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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41화 (41/168)

41화

엘레노어를 보살피는 신은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주임이 틀림없었다.

고여진으로 갖은 고생을 하게 하더니 엘레노어 에버렛으로 환생해 꽃길을 걷게 하고, 24년간 썸의 ‘ㅆ’도 타보지 못한 엘레노어에게 제국에서 제일 잘난 두 인사를 툭 던져놓았다.

“괜히 의식하지 말자. 당장 연애를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호감이 아주 조금, 미세하게 생겼다는 것뿐인데, 뭐.”

별거 아닌 일이라 생각하며 잠을 청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눕기만 하면 두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왼쪽으로 돌아누우면 카이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면 이즈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결국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밤의 반복이었다.

‘윽, 다크서클……!’

엘레노어의 눈그늘은 하루하루 짙어져만 갔다. 분명 분홍빛 기류가 감도는데, 엘레노어의 얼굴은 반짝이기는커녕 푸석해져만 갔다.

연애 경험치가 제로에 수렴하는 엘레노어에게 두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게임 튜토리얼을 겨우 깬 뉴비가 곧장 보스몹을 맞닥뜨린 기분이랄까…….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에게 살짝 고민을 털어놓기로 했다. 아드리안은 엘레노어보다 훨씬 사교적이었고, 유혹도 숱하게 받아 왔으니 이런 상황에는 더 익숙할 것이었다.

이성인 엘레노어보다는 카이델과 이즈멜을 좀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루카스와 데미안이 돌아가는 것을 배웅한 엘레노어가 쭈뼛대며 아드리안을 향해 다가섰다.

“리안.”

“왜?”

피아노 위에 흐트러진 악보를 정리하던 아드리안이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거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바빠?”

“지금? 에나만 데려다주고 나면…….”

“아니!”

그때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던 시에나가 폴짝 튀어 올랐다. 쪼르르 아드리안을 향해 달려온 시에나는 당장이라도 방 밖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열렬함으로 고개를 저었다.

“삼촌, 나 혼자 갈 수 있어!”

“그래도 내가 널 어떻게 혼자 보내.”

“그럼 집사 아저씨랑 갈게. 그럼 되잖아.”

시에나의 말에 아드리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그러면 되기야 하지만……. 시에나의 눈이 평소보다 배로 반짝거리는 것이 이상하게 찝찝했다.

그런 아드리안의 마음을 짐작한 것처럼 시에나가 얼른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애도 아니고.”

넌 아직 애야, 시에나.

아드리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시에나는 쏜살같이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아드리안과 엘레노어는 서로 멀뚱히 얼굴을 마주 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시에나는 뭐가 저렇게 급하지?”

“몰라. 가끔 저렇게 변덕을 부리더라고.”

아드리안이 작게 고개를 으쓱했다.

“그건 그렇고 시간은 왜? 할 말 있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할 말이 있는데…….”

“서 있지 말고 앉아서 얘기해.”

드르륵. 엘레노어가 앉을 수 있도록 아드리안이 피아노 의자를 빼 주었다.

얌전히 앉은 엘레노어가 괜히 피아노 건반을 이것저것 눌러 보며 시간을 끌었다. 막상 말을 하려니 이상하게 조금 민망했다.

“무슨 얘긴데 그렇게 뜸을 들여. 불안하게.”

“별 얘긴 아냐. 그냥 네 의견을 묻고 싶어서.”

그런 엘레노어를 보는 아드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묘하게 붉어진 뺨, 가만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자꾸만 배배 꼬이는 몸짓. 모든 것이 평소의 엘레노어와는 달랐다.

“그러니까, 이건 내 친구 얘긴데……. 네가 이런 쪽은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아서 의견을 듣고 싶었어.”

제 이야기인 것이 뻔한 것을, 굳이 ‘친구’ 이야기라고 강조하는 모습까지 말이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향해 직구를 던졌다.

“네 친구라면, 나밖에 없잖아. 아냐?”

정곡을 찔린 엘레노어가 어깨를 움찔했다. 이윽고 엘레노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거든? 나 친구 많거든? 네가 모르는 것뿐이거든?”

“그래? 누군데?”

“너한테는 안 가르쳐 줄 거야.”

“안 가르쳐 줄 거야?”

엘레노어의 협소한 인간관계를 콕 집으며 싱긋 웃는 얼굴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어린애 달래듯 하는 말투도 엘레노어의 속을 긁어놓았다.

하지만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게 제일 열불이 터지는 포인트였다. 아드리안은 그녀에 대해 쓸데없이 너무 잘 알았다.

“너랑 얘기 안 해…….”

분한지 아드리안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엘레노어가 그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드리안은 그제야 제가 지나쳤음을 눈치채고 표정을 풀었다.

“이제 안 놀리고 진지하게 들을게. 네 친구가 뭘 어떻게 했는데?”

아드리안이 다정하게 물었지만, 엘레노어에게는 여전히 그녀를 놀리는 것처럼 들릴 따름이었다. 머리 위에 툭 얹힌 커다란 손을 밀어내며 엘레노어가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됐어. 집어치워!”

“방금은 정말 놀린 거 아닌데. 내 친구도 너랑 드와이트, 둘뿐인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건…….”

“어렸을 때부터 내 부끄러운 모습은 네가 제일 많이 봤어.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 엘렌.”

살살 어르는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의 귀가 쫑긋했다. 아닌 척해 보려 애썼지만, 스르륵 녹아 버린 마음은 결국 얼굴에도 티가 났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는 데도 쓸데없이 능숙했다.

엘레노어가 가까이 오라는 듯 아드리안을 향해 손짓했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아드리안이 허리를 숙여 엘레노어에게 귀를 가져다 댔다.

아드리안의 소매를 살짝 붙잡은 엘레노어가 소곤소곤 작게 속삭였다.

“그래, 사실은 내 얘긴데……. 네가 듣기에는 좀 미친 소리 같을 수 있어. 황당하고, 어이없고, 얘가 어디 아픈가 싶고…….”

진짜 무슨 일이 있었나?

아드리안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늘 야무지고 어른스럽던 엘레노어가 지금은 어딘지 불안한 사춘기 소녀 같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누굴 좋아하면 말이야. 티가 나게 되어 있잖아? 표정이든 행동이든.”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드리안은 어쩐지 모를 불안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어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꾸만 그런 느낌을 받거든. 직접 듣지 않았으니 확실한 건 아니지만…… 직감이랄까.”

아드리안의 손끝이 움찔했다. 간신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어떤 사람이 누군데?”

엘레노어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곤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알았지?”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듯 움찔거리던 분홍빛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리안, 아무래도 공작님이랑 황태자 전하께서 날 좋아하시는 것 같아.”

쿵.

그 순간 아드리안의 심장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그제야 아드리안은 엘레노어의 알 수 없는 표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당황스러움. 부끄러움. 그리고 약간의 설렘.

그래, 설렘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들떠 있던 아드리안의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엘레노어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도, 그녀의 작은 손에 꼭 붙잡힌 소매도 그의 마음을 풀어주지 못했다.

“리안, 괜찮아?”

“……응.”

아드리안은 엘레노어의 눈에 제가 조금 이상해 보일 줄 알면서도 표정을 쉬이 갈무리하지 못했다.

“확실한 건 아니야. 그냥…… 혼자 짐작하는 거야.”

말없이 제 얼굴만 빤히 바라보는 아드리안의 시선에 엘레노어가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그와 별별 이야기를 다 나누어 보았지만, 연애상담은 처음이었다.

뭔가 격한 반응이 따라올 줄 알았는데.

아드리안의 반응은 지나치리만큼 정적이었다. 반응하기도 힘들 만큼 놀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 엘레노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못 믿겠지? 이해해. 나도 잘 안 믿기거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말을 끊으며 대꾸했다.

“어?”

“네 말, 믿는다고. 그러니 더 이야기할 필요 없어.”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아까와 비교해 한참이나 가라앉아 있었다. 엘레노어는 낯선 표정의 소꿉친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와 뭔가 달랐다.

작게 한숨을 내쉰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짐작하고 있었어. 전하의 마음까지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아마 네 느낌이 맞으리란 걸 알아. 공작 각하야 원체 티를 내셨으니 모르기가 힘들었고.”

“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아드리안이 쓰게 웃었다.

“사실 네가 이렇게 빨리 눈치챌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적어도 몇 달은 더 걸릴 줄 알았거든, 나는.”

네 눈치 없음만 믿고 방심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드리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엘레노어는 멍한 얼굴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드리안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의 말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어쩌면 엘레노어가 눈치채기 전부터 말이다.

엘레노어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난 얼마 전에야 알았는데, 정말 내가 이쪽으로 감이 무딘 편인 건가? 그런데 아드리안은 알면서 왜 말을 안 해 줬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는 그것도 알아야지.”

“……내가 모르고 있는 게 또 있어?”

“응, 있어.”

사실 꽤 많아.

아드리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창으로 따뜻한 색감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주황빛 저녁놀에 엘레노어의 밝은 금발과 흰 피부, 자그마한 입술이 물드는 광경을, 아드리안은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아름답다.

아주 오랫동안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해 왔지만,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저를 투명하게 비추는 초록빛 눈동자를 멀거니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끝내 참고 참았던 말을 터뜨렸다.

“나도 널 좋아해, 엘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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