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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36화 (36/168)

36화

엘레노어가 몸을 막 일으키려던 때였다. 루카스가 다급하게 엘레노어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왜?”

엘레노어가 소곤소곤 묻자 루카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라는 뜻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털썩 루카스의 옆에 앉았다.

“계속 이렇게 있을까?”

루카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엘레노어가 다시 루카스의 귀를 막아 주었다. 루카스가 엘레노어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두 사람은 남자들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잠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이제 다 갔어.”

엘레노어가 루카스의 귀를 막은 손을 내리며 말했다.

“아까 그 사람들 누군지 알아?”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 아저씨들은 나를 별로 안 좋아해요.”

“루크.”

“괜찮아요. 그런 사람들 많아요.”

루카스가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엘레노어가 루카스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바보들이네. 너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잠시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던 루카스가 그녀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루카스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나도 알아요. 형님한테 내가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건요.”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 루카스의 손을 꽉 쥐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전하께서 너를 얼마나 아끼시는데.”

“형님은 착하니까요.”

루카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똑똑하고, 멋있고……. 그러니까 다들 형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루크도 착하고 똑똑하고 멋있는데?”

엘레노어의 말에 루카스가 작게 웃었다. 잠깐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아.”

“거짓말. 내 주변에서는 다 선생님 좋아하는데.”

“정말이야. 나도 겪어 봤단다.”

전생을 떠올린 엘레노어의 입가에 잠시 쓴웃음이 떠올랐다. 분에 넘치도록 사랑만 받고 있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삶이었다.

찌질한 남자친구가 친구와 바람이 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하던 가게 사장이 문을 닫고 도망치기도 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기도 하고, 일부러 상처 주고자 던지는 말에 다치기도 했다.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루카스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때 선생님은 어떻게 했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지.”

“우는 건 약한 사람만 하는 거랬는데.”

“아니. 울고 싶을 땐 그냥 울어도 괜찮아. 그건 약한 게 아니야. 자연스러운 일이지.”

엘레노어가 루카스의 머리 위에 손을 톡 올려놓았다. 루카스의 커다란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엘레노어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그렇게 펑펑 울고 충분히 슬퍼하고 나면,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침대 밖으로 나와야 한단다. 침대를 정리하고,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식탁 앞에 앉아 든든하게 배를 채워야 해. 그래야 힘이 나거든.”

“그러고요?”

“다시 열심히 살아가는 거야. 너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엘레노어의 말에 루카스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통통한 뺨을 타고 구슬 같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게 끝이에요?”

“응, 그게 다야. 선생님은 그랬어.”

엘레노어가 루카스의 젖은 뺨을 조심조심 닦아 주었다.

“지금은 무슨 소린지 전부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단다. 하지만 언젠가는 루크 너도 이해하게 될 거야.”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쳐 가고,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초록색 잎들이 서로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과 동떨어진 듯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 엘레노어와 루카스가 눈을 맞췄다.

“그러니 지금은 하나만 기억해. 루크, 너는 정말 소중하고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엘레노어는 루카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실렸다.

“다른 사람들이 너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말들을 진짜라고 믿어 버리면 안 돼. 그런 한심한 말들에 속아서 네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잊어버리는 것, 그것만큼 슬픈 일은 없으니까.”

“그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너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말해 주어야지. 너는 소중하고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엘레노어가 루카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으며 덧붙였다.

“선생님도 말해 줄게. 루크 너는 정말이지 귀엽고 착하고 똑똑하고, 그래서 도저히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이라고. 너를 만나서 선생님은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이야.”

루카스의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번져갔다. 여느 때처럼 맑고 천진한 얼굴로 돌아간 루카스가 엘레노어를 한번 꽉 끌어안았다가 놓으며 말했다.

“다시 돌아가요.”

“돌아갈 준비 됐어?”

몸을 일으키고 치맛자락을 툭툭 털어낸 엘레노어가 루카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루카스가 팔을 뻗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친구들한테 돌아가자. 다들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

「내 좋은 친구, 엘레노어에게.

활짝 열린 창으로 꽃잎이 날아드는 봄날이야.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이 그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라니, 오늘은 어쩐지 느낌이 좋아.

그날은 경황이 없어 제대로 말하지 못했는데, 그대가 보던 그 책은 루카스가 내 이름을 대고 빌린 책이야. 그대가 무어라 답할지 모르지 않지만, 내게는 꽤 중요한 일이야. 그대에게는 아주 작은 오해라도 받고 싶지 않거든.

우정과 억울함을 담아,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억울하신 전하께.

세상에, 어떻게 어린 동생 탓을 하실 수가 있어요! 아무리 부끄러우셔도 그렇죠. 루크는 아직 아홉 살이에요. 아홉 살치고도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아이라고요. 부끄러운 줄 아셔야 해요!!!

엘레노어 에버렛 “백작 영애” 드림」

***

「의심 많은 엘레노어 에버렛 “백작 영애”께

정말이야.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라고.

억울해 펄쩍 뛰는 중인,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집요하신 전하께

네, 그런 것으로 해요. 그리고 정말 신경 안 써요. 우리는 다 큰 성인이잖아요. 그냥 이제 웃고 넘겨요. 그렇게 엄청 자극적인 것도 아니던데요, 뭐.

그건 그렇고 루크는 좀 어떤가요? 얼마 전에는 다 같이 음악회를 갔는데, 좋아하더라고요. 여전히 공부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훨씬 좋아졌어요. 칭찬 많이 해 주세요.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도 좋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꼭 필요해요. 루크가 전하를 많이 좋아하는 것, 아시지요? 바쁘시더라도 루크에게 신경 많이 써 주세요. 요즘 날도 좋고, 꽃도 여기저기 피어 예쁘니 소풍을 가시는 것도 좋겠네요.

정말로 개의치 않는,

엘레노어 에버렛」

***

「관대한 엘레노어에게

루카스는 평소와 같아. 며칠에 한 번 내 집무실에 와서 내 몫의 과자를 전부 털어 가지. 원래는 한두 개쯤 남겨 주는데, 요즘은 말 그대로 ‘전부’ 털어 간다니까. 키가 크려나 봐.

아무튼, 그대의 말대로 루카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도록 할게. 소풍에 대한 것도 좋은 아이디어 같아. 황궁 사냥터가 있는 숲이 소풍에는 제격이지. 자그마한 개천도 흐르고, 야생화가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도 있거든.

그래서 제안하건대, 다 함께 소풍을 즐기는 건 어때? 아이들에게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엄청 자극적인 것도 아니라니. 평소에 어떤 작품을 즐긴 건지 궁금해지는 대목이었어. 티르케의 시집을 좋아한다더니……. 하지만 나도 개의치 않아. 우리는 다 큰 성인이잖아.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담아,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으신 전하께.

웃어넘기시라니까요. 이 이야긴 끝났어요.

그리고 소풍은 좋아요. 카이델, 아드리안에게도 물어보았는데 같은 의견이라네요. 날짜와 장소는 전하께 맡길게요.

엘레노어 에버렛」

***

「공평하지 못한 엘레노어에게.

발렌타인 공작은 카이델이고 블레이크 소후작은 아드리안인데, 왜 나는 아직도 ‘전하’인 거야? 편지를 마흔 통은 더 주고받은 것 같은데 말이야. 내 이름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다음 주 월요일이 좋을 것 같아. 마차를 보낼게.

불만스러운,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황태자 전하께.

아, 그럼요. 전하의 존함이야 아주 잘 알고 있지요.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엘레노어 에버렛」

***

“엘렌, 모자 챙겨야지!”

백작 부인이 챙이 넓은 모자와 온갖 음식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거실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부족하지 않아야 할 텐데.”

“아마 사흘 동안 먹어도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엘레노어는 모자를 대충 눌러 쓰고 바구니를 받아 든 뒤, 마차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카이델이 마차 뒤에 짐을 싣고 있었다. 얇은 셔츠를 입고 멜빵끈이 달린 바지를 입은 그는 평소와 달리 무척 편안해 보였다.

“안녕, 엘레노어.”

엘레노어가 다가서자 카이델이 재빨리 그녀에게서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꽤 묵직하네.”

“저희 어머니가 이런 준비에 무척 열성적이시거든요. 그냥 집 근처 숲에만 가더라도 온종일 먹을 만큼의 음식을 손에 들려 보내신다니까요.”

“다정한 분이신 것 같아.”

“네, 좋은 분이세요.”

엘레노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에나랑 데미안은요?”

“아이들은 안에 타고 있어.”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더라고요……. 물론 저보다는 저희 어머니가 고생하셨지만.”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리며 카이델을 따라 마차 주변을 빙 돌았다.

“소후작은 오늘 오지 못하는 건가?”

“아니요. 일 때문에 조금 늦는대요. 거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아쉽군.”

카이델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물론 좀 늦어진다는 부분 말고, 참석한다는 부분이 말이다.

엘레노어는 다행히 그런 카이델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마주 앉은 데미안과 시에나의 얼굴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안녕. 다들 소풍 갈 준비 됐어?”

“선생님! 여기 앉으세요.”

시에나가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며 웃었다. 카이델과 엘레노어가 나란히 앉는 것을 막으려는 깜찍한 시도였다. 엘레노어가 시에나의 옆자리에 앉자, 자연스럽게 카이델이 데미안의 곁에 자리 잡았다.

“신난다!”

마차가 출발하자 시에나가 창가에 찰싹 붙어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데미안이 말했다.

“루크도 우리랑 같이 가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그러게. 걔가 좀 시끄럽긴 해도 웃기잖아.”

마차가 달리는 내내 시에나와 데미안은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손장난을 쳤다. 평소에는 방긋방긋 웃기만 하던 데미안도 오늘은 들뜨는지 시에나의 말에 꼬박꼬박 장단을 맞췄다.

수다스러운 데미안을 보기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엘레노어는 두 아이가 대화하는 것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질 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뺨이 간질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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