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아드리안은 간간이 사물함에 들어 있던 편지와 사탕들을 떠올리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엘레노어의 눈이 반짝였다.
“있구나?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편지에 한 줄도 안 쓸 수가 있어?”
엘레노어가 아이를 대하듯 아드리안의 볼을 잡고 길게 늘였다. 아드리안이 그런 엘레노어의 손을 피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리안 너는 없어?”
“뭐?”
“좋아하는 사람 말이야. 네 눈에 제일 예뻐 보이는 사람. 자려고 누우면 보고 싶고, 나란히 있으면 손도 잡고 싶고…….”
아드리안이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버럭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꽃이나 빨리 따고 돌아가자.”
“너 사춘기구나? 시간도 참 빠르지…….”
엘레노어가 구시렁거리며 적당한 꽃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보기엔 그냥 똑같은 분홍색 꽃일 뿐인데, 엘레노어는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가며 바구니에 담았다.
“얘는 스위트피야. 예쁘지?”
쪼그려 앉은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두근.
그 순간 아드리안의 심장이 거세게 덜컹댔다.
“안 예뻐? 다른 꽃으로 담을까?”
아드리안이 아무 반응이 없자 엘레노어가 재차 물었다. 얼굴에 화끈 열이 올랐다. 누군가를 보며 눈을 뗄 수 없이 예쁘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안 예뻐.”
아드리안이 홱 돌아섰다. 그는 화병을 잡지 않은 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뒷덜미를 슥슥 쓸었다.
이상하다. 정말이지 이건 이상하다.
뒤에서 엘레노어가 그런 아드리안을 향해 무어라 소리치는 것이 들렸지만, 아드리안은 돌아설 수 없었다. 저를 올려다보던 엘레노어의 말간 얼굴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쿵 뛰어댔기 때문이다.
‘예쁘지 않다. 하나도 예쁘지 않다.’
걸음을 재촉하는 내내 아드리안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면 부디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하지만 아드리안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엘레노어는 계속 예뻤다. 아니, 점점 더 예쁘게만 보였다.
방학을 맞아 엘레노어를 오랜만에 볼 때마다, 그녀는 점점 더 눈부시게 피어났다. 사춘기 소년이 으레 그러하듯, 아드리안은 제 마음을 숨기기 위해 괜히 툭툭대며 그녀를 대했다.
“리안! 그 반년 새 키가 더 컸네? 한 뼘은 더 커진 것 같아.”
“너는 어떻게 하나도 안 컸냐.”
“아니거든? 나도 컸거든?”
“내 눈에는 하나도 큰 티가 안 나는데.”
하지만 엘레노어는 그런 아드리안의 태도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방학 내내 아드리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수다를 떨어댔고, 개학을 맞아 아카데미로 떠나면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 일주일마다 보내오는 편지는 늘 몇 장씩 되어 봉투가 두툼했다.
편지가 오는 일요일이면, 아드리안은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엘레노어가 보내온 편지를 몇 번씩 읽곤 했다.
룸메이트가 그런 아드리안을 보며 씩 웃었다.
“오, 여자친구 편지 읽냐? 꾸준히도 오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기는. 거짓말하기 전에 거울이나 보지 그래? 입이 귀에 걸리겠다.”
아드리안이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룸메이트의 말대로 그는 정말 웃고 있었다.
“시끄러워. 진짜 여자친구 아니라고.”
“그럼 그 여자애가 널 좋아하나 보네.”
“헛소리.”
벌떡 일어나 앉은 아드리안이 편지를 서랍 안에 던져 넣었다.
그는 엘레노어를 좋아한다.
아드리안은 열일곱이 되었고, 그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할 만큼 성숙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 상대가 엘레노어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엘레노어는 그에게 제일 가까운 친구이자 남매 같은 존재였으니까.
열여덟,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아드리안은 엘레노어와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소년의 치기였다.
혼자만의 고뇌 속에 몇 년이 흘러갔다. 졸업 후 아드리안은 상단의 배를 타고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름대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후작님! 후작님,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열아홉의 어느 가을날, 그의 세상이 완전히 뒤흔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큰일 났습니다. 펠릭스 도련님이 탄 마차 위로 낙석이 추락했다 합니다!”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은 아드리안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 평화롭던 블레이크 후작가는 완전히 뒤집혔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후작 부인은 그대로 실신하고, 후작은 곧장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겁에 잔뜩 질린 아드리안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은 채 서 있었다. 눈앞이 새카맣게 변하며 충격에 덜덜 몸이 떨렸다.
“리안!”
그때였다. 사고 소식을 들은 백작과 엘레노어가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엘레노어를 발견한 아드리안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엘레노어는 잠옷 위에 외출용 외투를 걸치고, 신발을 구겨 신은 우스꽝스러운 차림이었다.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엘렌.”
“늦게 와서 미안해. 너무 유감이다.”
성큼성큼 다가온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엘레노어가 어깨에 젖은 얼굴을 묻고 등을 꽉 감싼 순간, 아드리안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드리안은 어떻게든 참아 보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울음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더 격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등을 천천히 쓸며 속삭였다.
“울어도 괜찮아. 참지 않아도 돼.”
그 순간 아드리안의 안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엘레노어의 작은 품에 기대 아드리안은 밤새 슬픔을 토해냈다.
엘레노어는 장례가 끝나고 아드리안이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그 모든 시간을 곁에서 함께해 주었다. 후작 부부에게는 딸처럼, 아드리안에게는 누나처럼.
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아드리안은 형이 하던 일을 하나둘 물려받았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다.
“리안, 저녁 먹으러 내려오래.”
“너는 집에 안 가? 드와이트는 어제 갔잖아.”
“오늘 가려고 했는데……. 후작님이 내일 같이 낚시 가자고 하셔서.”
“낚시? 난 낚시 싫어하는데.”
“너 말고 나만.”
변치 않은 것은 단 하나, 엘레노어와 함께 웃고 떠드는 시간뿐이었다. 요동치는 상황 속, 변치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아드리안에게 든든한 기댈 곳이 되어 주었다.
“……나도 갈래.”
“정말? 넌 그런 거 지루해서 딱 싫다며.”
“너는 좋아하니까.”
나는 너를 좋아하고.
아드리안은 엘레노어를 향한 무의미한 반항을 멈췄다. 괜한 트집을 잡는 것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핀잔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마음을 인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길고 지난한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
“얘들아, 뛰지 말고!”
그때 응접실 문밖에서 시끌시끌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옛날 생각에 푹 잠겨 있던 아드리안이 화들짝 놀라며 현실로 돌아왔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아드리안이 머리를 급하게 매만졌다. 이내 벌컥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나는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 배웠어.”
“나는 다섯 살 때부터 배웠거든!”
“난 바이올린도 켤 줄 알거든?”
어릴 적의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처럼 티격태격하며 시에나와 루카스가 들어오고, 그 뒤로 데미안이 가볍게 묵례하며 뒤따라 들어왔다. 적막하던 방 안에 순식간에 시끌벅적 쾌활한 공기가 들어찼다.
“안녕, 리안.”
조금 지친 얼굴의 엘레노어가 인사하며 들어서자, 방 안이 순식간에 환한 빛으로 가득 찼다. 아드리안의 가슴속에 따뜻한 기운이 몽글몽글 퍼져갔다.
“응. 안녕, 엘렌.”
***
“딱 한 번씩만 더 연습하고 마무리하자. 누구부터 할래?”
“삼촌, 나 먼저 할래!”
“그래, 그럼 시에나부터.”
아드리안은 타고난 선생님이었다. 친밀감 형성부터 자연스러운 집중 유도까지, 엘레노어가 끼어들 필요가 없을 만큼 매끄러웠다. 카이델과 이즈멜의 수업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안정감이었다.
이즈멜도 아이들에게 몹시 다정했지만,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아이들을 묘하게 긴장하게 했다.
카이델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아이들은 그를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는데, 카이델이 바짝 긴장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별 기대감이 없었는데……. 이렇게 아이들이랑 잘 어울릴 줄은.’
아드리안의 새로운 면에 대해 알게 된 엘레노어의 눈이 반짝였다.
시에나와 놀아 주던 경험 때문인지, 타고난 다정함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아이들을 능숙하게 대했다. 루카스는 서슴없이 아드리안의 어깨에 매달리며 장난을 걸었고, 데미안도 그의 말을 잘 따랐다.
덕분에 엘레노어는 아까부터 소파에 편히 기대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아이들의 연주가 끝날 때마다 손뼉이나 짝짝 쳐 주고, 엄지나 척 치켜들어 주면 된다니. 이런 것이 바로 힐링이었다.
‘피아노 소리 듣고 있으니 노곤하다…….’
엘레노어가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뺨을 톡톡 두드렸다.
최근 들어 엘레노어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엘레노어의 24년 인생에 처음으로 ‘로맨스’라는 장르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상대가 제국 최고의 미남이라 불리는 카이델이라는 것도 충격인데, 최근에 엘레노어의 안에서 아주 작은 의심 하나가 더 싹텄다. 황태자 이즈멜이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아주 허황하고 무엄한 상상이었다.
“난 엘레노어, 그대와 첫 춤을 추고 싶어.”
별것도 아닌 그 말에 엘레노어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착각이겠지만 꼭 데이트 신청 같아서.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차근히 읽어 보고 있자니 그 생각에는 서서히 힘이 실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