그래, 그렇게 해.”
엘레노어가 웃으며 데미안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정말 급한 일이기는 했는지, 카이델과 이즈멜은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현관에서 두 사람과 루카스를 배웅한 아드리안이 드와이트의 어깨를 붙잡고 속삭였다.
“드와이트, 잠시 아이들 좀 봐줄 수 있을까?”
“물론. 그런데 왜?”
“엘렌이랑 잠시 할 얘기가 있어서.”
드와이트의 어깨를 툭 두드린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에게 다가갔다.
“엘렌, 잠시 나랑 같이 가자.”
“지금? 어디?”
화들짝 놀란 엘레노어가 빠르게 되물었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생일 선물이야.”
아드리안이 싱긋 웃었다. 엘레노어는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성큼성큼 저택 뒤편으로 걸음을 옮기던 아드리안이 멈춰 섰다.
“눈 감아 봐.”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꼭 그래야 해?”
“어서.”
엘레노어는 툴툴거리면서도 순순히 눈을 감았다. 아드리안의 따뜻한 손이 엘레노어의 양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엘레노어는 등줄기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눈 떠도 돼.”
스무 걸음쯤 걸었을 때, 아드리안의 손이 엘레노어의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천천히 눈을 뜬 엘레노어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