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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44화 (44/168)

44화

엘레노어는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느끼며 느지막이 눈을 떴다. 생일을 맞아 스스로에게 준 선물이었다.

“으음. 맛있는 냄새.”

문틈으로 부엌에서 분주하게 요리하는 냄새가 새어 들어왔다. 엘레노어는 코를 킁킁대며 점심 테이블에 올라올 메뉴를 짐작해 보려 애썼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엘레노어, 일어났니?”

“어머니?”

엘레노어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백작 부인과 하녀 둘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생일 축하한다, 아가.”

백작 부인이 다가와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은 하녀들이 다가와 익숙하게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저녁까진 한참 남았는걸요.”

엘레노어의 말에 백작 부인이 어깨를 움찔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생일이잖니. 네가 오늘의 주인공이니 한번 기분을 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요? 그냥 가족끼리 소박하게 보내는 날인데요.”

백작 부인이 엘레노어의 시선을 피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물론 그건 그렇지만……. 이참에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엘레노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그녀의 말을 따랐다.

하녀들이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솜씨 좋게 말아 내리고, 입술에 연지를 발라 주었다. 연분홍빛 레이스가 꽃잎처럼 겹겹이 쌓인 드레스까지 걸치고 나니 엘레노어는 꼭 황궁 연회라도 가는 차림새가 되었다.

“세상에. 예쁘기도 하지.”

“눈부시게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백작 부인과 하녀들이 엘레노어를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거울 앞에 선 엘레노어는 떨떠름한 얼굴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이 드레스는 집에서 입기에 좀 과한 것 같은데요.”

“전혀! 이제 내려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백작 부인이 부드럽게 엘레노어의 등을 떠밀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그녀의 모습에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걸음을 뗐다. 배 속이 요동쳤다.

“좋아요. 조금만 더 걸렸다간 종이라도 뜯어 먹었을지 몰라요…….”

“어머, 농담도.”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갈수록 참을 수 없이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아, 드와이트는 퇴근했어요?”

“진작 도착해서 앉아 있지.”

“오래 기다렸겠…….”

엘레노어가 다이닝룸으로 한 발짝 들어섰을 때였다.

“엘레노어, 생일 축하한다.”

“생일 축하해, 엘렌.”

“선생님, 생일 축하해요!”

귀가 얼얼해질 정도의 축하가 장미꽃잎과 함께 쏟아졌다.

뭐지, 이 상황은.

엘레노어의 시선이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성대한 식탁으로부터 방을 꽉 채운 익숙한 얼굴들에게로 향했다.

루카스, 시에나, 그 옆의 데미안……. 그리고 그 옆의 아드리안, 카이델, 심지어는 이즈멜.

엘레노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건 꿈일 거야. 그것도 아주 지독하고 달콤한 악몽…….’

넋이 나간 엘레노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백작 부인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옆에 서 있던 카이델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데. 물이라도 좀 마시는 게 어때?”

“감사해요.”

얼결에 고개를 주억거린 엘레노어가 물잔을 받아 들었다.

백작이 와인잔을 가볍게 두드리며 식사가 시작되었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했다.

그러니까, 엘레노어만 빼면 그랬다.

“다들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전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우리가 초대했단다.”

백작이 말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초대받았고.”

엘레노어의 오른쪽 자리를 차지한 이즈멜이 덧붙였다.

“깜짝 파티라는 아이디어는 우리가 냈어요!”

입가에 쿠키 부스러기를 잔뜩 묻힌 시에나가 번쩍 손을 들었다. 루카스와 데미안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아이들을 본 엘레노어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하늘로 솟든 땅으로 꺼지든 하고 싶었지만, 그게 불가능한 이상 이 시간을 나름대로 즐길 방도를 찾아야 했다.

“고마워, 얘들아. 다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엘레노어가 아이들을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다 함께 건배할까요?”

“전하, 한마디 해 주시지요.”

백작이 이즈멜을 보며 제안했다. 이즈멜이 그에 선뜻 응하며 잔을 들었다.

“이렇게 즐거운 자리에 초대해 준 것에 감사를 표하네, 백작. 나를 위해 늘 애써 주는 드와이트와, 내 가장 좋은 친구 엘레노어. 두 사람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쁜 마음이야.”

이즈멜의 시선이 엘레노어에게 향했다. 그 순간 아드리안과 카이델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생일 축하해.”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엘레노어가 마주 웃으며 잔을 들었다.

“건배.”

“건배!”

어른들은 와인이 든 잔을, 아이들은 주스가 든 잔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아이들의 재잘거림 덕분에 방 안이 왁자했다.

엘레노어가 아이들 사이에 앉은 아드리안을 힐끔 쳐다보았다. 평소였다면 당연하게 엘레노어의 옆자리를 차지했을 그였다. 그때 아드리안이 엘레노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녕.’

아드리안이 입 모양으로 인사를 건넸다.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매년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생일을 축하하나?”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보며 물었다. 제 생일을 한 번도 챙겨 본 적이 없는 그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네. 보통 이렇게 성대하지는 않지만요. 카이델은 생일을 어떻게 보내요?”

“평소처럼 보내지. 일하고…….”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눈썹을 찡그렸다.

“축하도 없이요?”

카이델이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하지 마. 데미안의 생일은 기억하고 챙기고 있으니까.”

“흐음.”

엘레노어가 결연한 얼굴로 물었다.

“언제인데요?”

“뭐가?”

“생일이요. 기억하고 있다가 축하해드릴게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생일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축하받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잖아요. 그날을 누군가 기억해 준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더라고요.”

“……그럴 것 같아.”

카이델이 약간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엘레노어가 다시 말을 건네려던 때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훈훈한 공기를 질투한 이즈멜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주 다정하네. 내 생일도 기억해 주겠어?”

“이미 알고 있어요. 까맣게 모르셨겠지만, 저는 전하의 탄신 기념 연회에도 매해 꼬박꼬박 갔었답니다.”

“그런데 난 왜 그대를 본 기억이 없을까.”

이즈멜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엘레노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아름다운 영애들을 보시느라 너무 바쁘셨던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그랬다면 그대를 봤겠지.”

이즈멜이 뻔뻔하게 받아치며 씩 웃었다.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고기만 씹고 있던 드와이트가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웩.’

드와이트는 이 공간 안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말도 안 되는 생각 같지만…….’

엘레노어의 양옆에는 제국에서 가장 쟁쟁한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존재만으로 어깨가 움츠러들게 하는 발렌타인 공작. 그리고 드와이트의 상관, 황태자.

문제는 엘레노어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었다. 공작은 어울리지 않게 뺨을 붉히며 엘레노어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황태자는 아예 엘레노어 쪽으로 몸을 튼 채 살살 눈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뭘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부터 뭔가 조금 이상하긴 했는데…….’

백작도 평소와 다른 것을 하나 눈치챘다.

“아드리안, 음식이 입에 안 맞나?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아닙니다. 잘 먹고 있어요.”

아드리안과 엘레노어가 서로 한 마디도 나누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워낙 넉살이 좋아 함께 식사할 때면 분위기를 주도하곤 하던 녀석이, 오늘따라 과묵했다. 황태자와 공작이 동석하고 있으니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을 참작하더라도 그랬다.

‘둘이 크게 싸웠나? 요즘은 전처럼 시시콜콜한 일로 다투는 것 같지도 않더니…….’

빨리 화해시켜야겠군.

백작이 분위기를 풀어보려 입술을 떼려던 때였다. 백작 부인이 그런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그냥 가만히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빨리 빠져 주는 게 엘레노어를 돕는 거라고요. 대충 먹고 어서 일어나요.’

돌아가는 상황을 완벽히 파악한 백작 부인이었다. 방에 콕 박혀 일만 하는 줄 알고 걱정했더니, 쓸모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백작 부인은 풋풋하고 미묘한 공기가 테이블 위를 떠도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다 익지 못한 사랑에서는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향기가 났다.

엘레노어는 흐뭇하게 웃고 있는 백작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러세요?”

“응?”

“계속 절 보면서 웃고만 계시잖아요. 음식에는 손도 안 대시고.”

“그냥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컸나, 그런 생각을 했단다. 충분히 배부르게 먹었고 말이야. 그렇지요, 여보?”

난 아직 좀 덜 먹었는데.

백작의 진심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럼 지금 다 같이 케이크 초를 불까요?”

엘레노어가 밝은 얼굴로 제안했다.

“그거 좋겠구나.”

“좋아요!”

케이크라는 말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평소보다 길어지는 식사 시간에 지쳐가던 참이었다.

시에나가 번쩍 손을 들고 말했다.

“아, 잠깐만요. 선생님 선물 지금 줄래요.”

“지금?”

의자에서 내려와 거실로 달려간 시에나는 선물 더미 틈에서 제 것을 찾아내 가지고 왔다. 엘레노어는 빙긋 웃으며 빨간 리본을 풀었다.

사람 모양의 쿠키가 상자 가득 담겨 있었다. 쿠키마다 삐뚤삐뚤하게 눈코입이 그려져 있었다.

귀여워라.

엘레노어의 눈가가 둥글게 휘어졌다.

“귀여운 쿠키구나!”

“위에 그림은 제가 그렸어요!”

“케이크랑 같이 먹으면 좋겠다. 고마워, 에나.”

엘레노어가 시에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그 모습에 루카스가 자극을 받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도 있어요!”

루카스가 엘레노어의 앞에 작은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상자를 살짝 흔들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루크는 뭘 준비했을까?”

“열어보세요!”

엘레노어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자, 진주가 알알이 박힌 머리핀이 보였다.

“루크, 정말 예쁘다.”

“잘 어울릴 것 같네.”

옆에 있던 이즈멜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루크가 직접 해 줄래?”

“네.”

엘레노어가 살짝 허리를 굽혀 주었다. 루카스가 꼼지락거리며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에 머리핀을 꽂았다. 약간 어설펐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웠다.

성냥으로 초에 불을 붙인 백작 부인이 엘레노어를 향해 손짓했다.

“촛농이 떨어지겠네요. 남은 선물은 촛불을 분 다음에 열어 봐요. 엘렌, 듀이, 이리 가까이 오렴.”

엘레노어와 드와이트가 케이크 쪽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소원 빌어야지.”

아드리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 맞아.”

엘레노어가 두 손을 꼭 모아 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언가 더 바라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식탁 앞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녀와 드와이트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시간을 내고 마음을 써 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정말 소원이 없어요. 지금도 너무 좋아서 더 바라는 건 욕심 같아요. 다들 감사합니다.”

카이델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빌어. 그대의 삶이 늘 이 순간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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