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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32화 (32/168)

32화

깜빡 깜빡.

코앞에 들이닥친 잘생긴 얼굴에 잠시 몽롱해진 엘레노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즈멜의 말을 약 10초간 곱씹던 엘레노어가 별안간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서 물러섰다.

“저요? 안 돼요! 저 춤 진짜 못 춰요.”

엘레노어가 열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진짜 못 춘다는 걸 겸양의 의미로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정말 객관적으로 형편없다는 뜻이에요.”

“괜찮아. 내가 능숙하니까.”

“진짜 안 된다니까요? 발등이 남아나지 않으실 거예요. 저는 황족 상해죄로 죽고 싶지는 않아요!”

한껏 목소리를 낮춘 엘레노어가 눈에 힘을 팍 주며 이즈멜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진지하게 하는 소리인데,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점점 더 짙어지기만 했다.

“그럴 일 없어. 약속하지. 죽을 때까지 내 발등을 멍투성이로 만든 범인에 대해서는 함구할게.”

응? 그럼 괜찮지 않아?

이즈멜이 조르듯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그의 말에는 거절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어쩌면 그런 게 바로 권력인지도 모르겠다고 엘레노어는 생각했다.

반쯤 포기한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렸다.

“그거 아세요? 전하는 정말이지 고집불통이세요. 분명 어렸을 때 선생님들 고생깨나 시키셨을 거예요. 그렇죠?”

“……엘레노어, 황족 상해죄 말고 황족 모독죄라는 것도 있어. 알고 있나?”

“그래요? 그럼 고발하시든가요.”

엘레노어가 하나도 겁나지 않는다는 듯 여상히 대꾸했다. 이즈멜이 고개를 갸웃하며 픽 웃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아주 뻔뻔해. 분명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귀엽고.

“전하는 제 불손한 태도를 환영하는 분이라는 걸 이제는 알거든요.”

“그래, 그래도 더는 거절하지 마. 그대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시간을 내지도 않았을 거야.”

그때 피아노 연주자가 도착했다. 황태자가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을 발견한 그가 허겁지겁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즈멜이 아이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며 힘차게 말했다.

“그럼 시작할까?”

***

“힘을 풀어야지, 엘레노어.”

“힘이 자꾸 들어가는데 어떡해요. 제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요.”

“발 밟아도 괜찮으니 시선은 내 눈에 고정해. 자꾸 바닥 보지 말고. 그럴수록 더 엉킨다니까.”

분명 아이들을 위한 수업이었는데, 어느 순간 엘레노어를 위한 이즈멜의 1대1 강습이 되었다. 아이들은 오히려 제법 정확한 자세로 이즈멜의 가르침을 따라오고 있었다.

이즈멜은 제가 보증했던 대로 타고난 춤꾼이었다. 길고 미끈한 몸매는 조금만 움직여도 태가 났고, 동작 하나하나가 교본보다 더 교본 같았다.

그래서 그는 엘레노어 같은 몸치의 애환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꾸 힘을 빼라고 하는데,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발아래에서 값비싼 가죽 구두가 꾹꾹 밟히는 느낌이 선명한데 어떻게 그걸 외면할 수 있나.

“아이들은 곧잘 따라 하네요.”

역시 어릴수록 습득력이 더 좋은 걸까.

“그러게 말이야. 연습은 시범 조교가 제일 많이 해야겠는데?”

이즈멜이 선선히 동의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레노어가 그의 발을 꾹 밟았다. 몇 번이나 지적받았던 실수였다.

“으윽.”

이번에는 좀 아팠는지 이즈멜의 잇새로 가느다란 신음이 샜다. 뜨끔한 엘레노어가 작게 쏘아붙였다.

“바, 방금은 일부러 밟은 거예요. 그만 웃으시라고요. 기분 나쁜 생각이라도 하면서 참아 보세요.”

“기분 나쁜 생각?”

황당하다는 듯 웃던 이즈멜은 그 순간 얼마 전 들었던 보고를 떠올렸다.

‘방금 아미키디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제저녁 늦게 에버렛 영애가 발렌타인 공작과 함께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마음이 가라앉으며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랬지. 그 일이 있었군.”

갑자기 차분해진 이즈멜의 분위기에 엘레노어가 흠칫했다. 정말 엄청나게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줄곧 장난기가 흐르던 붉은 눈동자에서 언뜻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할 말이 있던 것이 생각났어.”

“제게요?”

이즈멜이 엘레노어의 허리를 살짝 끌어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얼마 전에 아미키디아에 갔다더군. 발렌타인 공작과, 야심한 시각에.”

“야심한 시각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즈멜이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모를 수가 있나? 거기는 내 구역이야.”

“아!”

“알려고 하면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까지 전부 알 수 있는, 완벽한 내 구역.”

이즈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엘레노어가 흠칫했다.

“전부 아신다고요? 그걸 전부……?”

“왜. 내가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도 있었나 보지?”

엘레노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간신히 잊고 있었는데, 카이델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에 맴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 엘레노어의 얼굴을 보자 이즈멜의 기분은 한층 더 깊이 가라앉았다. 모르고 싶은 것까지도 알 수밖에 없게 하는 투명함이었다.

‘공작이 제 마음을 엘레노어에게 어설프게나마 밝힌 모양인데, 불행히도 아직 걷어차이지는 않은 것 같군.’

순식간에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 낸 이즈멜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심기가 무척이나 불유쾌했다.

“아니, 몰라.”

이즈멜의 말에 엘레노어가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허, 이즈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내가 거기서 고백도 했었는데, 다른 남자를 거기로 데리고 가?”

“고백이라뇨!”

혼자 뜨끔한 엘레노어가 목소리를 높였다. 엘레노어는 아이들의 시선이 제게로 쏠린 것을 느끼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엘레노어의 귓가에 이즈멜이 속삭였다.

“말도 안 되기는. 내가 선물한 토끼 인형은 잘 있나?”

“아, 그 못생긴 토끼 인형이요? 잘 있어요.”

“볼 때마다 내 생각 좀 하라고 준 건데 제 역할을 못 하네, 토끼가.”

긴장이 풀어진 엘레노어가 가벼운 농담으로 이즈멜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게요. 토끼가 근무 태만이네요.”

이즈멜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볍게 등을 감싼 그의 손에서 그 울림이 전해져 왔다. 엘레노어가 마주 웃었다.

“아무튼 질투 유발이라면 제대로 성공했다고. 훌륭한 도발이었어. 덕분에 바짝 정신이 들었으니까.”

“그런 거 아니었어요!”

이즈멜의 눈꼬리가 길게 휘었다.

“그래, 그럼 나 혼자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거로 해두든지.”

***

수업이 끝나고 마리안느가 돌아갔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아이들이 전부 휴식하는 동안에도 이즈멜에게 붙잡혀 특훈에 시달려야 했다.

“방금 ‘고백’이라고 했지?”

꼭 붙은 두 사람을 힐끔 눈짓한 루카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아이는 머리를 맞대고 작게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전하께서 고백을 하신 건가? 아니면…….”

시에나의 말에 루카스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선생님이 우리 형님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응, 아니야.”

그 가능성을 가볍게 무시한 시에나가 데미안을 보며 물었다.

“너는 너희 형한테 뭔가 들은 거 없어?”

“없는데.”

“진짜 없는 거야, 말을 안 해 주겠다는 거야…….”

시에나의 말을 가만히 곱씹던 루카스가 억울한지 인상을 구기며 따져 물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왜 우리 형님은 아니라는 건데?”

우리 형님이 뭐가 어때서!

“그래서 네가 뭘 모른다는 거야. 딱 봐도 푹 빠진 건 전하시지.”

“어째서?”

한숨을 푹 내쉰 시에나가 두 사람을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서 있는 것만 봐도 알겠다. 이야기할 때 선생님은 자꾸 몸을 뒤로 기대시잖아. 거리가 가까우니까. 그에 비해 전하는…… 거의 앞으로 쏟아지시겠다.”

“그게 뭐?”

“전하께서 훨씬 적극적이시라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

시에나의 말에 루카스와 데미안의 고개가 두 사람 쪽으로 홱 돌아갔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랬다.

“그건 그렇고, 전하께서는 너랑 달리 무척 치밀하신 것 같아. 존경스러워.”

시에나가 이즈멜을 인정하듯 추켜세우자, 루카스의 얼굴이 사르르 풀어졌다. ‘너랑 달리’라는 말은 루카스에게는 들리지도 않았다. 루카스가 헤벌쭉한 얼굴로 물었다.

“왜?”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실 때부터 전부 계산하신 게 틀림없어. 저렇게 가까이 붙어 서서…….”

진심으로 감탄스럽다는 듯 시에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저는 진작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공작님은 정말 열심히 검술만 가르치시는데, 전하께서는 아까부터 선생님만 가르치고 계시잖아.”

“그건 선생님이 춤을 못 추셔서 그래.”

시에나가 카이델을 언급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데미안이 발끈했다. 시에나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확실히 그런 이유도 있겠지.”

루카스가 정말로 신기하다는 듯 시에나를 보며 물었다.

“넌 그런 걸 대체 어디서 주워듣고 오는 거야?”

“주워듣는 게 아니라 읽는 거야. 서점에 가면 쌓여 있는 게 연애 관련 책인걸.”

“책이라고?”

루카스와 데미안의 귀가 쫑긋했다. 역시 시에나는 보통 애가 아니었다. 혼자서 그런 걸 숨겨 두고 읽고 있었다니, 치사한 일이 아닌가. 확실히 책을 읽어서 그런지, 뭔가 전문가 같은 느낌이 좀 났다.

‘황궁 도서관에도 있겠지. 형님 집무실로 죄다 보내 놓아야겠다.’

‘우리 형한테도 선물해 주고 싶은데.’

남자아이들의 머릿속에 형들이 알면 질겁할 생각들이 퐁퐁 샘솟았다.

“응. 잘 찾으면 제법 괜찮은 게 많더라고. 잘 보고 골라야 해.”

시에나도 삼촌의 동기부여에 도움을 줄 만한 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업 때문에 내내 잘 붙어 있는 것 같아 별말 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불안했다.

“아무튼, 어른들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던 게 분명해. 당분간 좀 더 유심히 지켜봐야겠어.”

다른 아이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의 연애란 신기한 것이었다. 진전 없이 멈춰 있는 것 같다가도 화르륵 불이 붙고,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반전이 끊이지 않는 연극 같았다.

“다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그때 살금살금 다가온 엘레노어가 고개를 쏙 내밀며 물었다. 그 연극 속 하나뿐인 여주인공이었다. 아이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눈빛이 오갔다.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젠간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쉿.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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