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발렌타인 공작가. 공작의 집무실 문 앞에 선 집사 조나단이 정중하게 노크했다.
“들어와.”
늘 그렇듯 얼마 지나지 않아 낮고 딱딱한 카이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나단은 손에 무언가를 은밀히 들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일전에 제게 조용히 명령하셨던 ‘그것’이 도착해 바로 가지고 왔습니다.”
“수고했다. 이리 줘.”
카이델이 곧바로 조나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을 건네려던 조나단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각하, 외람된 이야기지만 그건 왜…….”
하지만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카이델이 싸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끄러우니 입 다물라는 뜻이었다. 제 고용주에 뜻에 곧장 순응한 조나단이 책상 위에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제가 모르는 다른 일정이 있으십니까?”
조나단의 시선이 카이델을 위아래로 가볍게 훑었다. 의아함이 묻은 시선이었다. 크라바트를 반듯하게 손보던 카이델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데미안을 데려다주어야지.”
“예. 그리고요?”
카이델이 조나단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왜 자꾸 쓸데없는 걸 묻느냐는 눈빛이었다. 조나단이 시무룩해지자 작게 한숨을 내뱉은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곧장 돌아와서 일해야지. 할 일이 산더미인데 왜 자꾸 쓸데없는 것을 묻지?”
하지만 조나단의 질문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카이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성장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머리까지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
요즘 조나단은 제 고용주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격하고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카이델은 제법 모시기 쉬운 주인이었다. 일만 제대로 한다면 아랫사람을 모질게 대하는 일도 없었을뿐더러, 늘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생활 태도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봉급도 다른 가문에 비해 후해서, 조나단은 이곳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고용주를 극진히 모셨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작이 고장 났다.
식사 자리에서 데미안의 얼굴을 마주 보기도 어려워하던 카이델이었다. 물론 데미안이 그를 피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왕복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를 굳이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고 할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황궁 연회라도 참석하는 것처럼 완벽한 차림새라니. 고장 났다는 말 말고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미쳤다는 표현도 있겠지만, 그것은 카이델처럼 후한 고용주에게 쓰기에는 지나치게 불손한 표현이니 없는 셈 치겠다.
“거기 멀뚱히 서서 쓸데없는 질문이나 던질 만큼 집사 일이 한가로운가?”
“한가하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조나단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카이델이 모시기 편한 주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완벽주의 성향에 맞춰 처신하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이었다.
카이델이 물러가라 손짓하며 말했다.
“나가 봐. 늦지 않게 데미안을 준비시키고.”
“예, 각하.”
탁, 문이 닫혔다.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한 번 더 점검한 카이델이 반듯하게 앉아 ‘그것’을 집어 들었다. 카이델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것’은 엘레노어의 학습지였다.
엘레노어가 낸 신문 광고를 본 카이델은 곧바로 신청서를 보냈다. 나름 집사의 명의를 빌리는 치밀함도 갖췄다. 데미안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사는 불필요한 행위였지만, 카이델은 떳떳했다. 데미안의 교재는 그의 교육을 위한 것이고, 이건 오롯이 제 만족을 위한 것이니 완벽히 다른 물건이나 다름없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카이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문제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을 엘레노어를 생각하니 책 한 권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사업이라. 도대체 얼마나 더 놀라게 하려고.’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되지만 대단한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카이델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금고를 하나 살까.’
손상 없이 모아둘 수 있도록……. 엘레노어의 인터뷰가 실린 신문도 함께 넣으면 되겠다.
***
데미안은 멍하니 생각에 잠긴 제 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는지, 마차가 달리는 내내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그는 한 번도 눈치채지 못했다.
반짝거리는 차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평소보다 조금 더 짙은 향기. 생각에 잠겨 있다가도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는 게,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빤했다.
‘형이 선생님을 정말 많이 좋아하나 봐.’
데미안은 카이델이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것에 내심 놀랐다. 사랑에 빠진 그의 모습은 평소와는 전혀 달라서, 가끔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런 형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도착했군. 내려줄 테니 이리 와.”
마차가 멈추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킨 카이델이 데미안을 번쩍 안아 들었다. 처음에는 어색해 뻣뻣하게 몸을 굳혔지만, 이제는 꽤 익숙하게 느껴졌다.
현관 앞 계단에 걸터앉아 있던 엘레노어가 일어나 두 사람을 반겼다.
“안녕, 데미. 안녕하세요, 공작님.”
엘레노어가 건넨 인사에 카이델의 눈썹이 움찔했다.
“공작님?”
“……카이델.”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고쳐 불렀다. 그 순간 카이델의 얼굴이 사르륵 녹으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엘레노어.”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자리를 뜨던 데미안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데미안은 엘레노어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초승달처럼 길게 휘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흠.”
데미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쩐지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총총,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데미안의 걸음이 새처럼 가벼웠다.
한편, 엘레노어는 카이델의 차림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오늘 어디 가시나 봐요?”
“어? 아…….”
엘레노어의 질문에 카이델이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했다. 집사 조나단이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보였던 냉랭한 시선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이 짧은 시간을 위해 아침부터 분주히 준비한 것이라고는 차마 실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정말 근사하시네요.”
엘레노어의 감탄 섞인 칭찬에 카이델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고마워. 그대도 오늘 무척이나 근사해.”
곧바로 튀어나온 카이델의 대답에 엘레노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대충 올려 묶은 머리에 안경까지 쓰고 있는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엘레노어는 그가 갑작스러운 칭찬에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내뱉은 모양이라 생각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진심이야, 엘레노어.”
카이델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카이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고, 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그대는 늘, 흠잡을 곳 없이 근사해.”
***
수업은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이 흘러갔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조금 빨리 마쳐졌기에 엘레노어는 아이들에게 자습 시간을 주었다.
데미안은 사각사각 숙제로 내어 준 문제를 풀어 나갔고, 시에나는 의욕적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으며, 루카스도 질문을…….
“선생님.”
“응?”
던지기는 했는데, 그중 수업과 관계있는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꽃받침처럼 턱을 괸 루카스는 조금 이상한 곳에 꽂힌 듯했다.
“선생님은 무슨 맛 아이스크림이 제일 좋아요?”
“나? 바닐라.”
“우리 형님도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제일 좋아해요.”
“으응, 그렇구나…….”
그래, 아이들은 이해 못 할 행동을 곧잘 하곤 하니 어른인 내가 이해해야지.
“선생님은 무슨 색깔이 제일 좋아요?”
“나? 초록색이랑 흰색.”
“초록색이랑 흰색……. 형님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으니까 물어보고 말해 줄게요.”
아니, 그러지 않아도 돼. 전하께서 좋아하는 색깔까지 내가 알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엘레노어의 대답이 루카스에게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엘레노어는 저 자그마한 머릿속에 무슨 이상한 계획이 펼쳐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둘만 있을 때 물어봤어야지, 이 바보야!’
잠시 한심하다는 눈으로 루카스를 바라보던 시에나가 번쩍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럼 저도 질문해도 돼요?”
“응, 그럼. 뭐든 물어봐.”
너라면 정상적인 질문을 해 주겠지. 믿는다, 에나.
“선생님은 이상형이 뭐예요?”
내가 정말 너만은 믿었는데.
엘레노어의 기대가 순식간에 와장창 깨어졌다. 하지만 원래 공부하기 싫을 때는 선생님의 첫사랑, 이상형, 전 남자친구 이야기가 그렇게 듣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이상형이라…….’
영 앤 리치. 톨 앤 핸섬. 그리고…….
흐음. 아이들의 나이에 맞추어 순화된 표현을 찾던 엘레노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야 잘생기고 돈도 많고 다정한 사람이 좋지.”
엘레노어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에나가 냉큼 대답했다.
“잘됐네요. 우리 삼촌도 그런데.”
“하, 우리 형님도 그렇거든?”
“우리 형도…….”
루카스는 물론 얌전하게 있던 데미안까지 곧바로 반박하듯 끼어들었다. 티격태격하는 세 아이를 보던 엘레노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뭐. 너희 형, 삼촌들이 다 보통 사람들은 아니지.’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문득 전달해야 할 공지 사항이 스쳐 지났다. 엘레노어가 박수 소리로 아이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자, 그건 그렇고 너희가 알아야 할 게 있어.”
우리 삼촌이 나아. 너희 삼촌보다는 우리 형님이 낫지. 우리 형도 만만치는 않아…….
유치하게 말싸움이 붙었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엘레노어에게 향했다. 싱긋 웃은 엘레노어가 말을 이었다.
“다들 앉아서 공부만 하려니까 지루하고 힘들지?”
“네!”
루카스가 잠시의 고민도 없이 힘차게 대답했다. 엘레노어가 작게 웃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2주에 한 번 정도는 야외에서 체술 수업을 들으면 어떨까? 실기 시험 준비도 되고, 콧바람도 쐬고.”
뜻밖의 제안이었는지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쨌든 그것도 ‘수업’이라니 뭔가 찝찝하기는 한데 밖에서 뛰어노는 건 좋고……. 미묘한 표정들이었다.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체술도 선생님이 가르치세요?”
“아니. 선생님은 체력이 없어서 안 돼.”
지금 너희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들단다. 믿어지니?
“그럼 우리는 누구랑 수업해요?”
“으음, 발렌타인 공작님이 맡아 주실 거야.”
“공작님이요? 데미네 형?”
미리 듣지 못했던 것인지 데미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카스와 시에나가 홱, 데미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데미안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똑똑해. 얄미워. 부러워.’
시에나와 루카스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머리가 재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 삼촌도 질 수 없지!’
‘우리 형님도 뭔가 가르칠 만한 것 하나쯤은 있겠지!’
두 아이의 속내를 모르는 엘레노어가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음 시간에는 밖에서 입을 활동적인 옷 들고 오기. 준비물이야. 다들 알았지?”
“네!”
늘 그렇듯, 대답은 참 잘하는 아이들이었다.
‘쓰읍, 왠지 불안한데…….’
싸한 예감에 엘레노어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