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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31화 (31/168)

31화

“수도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

황금 공단에 새겨진 황실의 문양을 유심히 살피던 카이델이 말했다.

“외관이랑 전혀 다른 느낌이라 신기하죠? 저도 처음에는 찾기 힘들었어요.”

엘레노어가 이해한다는 듯 생긋 미소 지었다.

금세 두 사람을 위한 향긋한 차와 간단한 티 푸드가 준비되었다. 배부르게 저녁을 먹었는데도 달콤한 디저트를 보니 군침이 돌았다.

그것을 눈치챈 카이델이 엘레노어 쪽으로 접시를 밀어놓으며 물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게 되었지? 우연히 올 수 있는 곳은 아닌 듯한데.”

“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초대하셨어요.”

“전하께서?”

아까는 소후작, 이번에는 황태자.

불쾌한 이름들이 연이어 튀어나오자 카이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잘생긴 눈썹이 꿈틀했다.

얌전히 황궁 안에 계신 줄로만 알았던 전하께서는 뒤에서 남몰래 수를 쓰고 계셨는가 보다.

‘황궁에서 수업을 하겠다던 때부터 감이 좋지 않기는 했지만…….’

엘레노어와 눈이 마주치자 카이델은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네, 루카스 일로 의논드릴 게 있어서 면담 요청을 드렸거든요. 전하께서 직접 나오실 줄은 저도 몰랐지만.”

엘레노어가 먼저 면담을 요청한 것이니 할 말은 없었다.

‘내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시험을 일부러 망치라고 할 수도 없고…….’

면담 때문에 데미안이 조금 덜 똑똑해지거나, 말썽을 일으키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이델은 약간 착잡한 마음으로 데미안을 떠올렸다. 말썽 한 번 없이 착실하게 제 할 일을 잘해 가고 있는 아이였다.

“그래서 카이델, 무슨 고민이 있으신 거예요? 공작저에 뭔가 일이 있었나요?”

그래, 그게 문제였다. 데미안에게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당연히, 딱히 고민할 만한 거리도 없었다.

“그게…….”

카이델이 최근 몇 주의 기억을 빠르게 되짚으며 머리를 굴렸다. 고민 비슷한 것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카이델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엘레노어에게 질문을 던졌다.

“요즘 데미안은 좀 어때. 친구들이랑은 잘 어울리나?”

“네, 잘 지내죠. 다들 데미안을 좋아하고 따라요. 가만히 보다 보면, 은근히 대장 역할을 한다니까요.”

“그래?”

“루카스랑 시에나가 티격태격하면, 데미안이 그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하거든요. 얼마나 어른스러운지 몰라요. 전보다 훨씬 잘 웃고요.”

엘레노어의 말대로였다. 데미안은 요즘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여전히 말은 잘 하지 않지만, 마주치면 눈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단둘이 있는 마차에서 편안하게 졸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카이델이 어색한 목소리로 덧붙여 물었다.

“공부는 곧잘 따라오고?”

“그럼요. 잔 실수도 전보다 훨씬 적어졌어요. 체술 수업에도 열심인 것 같던데요?”

“응, 그렇지.”

직접 목검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며 지켜본 모습은 또 새로웠다. 루카스, 시에나와 어울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그 나이대 어린애 같았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따라오려는 것을 보면 기특했다.

“그리고…….”

“카이델.”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말을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카이델의 얼굴 가득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어색한 시선 처리, 불안한 듯 테이블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내뱉는 말들, 질문을 던져 놓고도 그 대답에는 묘하게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

아무리 보아도,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엘레노어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카이델의 얼굴을 슥 훑었다.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카이델과 지그시 눈을 맞춘 엘레노어가 차분하게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화내지 않을게요. 급한 고민, 정말 있으신 거 맞아요?”

그 순간 카이델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이 남자, 거짓말에는 정말 소질이 없구나.’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는 카이델을 보며 엘레노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동시에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미안.”

“사과는 필요 없어요. 진짜로 기분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못하는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굳이 지금 시간을 내달라고 청해야 했던 이유가 뭘까. 이렇게 금방, 쉽게 들킬 거면서.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아까는 그럼 왜 그러신 거예요?”

그 말에 카이델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조금만 더 부끄러웠다간 김도 날 것 같았다.

“혹시 제가 아드리안이랑 있는 게 질투 나셨던 거예요?”

엘레노어가 가볍게 농담을 건넸다. 카이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의도가 반이었고, 조금 더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나머지 절반을 차지했다.

“응.”

그런데 돌아온 반응은 엘레노어의 예상과는 너무 다른 것이었다. 내내 아무런 말도 없던 카이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랬던 것 같아.”

카이델에게 없는 말을 적당히 꾸며 둘러대는 재주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엘레노어의 말에 그럴싸한 대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거짓말을 할 바에야 입을 다물고 마는 대쪽 같은 성정도 한몫했다.

이런 순간, 카이델은 늘 정공법을 택했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놀라서 동그랗게 커진 엘레노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카이델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소후작과 그대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걸 지켜보는 게 싫었어. 전하와 그대가 이곳에 마주 앉아 나누었을 대화를 상상하는 일도, 내게는 그리 유쾌하지 않고.”

카이델이 신중하게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었다.

“그래, 엘레노어. 명백하게도 질투였어.”

부끄러움에 몸이 달아오른 것은 카이델이 아닌 엘레노어 쪽이었다. 거울을 보지는 못했지만, 엘레노어는 지금쯤 제 얼굴이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으리란 것에 이번 달 월급을 몽땅 걸 수 있었다.

‘카이델이 나를 좋아하나?’

‘대체 왜? 저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에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런데 카이델이 이런 거로 장난칠 사람은 아닌데……. 오늘 봐서 알잖아. 거짓말에는 젬병인 거.’

‘……설마 진짜인가?’

잠깐 사이에 엘레노어의 머릿속에는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제멋대로 눈썹이 움찔거리고 입술이 삐죽여졌다. 놀라지 않은 척, 당황하지 않은 척하려고 애썼지만,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어느덧 카이델의 얼굴에는 약간의 여유가 돌아와 있었다. 그의 긴장과 당황은 오롯이 엘레노어에게로 옮겨간 듯했다. 엘레노어의 붉어진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카이델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치졸한 사감으로 그대를 번거롭게 한 것은 다시 한번 사과할게. 당황하게 했다면 그것도.”

“……괜찮아요. 정말로요.”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목이 탔다. 다 식은 찻잔으로 손을 뻗은 엘레노어가 그것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예법이니 뭐니, 그런 잡다한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손등으로 달아오른 뺨을 식히며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변명했다.

“여기, 공기가 조금 후덥지근한 것 같아요.”

카이델이 달아오른 엘레노어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피해 주며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 끝의 진동이 엘레노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온몸을 간지럽게 만드는 미묘한 감각이었다.

“이곳에만 여름이 조금 이르게 온 듯해.”

다정한 목소리가 사뿐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엘레노어는 알게 되었다. 모를 수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분명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 인간적인 호감, 그 이상의 무언가가.

***

시간은 흘러, 어느덧 처음으로 황궁에서 춤 수업을 하기로 한 날이 되었다. 엘레노어는 루카스와 시에나, 데미안에게 새로운 친구를 소개했다. 호기심 어린 여섯 개의 눈동자가 뉴페이스에게로 향했다.

“다들 인사해. 춤 수업을 함께 들을 마리안느야.”

“안녕하세요. 저는 마리안느 바셋이에요.”

곱슬거리는 회갈색 머리카락이 사랑스러운 소녀는 바셋 후작가의 막내딸, 마리안느였다. 짝을 지어 진행하는 수업인 만큼 이즈멜이 특별히 부탁한 것이었다.

“내가 마리안느랑 할래!”

마리안느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루카스가 곧바로 손을 들었다. 시에나도 보란 듯이 데미안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데미안이랑 할래. 데미안, 괜찮지?”

“응, 상관없어.”

데미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파트너가 정해졌다.

루카스는 시에나와 달리 차분하고 생글생글 잘 웃는 마리안느가 신기한지 자꾸만 말을 붙이려 들었다. 그 모습이 이즈멜을 닮아 엘레노어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모르는 거 있으면 뭐든지 다 물어봐.”

“정말요? 감사합니다!”

루카스와 마리안느가 이야기를 나누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던 시에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뭘 아는 게 있어야 대답해 줄 텐데…….”

루카스는 듣지 못한 척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바셋 후작저는 어디에 있어? 황궁 근처야?”

“로턴 지구에 있어요. 마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니까, 아주 가까운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해 줘도 못 알아들을걸.”

이번에도 시에나가 쏙 끼어들었다. 루카스가 시에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분홍 머리, 넌 조용히 좀 하지? 너한테 한 말도 아니거든?”

“하여튼 귀만 좋아서는…….”

시에나가 마리안느의 손을 꼭 붙잡고 당부했다.

“마리안느, 쟤는 가능한 한 멀리해야 해. 정상이 아니니까.”

엘레노어가 끼어들어 중재하려던 때였다. 문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툭 끼어들었다.

“사이가 좋아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다투는 거야?”

“쟤가 시비를 걸잖아.”

“쓰읍, 쟤라니.”

이즈멜이었다. 형의 등장에 루카스의 어깨에 대놓고 힘이 실렸다. 루카스가 시에나를 보며 메롱, 혀를 내밀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렇게 깍듯하게 굴 것 없대도.”

엘레노어가 얼른 무릎을 굽혀 인사를 건넸다. 이즈멜을 향해 다가간 엘레노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곤소곤 물었다.

“전하, 그런데 왜 혼자 오셨어요?”

“아, 피아노 연주자는 곧 올 거야. 난 앞 일정이 조금 일찍 끝나서 바로 왔어.”

“또……?”

“또라니? 다른 누가 더 있어야 했나?”

팔짱을 낀 이즈멜이 고개를 느른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엘레노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춤 수업인데 파트너가 있으셔야지요.”

“아, 그렇지.”

“그런데 혼자 오시면 어떡해요?”

엘레노어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즈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 파트너라면, 있잖아.”

이즈멜이 허리를 숙여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엘레노어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며 어깨를 뒤로 물렸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엘레노어의 눈코입을 하나하나 뜯어보던 이즈멜의 입가에 웃음기가 짙어졌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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