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30분쯤 지났을까, 아드리안과 드와이트가 뭍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는 새침한 얼굴을 하고 태연한 척 책장을 넘겼다.
“어? 엘렌.”
먼저 올라온 드와이트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머리를 털어내며 주섬주섬 옷을 갖춰 입었다.
“언제 왔어?”
“방금.”
“부르지 그랬어. 바구니는 뭐야?”
드와이트가 바구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엘레노어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먹을 거.”
“살았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성큼성큼 다가온 아드리안이 바구니에서 풋사과 한 알을 집어 크게 베어 물었다. 그가 엘레노어의 앞에 와서 섰다. 엘레노어의 발등 위에 톡,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셔츠를 입지 않은 채였다. 엘레노어는 최대한 그의 금빛 눈동자만을 바라보려 애쓰며 물었다.
“왜 아직도 그러고 서 있어?”
“내가 뭘?”
“왜…… 옷을 벗고 있냐고.”
아삭, 아드리안이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그가 가볍게 그녀 쪽으로 턱짓하며 말했다.
“그야 네가 그 위에 앉아 있으니까.”
엘레노어가 제 아래를 힐끗 보았다.
“드와이트 셔츠 아니었어?”
“응, 내 거야.”
“미안. 착각했어.”
“그럴 필요 없어.”
엘레노어가 얼른 일어나 셔츠를 탁탁 털어댔다. 꽤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구김이 심하게 갔지만, 아드리안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팔을 꿰고 단추를 채워 나갔다.
“얼굴이 붉은데. 어디 아파?”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엘레노어가 재빨리 속눈썹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햇빛에 익었나 봐.”
그러자 아드리안이 두 손을 뻗어 엘레노어의 뺨을 꾹 감쌌다. 방금 물에서 나온 그의 손은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차가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의 손이 닿은 뺨은 점점 더 뜨거워만 졌다.
“뜨거워.”
“네 손이 차가운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물에 발이라도 담그지 그래?”
“젖은 발에 흙이 달라붙는 게 싫어.”
툭 내뱉은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음을 재촉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건 전부 빌어먹을 호르몬 때문이야. 사춘기는 원래 얼마쯤 호르몬의 노예가 되는 시기라고.’
그 생각은 엘레노어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꽤 도움이 됐다. 엘레노어는 금세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고 드와이트에게 달려가 종알종알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엘레노어의 얼굴은 여전히 달아올라 있었지만, 고맙게도 드와이트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이게 다 드와이트 너 때문이야.”
“내가 뭘 어쨌다고?”
“몰라, 그냥 다 너 때문이야.”
***
이상한 여름이 끝나고 아드리안이 아카데미로 돌아가면서 모든 것은 서서히 원래의 궤도를 찾은 듯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엘레노어는 ‘얼른 커서 장가오라’는 농담을 하지 않았고, 그의 머리카락을 마구 흩트려 놓는 일도 그만두었다.
돌아보건대 그날은 유난히 이상한 날이었다. 유난히 더웠고, 드와이트는 유난히 말이 많았으며, 아드리안은 유난히 과묵했다. 그 모든 유난함이 엘레노어를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발을 담그게 했다. 우정보다는 깊었고 사랑보다는 얕았다.
아드리안이 보는 소설 속 에녹과 로지아처럼 말이다.
“엘렌?”
엘레노어의 회상은 아드리안의 목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아드리안이 마차가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엘렌, 출발해야지.”
“응? 아, 그래. 애들 봐줘서 고마워.”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인걸.”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아드리안이 마부에게 손짓하고, 세 사람은 황궁으로 출발했다, 시에나가 창밖으로 목을 쭉 빼고 손을 흔들었다.
“삼촌 안녕!”
황궁 앞의 가도는 곧고 넓어서 마차는 덜컹거림 없이 매끄럽게 굴러갔다. 엘레노어는 시에나가 재잘재잘 떠드는 말들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며 창밖의 풍경을 빤히 응시했다.
‘봄 풍경은 한국이랑 비슷한 것 같아. 물론 여기는 미세먼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커다란 벚나무들이 일정하게 심긴 거리는 아름다웠다. 엘레노어에게는 전생의 출근길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지금도 일종의 외근 중이니 크게 다를 것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마차 주위로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벚꽃잎을 본 시에나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 꽃잎이 눈처럼 내려요.”
“예쁘다. 그렇지?”
엘레노어의 말에 데미안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보다 조금 통통하게 살이 오른 뺨에 발갛게 홍조가 감돌았다. 엘레노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 떨어지는 벚꽃잎을 손으로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대.”
“그거야 쉽죠.”
“생각처럼 쉽지 않을걸?”
별것 아닌 말에도 아이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시에나와 데미안은 창가에 바싹 붙어 앉아 작은 창으로 팔을 내밀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황궁의 첫 번째 관문과 두 번째 관문을 천천히 지나쳐 들어갔다. 그때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직은 조금 더 가야 할 것 같은데?’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손가방에서 황후가 준 나무패를 꺼내 든 엘레노어가 마차 문을 열었다. 군청색 망토를 두르고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그녀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엘레노어가 그 팔을 짚고 땅에 발을 디뎠다.
“감사합니다.”
엘레노어가 살짝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도서관이 여기서 가까운가요?”
남자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대답했다.
“걸어서 10분쯤 걸립니다. 마차로는 그보다 훨씬 덜 걸리겠지만.”
“그런데 왜 마차를 멈추신 건가요? 뭔가 문제가 있나요?”
엘레노어가 얼른 나무패를 내밀었다. 남자는 그것을 받아 들더니 유심히 살폈다.
“이 패라면 저도 잘 알지요.”
“저희는 황궁 출입을 허가받았어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미리 아시는 일이고요.”
“그렇습니까? 짐작하건대 두 분은 제법 가까운 사이인가 봅니다.”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엘레노어가 기겁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아니에요!”
“아니라고?”
남자의 목소리가 확 달라졌다. 익숙한 목소리에 엘레노어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전하!”
이즈멜이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벗고 망토를 팔에 걸쳤다.
“좀 실망스러운걸.”
그때 뒤에서 숨어 있던 루카스가 엘레노어의 옆을 날쌔게 지나쳐 달렸다. 루카스는 마차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시에나와 데미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를 뒤로하고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작게 타박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마차는 왜 멈추신 거예요?”
이즈멜이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날도 좋고, 길도 근사하잖아. 좀 걸어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엘레노어가 먼지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엘레노어의 입가에 빙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네요. 딱 걷기 좋은 날이에요.”
다섯 사람은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는 길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앞서 걷는 아이들의 걸음은 씩씩했고, 따라 걷는 어른들의 걸음은 느긋했다.
이즈멜이 간간이 첨탑과 조각상을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제외하면 두 사람 사이에 대화랄 것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어색하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그 사실에 내심 놀라면서도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본 이즈멜이 말했다.
“다들 사이가 좋아 보이네.”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가르치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니까요.”
“상상이 가는군. 루크랑 시에나는 아직도 자주 싸우고?”
“뭐, 그렇기는 한데 아시잖아요. 한 시간만 지나도 둘은 자기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릴 거예요.”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데미안이 돌연 몸을 돌려 엘레노어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데미?”
엘레노어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머뭇거리던 데미안이 엘레노어 앞에 자그마한 주먹을 내밀었다.
“뭐야? 선생님 주는 거야?”
데미안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손바닥을 내밀자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주먹에 쥔 것을 그 위에 내려놓았다.
보드라운 연분홍빛 꽃잎이었다.
“세상에.”
엘레노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엘레노어는 말을 잇는 대신 기침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몽글몽글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고마워, 데미. 지금껏 받아 본 것 중에 최고의 선물이야.”
엘레노어가 가볍게 데미안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데미안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져갔다.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다시 제 친구들에게로 오도도 달려갔다.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슬쩍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가르치는 건 힘들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죠.”
“확실히.”
이즈멜이 입꼬리를 조금 더 끌어 올렸다. 엘레노어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가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대에게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엘레노어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오늘은 뭔가 선물을 받는 날인가 보다.
이즈멜은 엘레노어의 손에 동그란 나무패를 쥐여 주었다. 엘레노어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건…….”
“그대도 잘 알고 있는 거지.”
앨버트로스 문양, 반질반질 윤이 나는 동그란 나무 명패는 엘레노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저는 이미 이게 있는데요?”
“좀 달라.”
“쓰임새가 다른가요?”
“아니, 쓰임새는 거의 똑같지.”
“그럼요?”
이즈멜이 엘레노어의 손바닥 위에 놓인 나무패를 뒤집어 놓았다.
“여기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잖아. 다르지.”
엘레노어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눈으로 이즈멜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조금 다른 거죠. 정말 제게 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저보다 중요한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요.”
“그다지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데. 예를 들면?”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말했다.
“발렌타인 공작 각하?”
“음, 카이델은 이미 가지고 있어. 아버지가 주셨거든.”
이즈멜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거야. 하나보다는 두 개가 좋지 않아?”
이로써 제국에 있는 다섯 개의 패 중 두 개가 엘레노어의 손에 쥐어진 것이었다. 엄청난 일이었지만, 엘레노어는 그 사실이 가져다줄 정치적 권력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엄청나게 영광스럽지만, 다른 신사분이 주신 것만큼 낭만적이지는 않네요.”
엘레노어가 꽃잎을 쥔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즈멜이 선선히 인정하며 눈썹을 으쓱해 보였다.
“데미안에게 한 수 배웠군.”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거든요. 너무 귀엽죠?”
엘레노어가 아이들과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풀어놓는 동안, 이즈멜의 정신은 하늘에서 살랑살랑 떨어져 내리는 꽃잎에 집중되어 있었다. 엘레노어가 시선을 돌린 틈을 타서 몇 번이고 날쌔게 집어 챘지만, 주먹에 힘이 들어갈수록 꽃잎은 놀리듯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빤히 미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안에 이상한 오기가 샘솟았다.
‘잡고 만다.’
이즈멜은 도서관으로 향하는 내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엘레노어는 모르는, 그만의 사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