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35화 (35/168)

35화

“오늘은 이 리스트에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책으로 골라 읽는 거야. 알았지?”

엘레노어가 아이들에게 책 이름이 주르륵 적힌 리스트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아카데미에서 필수 교양 도서로 지정한 책들이었다.

“마음에 드는 책이 없으면요?”

루카스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이 중에서 제일 먼저 찾은 책을 읽는 것으로 하자.”

엘레노어가 달래듯 루카스의 등을 몇 번 토닥였다. 엘레노어도 아이들로부터 책장에서 보석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가오는 시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면접관들이 책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것을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책을 찾아다니는 동안, 엘레노어는 책장 사이사이를 산책하듯 거닐었다. 경비병들이 아이들의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엘레노어는 나름대로 자유롭게 도서관 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여기 정말 멋지다. 꼭 미술관 같아.”

전생에서도 엘레노어는 도서관을 자주 찾았지만, 이곳처럼 아름다운 곳은 없었다. 바닥의 타일 하나하나도 예술 작품 같았다. 반짝거리는 자줏빛 타일을 따라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던 엘레노어의 앞에 검은 가죽 구두가 불쑥 나타났다. 근엄한 표정의 경비병이 엘레노어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제한구역입니다.”

“앗, 죄송해요.”

엘레노어가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섰다. 그때 옆에 서 있던 다른 경비병이 빠르게 달려와 그를 저지했다.

“에버렛 영애는 허가받은 분이시다. 실례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엘레노어는 사실 그곳까지 들어갈 생각이 없었지만, 안으로 안내하는 남자의 태도가 너무 정중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뗐다.

“와…….”

그리고 그 순간 엘레노어는 감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바깥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화려하고 장엄한 방이었다. 정갈하게 꽂힌 책들은 대개 세월에 조금 바래 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책에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

그때 엘레노어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이즈멜의 도서 대여 기록이었다.

“전하의 독서 기록이라니. 신기하다. 이렇게 다 기록이 되는 거구나.”

괜히 주위를 한 번 살핀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쳐 들었다.

“나랑은 취향이 좀 다르시네.”

이즈멜의 도서 대여 기록은 딱딱한 정치서와 군사서, 역사서로 가득했다. 일국의 황태자다운 선택이었다. 그중 몇몇은 엘레노어도 읽어 본 것이었지만 소설과 시를 사랑하는 엘레노어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촤라락 종이를 넘겨 보던 엘레노어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엘레노어가 대여 기록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낭만적 유희, 그 유혹의 기술>.

‘뭐야, 이건.’

앞 페이지의 책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책들이 쭉 이어졌다.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였다.

<백작 영애의 뜨거운 사랑>.

세상에!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음을 터뜨린 엘레노어가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래도 엘레노어는 제 편지 친구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한 듯했다.

책을 다시 꽂아 넣은 엘레노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제한구역을 벗어났다. 찾아보고 싶은 책의 리스트가 산더미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백작 영애 어쩌고 하는 책은 꼭 보고 싶다. 제목만 보아도 심상치 않은데.”

엘레노어는 철자 순으로 정리된 책들을 꼼꼼히 훑으며 문제의 책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찾은 끝에 엘레노어는 수상한 붉은색 표지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주변을 꼼꼼하게 살핀 엘레노어가 책의 중간쯤을 펼쳐 들었다.

허업.

엘레노어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쳐 든 페이지에서 주인공들이 진하게 입을 맞추며 격정적인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책에 일일이 얼굴을 붉힐 만큼 엘레노어는 순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낮, 그것도 장엄한 조각상들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아름다운 도서관에서 들여다보기에는 부적절했다.

‘전하께서는 요즘 이런 걸 즐겨 읽으시는구나. 응…….’

그때였다.

“엘레노어.”

“전하?”

이즈멜은 전력으로 달려온 사람처럼 고르지 못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까는 일이 바쁘시다면서요?”

“응. 그렇지.”

그는 어딘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뛰어오셨어요?”

“응. 그냥 운동 삼아. 다른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이즈멜이 엘레노어의 표정을 살피며 횡설수설했다. 엘레노어는 그 순간 그가 달려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웃음을 참으려 애쓰다 보니 책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뭔데요?”

엘레노어가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두 손은 등 뒤로 감춘 채였다.

이즈멜은 엘레노어의 초록색 눈동자가 장난기에 젖어 별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토끼 같은 앞니가 아랫입술을 아주 잠깐 깨무는 것 역시 보았다. 그는 그 순간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엘레노어는 예쁘다.

그러니까, 정말로 예쁘다. 뭔가 근사한 말을 전하고 싶어도 얼빠진 얼굴로 입술만 달싹이게 될 만큼 말이다. 이즈멜은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얼마나 근사한지, 광대뼈 위에 아주 옅게 보이는 주근깨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새삼 깨달았다.

둘째, 그는 망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망했다. 엘레노어의 의미심장한 표정은 그가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는 걸 보여 주었다. 루카스 때문에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변한 제 도서 목록을 엘레노어가 보고야 만 것이다.

이즈멜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거렸다. 이즈멜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선 엘레노어가 등 뒤에 숨겼던 책을 슬며시 이즈멜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혹시…… 이것 때문이세요?”

“이리 줘.”

이즈멜이 다급하게 팔을 뻗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오해야.”

“오해할 게 뭐가 있나요? 그냥 소설책일 뿐인데요. 괜찮아요.”

“그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것. 중요한 건 내가 그걸 읽지 않았다는 거야.”

물론 몇 페이지 정도야 읽었지만.

엘레노어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엘레노어가 한 발짝 물러서면 이즈멜이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이윽고 엘레노어의 등이 차갑고 딱딱한 벽에 닿았다.

좁고 막다른 공간에 갇혔다는 생각이 든 순간, 엘레노어는 둘 사이에 묘한 힘의 이동이 이루어졌음을 알았다. 장난은 아마 여기서 그쳐야 할 모양이었다. 이즈멜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표정이 한층 여유로워졌다. 다시 한번 숨을 고른 이즈멜이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주시지요, 에버렛 영애.”

엘레노어가 그의 손 위에 손바닥만 한 책을 탁, 얹어 놓았다.

“그래요. 전하께서 부탁하시는데 기꺼이 드려야지요.”

“고마워요.”

이즈멜이 책을 등 뒤로 숨겨 버리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다. 입술을 작게 삐죽이던 엘레노어가 툭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에버렛 ‘백작 영애’네요.”

엘레노어가 별 뜻 없이 던진 말은 이즈멜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괜히 혼자 뜨끔한 이즈멜의 귓바퀴가 붉게 물들었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뭘 상상하든 오해야. 내 취향은 고루하고 점잖아, 엘레노어. 제왕학이라거나, 요즘은 천문학이라거나…….”

주절주절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던 이즈멜이 말을 멈췄다. 말을 이을수록 구차해지는 자신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다고.”

***

이즈멜이 돌아가고, 엘레노어는 아이들의 곁에 앉아서 교재 연구에 골몰했다. 쉽게 구하기 힘든 책들이 많아 신이 났다.

엘레노어가 힐끗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데미안과 시에나는 책 몇 권을 옆에 쌓아 두고 앉아 얌전히 책을 읽고 있었고, 루카스는 적당한 두께의 책을 베고 쿨쿨 낮잠을…….

“루크 어디 갔어.”

자고 있었는데 눈을 들어 보니 자리가 비어 있었다. 엘레노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에나가 책장을 넘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화장실 간대요.”

“아. 알려 줘서 고마워, 에나.”

엘레노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교사의 감이었다.

“여기서 얌전하게 책 읽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엘레노어가 화장실이 있는 복도 쪽으로 향했다. 무심코 커다란 창밖을 내다본 엘레노어는 곧바로 반짝이는 자줏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루카스였다.

시간이 얼어붙은 듯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이내 정신을 차린 엘레노어가 눈썹을 찡그리며 루카스를 불렀다.

“루크!”

그 순간 루카스가 오도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치마를 마구 구겨 잡아 들고, 있는 힘껏 그 뒤를 쫓았다.

“거기 서, 루카스!”

“잡히면 책 읽어야 하잖아요!”

“그렇다고 수업 중에 도망가면 안 되지!”

루카스와 엘레노어의 거리는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았다. 루카스는 산 다람쥐처럼 날랬다.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엘레노어는 루카스의 뒤를 따라 황궁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잡기 놀이를 하는 기분인지 루카스가 까르르 높고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신난 그와 달리 엘레노어의 얼굴은 서서히 새빨갛게 익어 가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체력과 인내가 서서히 그 바닥을 드러낼 때쯤, 루카스가 돌연 멈춰 섰다. 그 틈을 타 후다닥 달려간 엘레노어가 루카스의 양쪽 어깨를 꼭 붙잡았다.

“잡았……!”

“쉿.”

루카스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대며 쪼그려 앉았다. 엘레노어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루카스의 지시를 따랐다.

루카스와 엘레노어는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엘레노어는 루카스의 얼굴이 조금 희게 질린 것을 알아차리고 소곤소곤 물었다.

“괜찮아?”

루카스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중후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에게서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엘레노어에게는 낯선 얼굴이었지만, 루카스는 그들을 곧바로 알아본 듯했다. 엘레노어는 루카스와 남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루카스의 앳된 얼굴 위에 선명한 긴장이 떠올랐다.

남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요즘 2황자는 발렌타인 공작의 동생과 어울려 다닌다지요?”

“황태자 전하께서 마음을 강하게 먹으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사람이 너무 좋으셔서 탈이지요. 한낱 부엌데기 궁녀의 아들인 2황자가 황족으로 인정받은 것도 사실 다 전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신…….”

그들은 루카스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재빨리 루카스의 귀를 틀어막았다. 루카스가 조금 놀란 눈으로 엘레노어 쪽을 바라보았다.

루카스의 눈가가 조금 붉어진 것을 본 엘레노어는 속에서 열기가 훅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다니.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어.’

엘레노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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