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당신의 사랑을 이루어 줄 두근두근 러브 레시피>.
카이델의 삭막한 책상 한가운데 분홍색 표지의 책 한 권이 수줍게 놓여 있었다. 카이델은 조잡한 꽃잎과 리본, 하트로 가득한 표지를 적장의 잘린 머리를 내려다보듯 보았다.
“조나단.”
집사 조나단은 제 주인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가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갔다.
“예, 각하.”
“내 책상 위의 이…… 해괴하고 불순한 건 뭐지? 자네가 놓아둔 건가?”
카이델이 떨떠름한 손끝으로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힐끔 책상 위를 쳐다본 조나단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각하의 책상에 일체 손대지 않았습니다만…….”
그때 조나단의 머릿속에 아까 본 장면 하나가 스쳐 갔다.
“아, 아까 데미안 도련님이 이 방에서 나오시는 걸 봤습니다. 아마 도련님께서 두신 게 아닐까요?”
“데미안이?”
의외의 출처에 카이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손이 툭, 매끄러운 분홍빛 표지 위에 내려앉았다. 얼떨떨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조나단이 카이델을 향해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주시면 제가 치우겠습니다.”
“치우다니. 데미안이 두고 간 거라면서.”
무슨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듯 대번에 매서운 시선이 돌아왔다. 그가 책을 보호하듯 손바닥으로 덮었다.
‘아까는 해괴하고 불순한 것이라지 않으셨습니까!’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고용주의 말인데 얌전히 따라야지. 조나단이 얼른 두 손을 거두었다.
“나가 봐.”
조나단이 나가고,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책을 집어 들었다.
“당신의 사랑을 이루어 줄 두근두근…….”
다시 읽어 봐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제목이었다.
데미안은 어째서 이런 책을 고른 걸까. 어쨌거나 데미안에게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니 펼치기는 해야 했다.
후. 잠시 호흡을 고른 카이델이 책의 표지를 열었다. 입 맞추는 연인이 조잡한 그림체로 그려져 있었다. 카이델이 눈썹을 슬쩍 치켜세웠다.
‘이건 순전히 데미안 때문에 읽는 거다.’
-이 책을 펼친 당신, 혹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가?
서문의 첫 줄을 읽으며 카이델은 자연스럽게 엘레노어를 떠올렸다. 하지만 제목과 표지 디자인에서 이미 책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쳤으므로, 그는 삐딱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열병까지는 아닌데.’
-당신은 분명 ‘열병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펼쳤을 때 당신의 머릿속에는 분명 누군가가 떠올랐을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 말이다. 수줍어 마시라.
흠칫.
책장을 대충 넘기려던 카이델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정확하게 간파당한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당신의 연애 사업이 그리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으리라는 데 나는 이 책의 인세를 전부 걸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님과 함께 행복한 연애 중이었다면 이런 책 따위 펼쳐 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카이델의 눈에서 의심의 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책을 붙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당신의 그 사람이 당신의 마음을 몰라주는가? 강력한 연적의 등장에 괴로운가? 누군가를 좋아해 본 것이 처음이라 갈피를 잡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이 책이 완벽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할 수가.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며 카이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 대한 의심은 저 멀리 날아간 지 오래였다. 한 문장 한 문장 정독하는 카이델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필자는 당신의 사랑을 응원한다. 부디 님과 함께 백년해로하시기를.
한동안 카이델의 방에서는 책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학구열에 불타는 카이델이었다.
***
“헨리, 대체…… 이게 다 뭐지?”
<낭만적 유희, 그 유혹의 기술>.
<백작 영애의 뜨거운 사랑>.
<은밀하게 열렬하게, 황궁 연애담>.
이즈멜의 책상 위에는 온갖 민망한 제목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가 아연한 시선으로 그것을 한 권 한 권 살폈다.
“루카스 황자님께서 사람을 시켜 두고 가셨습니다.”
“루카스가?”
이즈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건…… 루카스가 보기에는 아직 좀 이른 것 같은데.”
<백작 영애의 뜨거운 사랑>을 집어 들어 촤르륵 넘겨 보던 이즈멜이 묘한 얼굴을 했다.
“불온서적 아닌가?”
언뜻언뜻 보이는 자극적인 단어들이 강하게 뇌리를 파고들었다. 황궁 도서관에도 이런 외설적인 소설이 있는 줄은 몰랐다.
“사랑, 유혹, 연애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은 죄다 빌려오신 것 같더군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루카스가 저와 엘레노어를 이어 주고 싶어 애쓴다는 것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그마한 머리를 열심히 굴린다 싶더니, 제법 깜찍한 일을 벌였다.
“전부 반납할까요?”
“됐어. 일단은 그냥 둬. 루카스의 성의가 있는데 대충은 살펴보는 게 형의 도리지.”
이즈멜이 우아하게 책장을 넘겨 보며 답했다. 제왕학이라도 공부하는 듯 진지한 얼굴이었으나 눈동자에는 묘한 장난기가 흘렀다.
그런 상관을 바라보던 수석 보좌관 헨리의 얼굴이 근엄하게 변했다.
“전하, 부디…….”
“알았어. 다 가져가.”
은근한 책망이 담긴 목소리에 이즈멜이 금방 꼬리를 내렸다. 헨리의 잔소리가 길어지기 시작하면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면서도 내심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는 않았다.
“귀엽지 않나? 형을 이토록 위하는 아우라니.”
“황자님께서 전하를 많이 따르기는 하시지요. 더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요.”
귀여운 루카스를 떠올린 헨리의 얼굴이 부드럽게 녹았다. 피식 웃은 이즈멜이 나직이 읊조렸다.
“분발해야겠어. 동생이 이리 나를 응원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
***
“재밌게들 노네.”
엘레노어는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창틀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문비나무 아래서 아드리안이 시에나와 데미안과 함께 놀아 주고 있었다. 아이들의 높고 맑은 웃음소리가 창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오늘은 황궁 도서관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마차가 준비되는 동안, 아드리안은 아이들을 데리고 정원을 돌아보겠다고 자처했다. 덕분에 엘레노어는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순간 엘레노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최근 들어 엘레노어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엘레노어의 24년 인생에 처음으로 ‘로맨스’라는 장르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상대가 제국 최고의 미남이라 불리는 발렌타인 공작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별거 아닌 일이라 생각하며 잠을 청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눕기만 하면 두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왼쪽으로 돌아누우면 카이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면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결국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밤의 반복이었다.
데미안의 웃는 얼굴로부터 시선을 돌린 엘레노어가 빨간 표지의 책을 펼쳐 들었다. 아드리안의 가방에서 반쯤 튀어나와 있던 것이었다.
“<사랑과 우정 사이>라……. 리안이 이런 소설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책은 처음 두세 페이지만 읽고도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뻔한 로맨스 소설이었다. 친구였던 두 남녀가 천천히 사랑에 빠져드는 이야기 말이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사선을 그리며 내용을 빠르게 훑어나갔다.
툭. 엘레노어가 책장을 넘긴 순간 납작하게 눌린 채 바싹 마른 레몬버베나 줄기가 떨어졌다. 아드리안이 책갈피로 끼워 놓은 것인 듯했다. 엘레노어는 그가 읽고 있던 부분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그날을 기점으로 로지아를 바라보는 에녹의 마음에는 이상한 충동이 싹텄다. 처음에 에녹은 제가 로지아에게 화가 난 걸까, 생각했다. 로지아가 그를 보며 활짝 웃을 때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어 홱, 고개를 돌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는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가슴에 고여 드는 열기는 종종 눈앞의 그녀를 전부 불사를 듯 흉흉한 불기둥으로 변해 솟구쳐 오르곤 했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책에서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아드리안이 데미안을 번쩍 안아 올려 언덕 아래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엘레노어는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비밀스러운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리안은 평생 모르겠지. 한때는 나도 에녹처럼 저한테 빠져 있었다는 거.’
엘레노어가 책을 덮어 아드리안의 가방 안에 다시 넣어두었다. 엘레노어는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풋사랑을 추억했다.
***
엘레노어에게 아드리안은 늘 귀여운 동생이었다.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사실은 열일곱의 여름, 아주 작은 사고에 의해 허무하게 깨어졌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블레이크 영지의 저택에서 두 가족이 함께 휴가를 보내는 중이었다.
드와이트와 아드리안은 종일 산이며 들이며 쏘다니기 바빴고, 엘레노어는 나무 그늘 아래 보드라운 천을 깔고 누워 고전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백작 부인이 주스와 빵, 사과 몇 알이 든 바구니를 들고 엘레노어에게 다가왔다.
“엘렌. 듀이랑 리안더러 이것 좀 전해 주련? 아무래도 내내 밖에서 쫄쫄 굶고 다닐 모양이다. 어쩜 배고픈 것도 모르고 노는 건 다 커서도 여전한지.”
엘레노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놔두면 알아서 돌아올 거예요. 정 배고프면 풀이라도 뜯어 먹겠죠.”
“엘렌!”
“알았어요. 갔다 올게요.”
엘레노어는 묵직한 바구니와 읽던 책을 집어 들고 전나무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투덜거리며 한참을 걸은 끝에 엘레노어는 호숫가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힘껏 밀치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여튼 둘 다 정말 귀찮다니까.”
엘레노어가 두 사람을 부르려던 때였다. 순식간에 셔츠를 훌훌 벗어 던지고 신발을 멀리 걷어차 버린 드와이트가 호수로 뛰어들었다. 아드리안도 망설임 없이 옷을 벗고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엘레노어는 어정쩡하게 멈춰 서서 눈을 깜빡였다. 초록빛 호수에서 신나게 헤엄치는 두 사람을 잠시 지켜보던 엘레노어는 그냥 얌전히 둘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간 나오겠지, 뭐.”
엘레노어는 바위 위에 드와이트의 셔츠를 깔고 앉아 책을 펼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재미있게 잘 읽고 있던 책이건만, 이상하게 재미가 없었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자꾸만 책이 아닌 호수 쪽으로 향했다.
“하나, 둘, 셋…….”
드와이트가 숫자를 세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누가 물속에서 더 오래 숨을 참을 수 있는지, 바보 같은 내기를 하는 듯했다. 호수 표면에 아드리안의 갈색 머리카락이 동그랗게 퍼져 있었다.
‘얘는 왜 안 나와?’
슬슬 걱정되기 시작할 때쯤 아드리안이 쑥 물 밖으로 나오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손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환하게 웃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젖은 채 햇빛 아래 반짝였다.
아드리안의 목덜미를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너른 어깨와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등은 여름의 볕에 조금 그을린 채였다. 엘레노어는 어째서인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엘레노어가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왜 이래. 정말 미쳤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