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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42화 (42/168)

42화

뭐……?

아드리안의 소맷자락을 꼭 붙잡고 있던 엘레노어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툭.

무릎 위에 떨어진 것이 제 손인지, 심장인지 엘레노어는 분간할 수 없었다.

눈앞의 소꿉친구를 보는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전혀 낯선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난치는 건가?’

하지만 아드리안은 웃지 않았다. 엘레노어의 입안이 바싹 말라갔다.

엘레노어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너……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응, 진심이야.”

“농담이면 여기까지만 해. 나중에 다 장난이었다고 하면 나 진짜 화낼 거야.”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매끈하던 미간에 얕은 골이 팼다.

“농담처럼 들려? 그럼 안 되는데.”

엘레노어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요란하게 울렸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 어지러웠다.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은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냥 잠시 헷갈리는 것일 수 있어. 원래 남녀가 오래 같이 있다 보면…….”

“엘렌.”

아드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엘레노어를 불렀다.

“내 감정은 확실해.”

그런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퍽 단호한 말투였다.

아드리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본 엘레노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 간절해 보일 만큼 진득한, 확신에 찬 시선. 여전히 얼떨떨하기는 하지만, 아드리안의 진심을 더 의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엘레노어가 떨리는 손끝을 감추려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언제부터였어?”

“꽤 오래됐어.”

아드리안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으려 애썼다. 하지만 말끝이 살짝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시선을 피하지도, 늘 그랬듯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에게 물러설 곳은 없었다.

“너를 좋아해.”

아드리안이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네 연애상담, 해 주고 싶지 않아.”

친구라는 선 위에서 아슬아슬 외줄 타기를 하는 건, 지금까지로 충분했다.

***

선생님이 이상해졌다.

시에나와 루카스, 데미안은 엘레노어를 보며 모두 같은 판단을 내렸다. 몇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선생니임.”

“…….”

“서언새앵니이임.”

“…….”

예컨대 아무리 불러도 넋이 나간 얼굴로 턱을 괸 채 허공을 응시한다든지.

“선생님, 이 도형 문제 모르겠어요.”

“형……?”

“아니, 삼 초는 너무 술래한테 유리하지. 오 초는 되어야 도망을 가도 갈 거 아냐.”

“삼촌……?”

화들짝 놀라 뜬금없는 말들을 뱉는다든지.

덥지도 않은데 바쁘게 손부채질 하는 일은 다반사. 가끔은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변해서는 책에 얼굴을 푹 묻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아무튼 정말로, 정말로 이상해졌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수업을 마친 뒤 돌아가는 마차를 기다리던 세 아이가 서로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선생님 어디 아파요?”

보다 못한 루카스가 엘레노어에게 불쑥 물었다.

“응? 아니……. 좀 늦게 잤더니. 난 괜찮아.”

“그럼 들어가서 좀 쉬세요. 마차 오면 집사 아저씨랑 같이 갈게요.”

시에나가 엘레노어의 등을 은근히 떠밀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도…….”

“선생님 엄청 피곤해 보여요.”

그때 얌전히 있던 데미안이 말을 보탰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제 눈 아래를 주욱 늘이는데,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엘레노어가 흠칫했다. 아이들이 보기에도 그녀의 꼴이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드리안의 고백을 들은 이후로 엘레노어는 내내 멍한 상태였다. 혹시라도 그와 마주칠 만한 상황은 모두 피했다. 어색함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짐작이었다면 모른 척 예전처럼 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카이델이나 황태자처럼.

하지만 아드리안은 그럴 수도 없었다. 엘레노어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대답을 요구하진 않았잖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대할까. 아니면 뭔가 진지한 대화를 시도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엘레노어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민을 떨쳐내려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그러자 아이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엘레노어가 슬며시 물었다.

“내가 그렇게 피곤해 보여?”

“네.”

“엄청요.”

짙어진 눈그늘부터 힘이 빠져 흐늘거리는 손목까지. 나름대로 평소의 텐션을 유지하려 애썼건만 아무 소용 없었나 보다.

잠시 망설이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선생님 먼저 올라가서 쉬어도 될까?”

“네! 당연하죠.”

엘레노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자그마한 손들이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는 엘레노어의 등 뒤를 꾸우욱 밀었다.

“안녕. 잘 자요, 선생님.”

“다음 시간에 봐요.”

엘레노어는 알 수 없는 찝찝함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고마워. 다음 시간에 씩씩하게 만나자. 알베르, 아이들 좀 부탁해요. 마차 타는 것까지 끝까지 지켜봐주세요.”

“걱정하지 말고 쉬십시오, 아가씨.”

엘레노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올망졸망한 시선이 곧바로 집사에게 향했다. 분명 귀여운 아이들일 뿐인데, 알베르는 어쩐지 그들의 시선에 등골이 선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그렇게들 보십니까? 제가 도와드릴 것이라도?”

시에나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저씨의 도움이 필요해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

똑똑.

백작의 집무실 앞에 선 알베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베르입니다.”

“들어오게.”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너머에서 백작의 흔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베르는 평소와 달리 조금 주춤거리며 문을 열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문간에 선 알베르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뵙기를 청하는 분들이 계신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객이 방문했다고? 미리 연락받은 것은 없었던 것 같은데.”

백작이 서류 위에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그것이…….”

그때 열린 문틈으로 조그만 머리들이 쏙쏙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

그렇게 뜻밖의 대담이 이루어졌다. 소식을 들은 백작 부인도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자리했다.

아이들 앞에는 따뜻한 우유가, 백작 부부의 앞에는 홍차가 놓였다.

“많이 먹어요.”

백작 부인이 아이들 쪽으로 쿠키 접시를 조금 밀어놓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루카스가 얼른 쿠키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눈치를 살피던 데미안도 슬그머니 쿠키 접시로 손을 뻗었다.

사실 두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에나의 뒤를 졸졸 따라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세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백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내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네에. 다른 게 아니고요…….”

잠시 우물쭈물하던 시에나가 작은 주먹을 꼭 그러쥐며 물었다.

“혹시 선생님이 어디 아프신가 해서요.”

“엘렌이?”

예상치 못한 말에 백작 부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시에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요?”

“자꾸 불러도 못 들으시고 눈 밑도 막 까맣고…….”

“맞아 맞아.”

루카스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아이들끼리 종알종알 떠드는 소리가 방 안을 소란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말을 귀담아 듣던 백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픈 건 아니고, 요새 일이 좀 바빴던 모양이에요. 엘렌은 어렸을 때부터 그랬거든. 무슨 일이든 맡으면 주변에서 억지로 뜯어말릴 때까지 했어요.”

“역시……. 공부할 때도요?”

백작의 대답에 감명받은 시에나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그 반응에 신이 난 백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글쎄. 공부만큼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도 같아요. 그렇지, 여보?”

“그랬죠. 엘렌은 어렸을 때부터 좀 별난 구석이 있었어요. 드와이트랑 쌍둥이인데도 사실 닮은 구석이 그다지 없었죠. 어찌나 어른스러운지 다들 깜짝 놀랐다니까요. 드와이트가 오빠이기는 하지만, 사실 엘레노어가 드와이트를 반쯤은 키운 거나 다름없답니다.”

“맞아. 엘레노어만큼 얌전한 아이도 없었지만, 또 그만큼 별난 아이도 없었지.”

“별나다니요. 특별하다고 말해야죠.”

부부는 오랜만에 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짤깍짤깍 손뼉을 치며 이것저것 캐 물어오는 아이들의 반응에 이야기할 맛이 났다.

엘레노어가 드와이트가 잘 때까지 자장가를 부르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던 것. 참나무에 걸어두었던 그네에서 종일 책을 읽었다는 것. 여덟 살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는데, 그 내용이 꼭 여든 살 노인이 쓴 글 같았다는 것…….

소소한 에피소드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지루할 법도 한데, 아이들은 이상할 만큼 눈을 반짝이며 다른 이야기를 더 해달라 채근했다.

시에나가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나도 어렸을 때 그네 매일 탔는데. 선생님이랑 똑같네.”

“좋겠다. 우리 집에는 그네가 없었어.”

“황궁에도 없어. 형님한테 하나 달아달라고 할까?”

가끔은 자기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했는데, 그게 너무 귀여워 백작 부인은 두 손에 얼굴을 푹 파묻고 어깨를 떨었다.

‘역시 집에 아이들이 있으니 활기차군. 엘레노어와 드와이트도 딱 요만할 때가 있었는데 말이야.’

드와이트와 엘레노어가 쑥 자란 이후로 이렇게 저택이 왁자한 것은 처음이었다. 약간 때가 이르기는 하지만 귀여운 손자 손녀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백작 부부의 얼굴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그때 백작의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번뜩였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곧 드와이트와 엘레노어의 생일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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