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아하.
엘레노어는 그제야 카이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쑥스러운지 그의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역시 소문이란 믿을 게 못 되는 것이었다. 누가 이 남자더러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철인이라, 감정이라고는 없는 냉혈한이라 했나. 엘레노어의 안에 남아 있던 그에 대한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언제 한번 다 같이 공작저에 방문하는 것도 좋겠어요. 공작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물론. 언제든.”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이델의 얼굴이 밝았다.
“데미가 좋아하겠네요. 황궁에서 수업하게 되었다고 하니 루크도 무척 설레했었거든요.”
“황궁에서?”
엘레노어에게 볕이 닿지 않도록 제 몸으로 그늘을 드리워 주던 카이델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미간에 설핏 주름이 졌다.
“어, 아직 못 들으셨어요? 지난 시간에 전달했었는데…….”
“난 듣지 못했어.”
“황태자 전하께서 짬을 내서 아이들 춤 수업을 도와주시기로 하셨어요. 도서관 출입도 허락해 주셔서 다 같이 한번 방문하기로 했고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활짝 미소 짓는 엘레노어의 얼굴은 티 하나 없이 화사했다. 그에 반해 그녀의 곁에 선 카이델의 얼굴에는 서늘한 그늘이 드리웠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작게 대꾸했다.
“……답지 않은 일을 하셨군.”
“루크를 정말 아끼시는 것 같아요. 과목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기시더라고요.”
하, 퍽이나.
카이델의 얼굴에 설핏 냉소가 스쳤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그에게서 잠시 비껴간 찰나였다.
엘레노어가 종알종알 앞으로의 수업 계획을 이야기하는 동안 카이델은 옆에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그를 보고 웃으면 어색하게 입매를 끌어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카이델의 귓가를 바람처럼 스쳐 갈 뿐이었다. 이즈멜의 곱상하고 얄미운 얼굴이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분명 수작을 부리려는 의도일 거다.’
카이델은 그 사실을 거의 확신하다시피 했다. 이즈멜이 카이델을 잘 아는 만큼, 카이델도 그를 잘 알았다. 이즈멜은 확실한 이유 없이 제 시간을 쓸 이가 아니었다. 엘레노어와 이즈멜이 어떻게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도 신경이 쓰였다.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을 순진하게 믿는 게 아니었다. 지금껏 블레이크 소후작에게만 정신을 쏟느라 그에 대해서는 방심했던 것이 문제였다. 분명 그 여우 같은 얼굴과 구렁이 같은 혀로 엘레노어를 구워삶으려 들 것이다.
‘보호자 자격으로 황궁에서 수업하는 걸 반대하고 나서 볼까.’
카이델의 안에 유치한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때 하녀가 달려와 엘레노어에게 무언가를 귀띔했다. 하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향해 말했다.
“아이들이 다 도착했대요. 준비시켜서 얼른 데리고 올게요.”
“어……?”
“금방 올게요!”
얼떨떨한 카이델을 공터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엘레노어가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혼자 남겨진 카이델은 그제야 제게 곧 닥쳐올 상황을 실감했다.
“……큰일 났군.”
카이델은 부친이 입버릇처럼 하곤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에 홀려, 소후작을 향한 치졸한 질투에 눈이 멀어 충동적인 선택을 했다. 이제는 그에 책임을 질 시간이었다.
원래도 흰 편이었던 얼굴이 한 층 더 창백해졌다. 데미안을 상대하기도 아직 어려운데, 무시무시한 아이들이 무려 셋이었다. 잘못 붙잡기라도 했다간 그대로 파스스 바스러지는 쿠키 같은 존재들.
신이 공들여 깎은 듯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루크, 목검으로 장난치면 안 돼. 이리 내.”
등 뒤에서 아이들과 엘레노어가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왁자지껄하게 뒤섞여 들려오는 아이들 목소리에 카이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집에 가고 싶었다.
***
‘나무토막 같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카이델을 본 엘레노어의 소감은 그랬다. 뒷모습만 보아도 그의 긴장과 당혹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만은 평소처럼 차분하고 냉철했다.
“다시. 긴장을 끝까지 놓아선 안 돼. 팔에 힘을 주고.”
장대한 골격과 서늘한 분위기,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확실히 아이들을 대하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그뿐인가. 카이델의 목소리는 훈련소 조교처럼 딱딱하고 표정도 무뚝뚝했다. 보통의 아이들은 그의 앞에 서기만 해도 시퍼렇게 질렸으리라.
‘하지만 다행히 셋은 보통 아이들이 아니지. 음, 아니고말고.’
카이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 않지만, 그는 제법 아이들과 합이 맞았다. 처음에는 바짝 긴장해 그의 등 뒤를 서성이던 엘레노어는, 어느 순간 참나무 그늘에 앉아 여유롭게 수업을 참관하기 시작했다.
루카스는 간만에 야외에 나와 마냥 기분 좋아 보였다. 시에나는 늘 그렇듯 의욕적으로 카이델의 지도를 따랐고, 데미안은 안 그런 척하면서도 자꾸만 제 형을 힐끔거리며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좋다. 이렇게 편하게 쉬어 본 게 얼마 만이야.”
하녀가 가져다준 냉침차를 홀짝이며 엘레노어가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카이델 덕분에 맛보는 오랜만의 여유였다. 그늘임에도 공기가 제법 따뜻한 공기를 만끽하던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곧 생일이잖아?”
요즘 원체 정신없이 살다 보니 생일도 잊고 지나칠 뻔했다.
전생에서 강사 고여진의 생일은 특별할 것 없이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에 불과했다. 카드사와 쇼핑몰에서 날아오는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아, 오늘이 생일이었지.’ 할 뿐이었다.
축하받지 못하는 생일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 자신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었으니.
하지만 엘레노어 에버렛은 달랐다. 매해 드와이트와 엘레노어의 생일이 다가오기만 해도 저택 안의 분위기가 시끌벅적해졌다. 에버렛 백작 부부는 물론이고, 백작저의 사용인들까지 쌍둥이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느라 저마다 분주했다. 유난스러운 연례행사 같은 생일파티였다.
“이번엔 또 뭘 준비하시려나.”
그냥 오붓한 식사 한 끼면 충분한데.
‘아드리안은 분명 온다고 할 테고.’
머릿속으로 초대할 친구들을 하나둘 헤아리던 엘레노어는 루카스의 자세를 살펴 주던 카이델과 눈이 딱 마주쳤다.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카이델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수업을 이어 갔다.
‘올해는 카이델도 초대할까?’
저도 모르게 슬며시 고개를 치켜든 생각에 엘레노어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전보다야 훨씬 편해졌다지만, 확실히 그런 사적인 자리에서 어울릴 사이는 아니었다. 어쨌든 학부모가 아닌가. 둘은 일종의 고용 관계였다.
‘일로 엮인 사이에는 적당히 거리를 둬야 뒤탈이 없지.’
둘 사이의 선을 힘주어 그으며,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카이델 성격에 그렇게 사적인 자리에 참석할 것 같지도 않았다.
카이델이 이마 위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허리를 쭉 펴는 것이 보였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반듯하고 정갈하던 얼굴이 그새 조금 해쓱해진 것은 착각일까.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았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진 지금도 가끔은 버겁게 느껴졌다. 잠시만 마음을 놓으면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지고, 한 아이에 집중하면 옆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카이델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엘레노어는 시선을 피하는 대신 그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약간의 안쓰러움과 고마운 마음을 담은 미소였다.
‘힘내요.’
엘레노어가 뻐끔뻐끔 입 모양으로 응원을 건넸다. 카이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거리가 있어서 잘 안 보이나?
고개를 갸웃한 엘레노어가 두 팔을 뻗어 응원하듯 마구 흔들었다. 하고 나니 약간 민망해졌지만, 어차피 본 사람이라고는 그 하나뿐이니 뻔뻔해지기로 했다.
조금 놀란 듯 굳어 있던 카이델의 눈가가 서서히 허물어졌다. 터져버린 웃음을 숨기려는 듯 그가 엘레노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귀여워.’
그 찰나의 순간, 엘레노어는 카이델이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입 모양을 읽어내던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방금 귀엽다고 한 건가?’
엘레노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잘못 본 것이겠지.
잠시 멍한 얼굴로 카이델과 아이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던 엘레노어가 바쁘게 손부채질하며 머릿속을 환기했다. 주변 공기가 이상하게 후덥지근했다. 엘레노어가 아이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백작저의 정원으로 시선을 던졌다. 샛노란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완연한 봄이었다.
***
“비싼 거 먹어도 되는데.”
“난 여기가 제일 맛있더라고. 여기저기 다녀 봐도 이만한 곳이 없더라.”
아드리안과 약속한 날이 되었다. 비싼 밥이라도 얼마든지 사 주려고 했는데, 아드리안이 고른 곳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함께 드나들던 식당이었다.
“하긴, 넌 어렸을 때부터 여기 스튜라면 사족을 못 썼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엘렌.”
“그건 그래. 네 덕에 오랜만에 먹어 보겠다.”
엘레노어가 활짝 웃으며 바구니에 담긴 식전 빵을 조금 뜯어 입에 넣었다.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풍미가 입안을 기분 좋게 채우자 기분이 들떴다.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꼭 왔던 것 같은데 기억나? 너랑 나랑 드와이트랑…….”
“그럼, 기억하지. 여기 있는 메뉴 다 먹어 보자고 그랬었잖아.”
“드와이트도 같이 왔으면 좋아했을 텐데.”
“다음에 같이 오면 되지.”
엘레노어의 앞에 냅킨을 밀어 주며 아드리안이 씩 웃었다. 한번 트인 추억의 물꼬는 막히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옛날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드는 사이 테이블은 먹음직스러운 음식들로 가득 찼다.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접시를 가지고 가 고기를 썰어 주었다. 가만히 턱을 괴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엘레노어가 픽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는 내가 너한테 고기 다 썰어 주고 그랬는데. 넌 먼저 다 썰어 두는 거 싫다고 짜증 냈지만.”
“그랬지. 매번 혼자 다 큰 어른인 척 순진한 나한테 사기나 치고.”
“사기라니! 그리고 넌 별로 순진하지도 않았거든?”
나는 진짜 다 큰 어른이었다고!
엘레노어가 발끈하자 아드리안이 짓궂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뿐이야? 그대로 커서 장가오라고 수작 걸어 홀랑 넘어오게 해 놓곤 책임져 주지도 않고. 상습범이지, 아주.”
엘레노어가 세상에서 제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내가 언제 또 수작을 걸었어?”
“허, 이렇게 입 싹 씻겠다고?”
아드리안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좁힐 수 없는 견해 차이를 느끼며 눈싸움하듯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먼저 숙이고 들어간 쪽은 아드리안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엘레노어 쪽으로 그릇을 밀어 놓아 주며 입술을 뗐다.
“그러면 엘렌.”
샐러드에서 방울토마토를 콕 집던 엘레노어가 왜 그러냐는 듯 눈을 홉떴다. 혼자 방울토마토를 다 골라 먹은 걸 들킨 걸까. 엘레노어의 포크가 멈칫했다.
아드리안이 느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맞췄다.
“이번에는 네가 넘어와. 수작은 내가 걸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