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뭐, 뭘 걸어……?’
내내 치고 들어갈 틈을 노리던 아드리안의 한 방에 엘레노어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엘레노어는 반쯤 넋을 놓고 눈앞의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잠시 머뭇대던 엘레노어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의 밝은 초록색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잘게 흔들렸다.
“아드리안…….”
“응, 엘렌.”
엘레노어의 얼굴에 미묘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아드리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좀 알아줬으면 해서 던져 본 말이었다. 박박 그어진 친구라는 선을 넘어가고 싶었다. 아드리안은 조금씩 제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조금은, 정말 아주 조금은 엘레노어가 그의 마음을 모르고, 그는 실컷 그녀를 바라볼 수 있는 이 관계가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엘레노어가 그의 마음을 눈치챈 순간, 지금처럼 편하고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시간은 그대로 사라질 테니까.
“너 정말…….”
뜸을 들이듯 말끝을 늘이던 엘레노어가 테이블 아래 아드리안의 신발 앞코를 툭 발로 찼다.
“계속 그럴래? 내가 널 한두 해 봤어? 안 속아, 바보야.”
“속긴 뭘 속아. 거짓말이 아닌데.”
아드리안이 억울함에 미간을 작게 찡그렸다. 엘레노어는 큼지막한 고기 조각을 포크에 콕 집은 뒤 아드리안에게 내밀었다.
“됐고, 빨리 아 해.”
얼떨결에 입을 벌린 아드리안이 얌전히 그것을 받아먹었다.
“식으면 질겨져. 뭐든지 식후경이라고.”
입안 가득 고기를 머금은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입술 새로 실없는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잔뜩 긴장했던 것이 허탈하기도 했고, 정말이지 어이가 없기도 했다. 저 눈치로 공부며 사업이며 척척 해내는 게 용할 노릇이었다.
아드리안이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엘레노어의 입꼬리가 비슬비슬 솟았다. 그가 웃으니 그저 따라 웃는 것이다.
아드리안의 두 눈에 비친 엘레노어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말갛고 반짝거렸다. 아드리안은 제 웃음 안에 비겁한 안도감도 약간은 뒤섞여 있음을 인정했다.
“왜 갑자기 그렇게 웃어?”
“너도 참 너다, 싶어서.”
나도 나지만.
한발 물러선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는 않는다는 말이 널 보면 참 실감이 돼.”
엘레노어가 눈을 깜빡깜빡하며 아드리안과 눈을 맞췄다. 분명 좋은 뉘앙스는 아닌 것 같은데,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뇌에서 혼란이 왔다.
“……무슨 뜻이야?”
아드리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못 알아들었으면 됐어. 오렌지 먹을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엘레노어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감이 욕 같은데.”
“그건 또 제대로 알아들었네.”
이게 진짜.
다리를 쭉 뻗은 엘레노어가 테이블 밑으로 아드리안의 발을 꾹 밟았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태연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 모습이 얄미워 엘레노어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렸을 때나 하던 유치한 발장난은 테이블 위의 접시들이 거의 다 빌 때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흑역사를 하나하나 꺼내 들며 티격태격했다. 먼저 두 손을 든 쪽은 이번에도 아드리안이었다. 코흘리개 시절의 일들을 떠올리는 건 절대적으로 그에게 불리했기 때문이다.
“내가 졌다. 먼저 나가서 마차 불러올게. 넌 천천히 나와.”
팔을 뻗어 엘레노어의 머리를 흐트러뜨린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레노어는 자리에 앉아 동그랗게 부푼 배를 팡팡 두드리며 챙겨 온 지갑을 꺼내 들었다.
“얼마쯤 나왔으려나…….”
엘레노어가 점원을 불렀다. 그런데 엘레노어가 듣게 된 것은 예상 밖의 말이었다.
“이미 계산하셨습니다.”
“네? 누가요?”
“같이 오신 일행분께서 계산하고 나가셨습니다.”
“아드리안이?”
아니, 걔가 대체 왜?
엘레노어는 허겁지겁 달려 나가 아드리안의 손목을 탁 붙잡았다.
“왜 이렇게 급하게 나왔어?”
돌아선 아드리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레노어가 물었다.
“네가 왜 계산을 해? 내가 사기로 한 날이잖아. 네가 저녁 사 달라며?”
“저녁 사 달라고 한 적 없어. 단둘이 저녁 먹자고 했지.”
아드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엘레노어의 말을 정정했다.
그랬던가.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그거나 그거나……. 잠시 잊은 모양인데,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 돈도 있고.”
날로 먹는 것, 참 좋다. 하지만 엘레노어에게는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라는 것이 존재했다. 아드리안은 친구인 동시에 중요한 사업 고문이자 동료였다. 우정은 우정, 일은 일. 역시 아드리안의 몫을 제대로 챙겨 주는 것이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어. 처음부터 식사 한 번으로 넘길 건 아니었는데. 네가 싫다고 해도 그냥…….”
“엘렌.”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말을 턱 가로막았다. 마음에 또 한 번의 충동이 일었다.
‘지금 말하는 건 너무 이를까.’
다가갔다가 한 발 빼는 장난 같은 건 그만하고, 친구인 듯 아닌 듯 애매하게 선을 넘나드는 것도 그만두고 진지하게 털어놓을까. 둘이 저녁 먹자는 말은 데이트 신청이었다고. 아까 했던 말도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나는 너를…….
“왜?”
그러면 엘레노어, 너는 분명 한 발짝 물러서겠지. 어찌할 줄을 모르는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면서.
아드리안이 주춤했다. 말없이 엘레노어를 내려다보던 아드리안이 두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다. 입술이 돌덩이라도 된 것처럼 무거웠다.
“아까 내가 했던 말…….”
“엘레노어?”
아드리안이 용기 내 입술을 떼려던 때였다. 엘레노어는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의 손목을 꼭 잡고 있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어?”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마주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발렌타인 공작 각하.”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은 아드리안의 얼굴이 대놓고 구겨져 들어갔다. 서늘하게 미소 지은 그가 카이델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블레이크 소후작. 이렇게 보는군.”
“그렇게 말입니다. 이런 곳에서 각하를 뵐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나도 지나는 길에 이리 아는 얼굴들을 보게 될 줄은…….”
카이델의 시선이 아드리안과 번갈아 오갔다.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 카이델의 눈썹이 움찔했다. 둘이 붙어 선 광경이 기분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오늘은 유난히도 불쾌했다.
‘이상할 정도로 비장한 얼굴이, 꼭 고백이라도 하려던 사람 같았지.’
놀랍도록 정확하게 들어맞은 남자의 감이었다. 탐탁지 않은 얼굴로 아드리안을 빤히 보던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엘레노어.”
“네?”
카이델은 어떻게든 둘을 떼어 놓고 싶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할 말이 없었다. 엘레노어와 눈이 마주친 카이델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게…….”
카이델이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자 아드리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솟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이었다. 그것을 본 카이델의 이마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그때였다. 카이델은 예전에 엘레노어가 했던 말을 떠올려냈다.
‘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면담 요청하셔도 괜찮아요. 보호자 역할이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분명 엘레노어의 입으로 말했다. 언제든 괜찮다고. 물론 이렇게 갑작스러운 요청을 예상하고 뱉은 말은 아니었겠지만, 카이델은 조금 뻔뻔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전에 말했던 학부모 면담, 요청하고 싶은데.”
카이델이 용기 내 입을 열었다. 최대한 당당하게 말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민망함에 귓바퀴가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면담이요?”
“지금 말입니까?”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드리안도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카이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주어 덧붙였다.
“그래, 지금. 머리가 복잡해 더는 지체할 수 없군.”
아드리안을 보는 푸른 눈동자에 한기가 스미었다. 두 남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카이델이 모른 척 엘레노어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부드럽게 물었다.
“어려울까, 엘레노어?”
잠시 당황해 눈을 깜빡이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을 것 같아요. 아드리안이랑 식사도 끝났고, 전에 약속드린 것도 있고…….”
“다행이군.”
“리안, 너도 괜찮지? 후작가 마차를 타고 오길 잘했네.”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드리안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상대는 신분이 높은 공작이었고, 약속했던 저녁 식사도 마친 이상 달리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응, 괜찮지. 그럼 너는?”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다는 듯, 카이델이 얼른 끼어들어 대답을 가로챘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때마침 마차가 도착하고 아드리안은 벌레라도 씹은 얼굴이 되어 그에 올라탔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오늘 재밌었어. 조심해서 들어가.”
“너도. 일찍 들어가서 쉬어. 피곤하잖아.”
‘일찍’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은 아드리안이 카이델을 향해 짧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고개를 끄덕여 화답한 카이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떠올랐다. 승자의 미소였다.
마차가 덜그럭대며 떠나가고, 엘레노어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카이델.”
“응, 엘레노어.”
“그러면 면담은 어디서 하죠?”
두 사람이 유동인구가 많은 길거리 한복판에 멀뚱멀뚱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는 보는 눈들이 너무 많은데요.”
거기다 카이델은 얼굴이 그 명패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흐린 눈으로 보나 맑은 눈으로 보나, 10cm 앞에서 보나 10m 밖에서 보나 그가 ‘그’ 발렌타인 공작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사실 누군지 모른대도 쳐다볼 수밖에 없는 얼굴이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힐끔대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엘레노어는 제발 저를 알아본 이는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스윽 카이델의 그늘에 몸을 숨겼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생긴 얼굴 위에 당혹감이 서서히 드리웠다.
“그건…….”
“뭔가 계획이 있으신 거죠? 그렇죠?”
엘레노어가 눈을 부릅뜨며 묻자 카이델의 뺨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미안.”
애초에 계획 같은 건 없었다는 소리였다. 머쓱한지 그가 뒷머리를 괜히 슥슥 매만졌다.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황당하면서도 대체 얼마나 큰 고민이기에 어울리지 않게 실수를 다 하는 건지, 슬며시 걱정이 됐다.
‘이 튀는 남자를 데리고 어디를 가야 하나. 곧 해가 떨어질 텐데 집에 데리고 가는 것도 좀 그렇고.’
잠깐 고민하던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한 장소가 떠올랐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어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공간, 동시에 조용하게 마주 앉아 대화하기 좋은 곳.
이즈멜과 만났던 카페, 아미키디아였다.
“괜찮아요. 이 근처에 조용하게 이야기할 만한 곳을 알거든요.”
씩씩하게 이즈멜의 아지트까지 앞장서 걷는 엘레노어는 알지 못했다.
그 소식을 보고받은 이즈멜의 손안에서 값비싼 만년필의 허리가 뚝 하고 부러지리라는 것도, 짐짓 얌전을 떨던 그녀의 편지 친구는 사실 질투의 화신이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