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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25화 (25/168)

25화

“오늘도 네 이야기가 신문 한 면을 다 차지했네.”

“여기는 아예 1면에 내보냈어. 신문에 실을 기사가 그렇게 없나?”

“요즘 수도에 별다른 사건이 없기는 하지.”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이 테이블 위에 쌓인 신문을 뒤적이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 시점에서 사업의 성패를 판단하기에는 다소 이른 감이 있었지만, 화제성만큼은 잡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 중 괜찮은 곳을 추리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엘레노어의 예상과 달리 인터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스캔들과 관련된 질문은 하지 않기로 미리 합의되어 있었기에 곤란한 상황도 없었다. 엘레노어는 아주 깔끔했노라고 자평했다.

그랬는데…….

“그런데 왜 인터뷰도 하지 않은 곳들이 더 난리냐고! 심지어 사업 얘기는 얼마 없고 죄다 사생활 이야기만 떠들어대고 있잖아.”

「끝나지 않은 삼각 러브라인? 엘레노어 에버렛, 그녀를 파헤친다!」

「에버렛 영애의 사업 비하인드 스토리」

신문 광고와 인터뷰 기사가 나가자마자 온갖 타블로이드지는 다시 한번 엘레노어와 카이델, 아드리안의 스캔들로 불타올랐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뜨거운 반응이었다.

“이번에는 입장 낼 거지? 다 오해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이야.”

엘레노어가 소파에 앉아 태연하게 신문을 넘겨보는 아드리안을 보며 채근했다. 그가 작게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굳이 그럴 것까지야 있나?”

“굳이라니?”

“광고 효과만큼은 확실한 것 같아서. 그 이후로 신청 부수도 엄청나게 늘었잖아.”

“그건…… 그렇지.”

“투자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엘레노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의견을 물었다.

“아, 그건 어떻게 생각해? 어제 밤새 꼼꼼하게 읽어 봤는데 내가 보기엔 나쁘지 않은 것 같더라고.”

“밤새? 내가 일찍 자라고 했지.”

아드리안이 못마땅한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할 일이 많은 걸 어떡해.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내가 보기에도 굉장히 좋은 조건이야. 무리한 요구도 없고, 억지스러운 부분도 없고.”

“그래? 저녁 한번 먹자는데 응해야겠네.”

엘레노어가 쭉 기지개를 켰다. 그런 엘레노어를 힐끔 쳐다본 아드리안이 말했다.

“응, 그런데 나는 다음 주에는 시간 내기가 좀 힘들 것 같은데.”

“알아. 영지 내려간다며.”

“혼자 괜찮겠어?”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자신 있게 말은 했지만, 사실은 약간 두려웠다. 젊은 귀족 영애가 사업 전면에 나서는 것은 이 세계에서 파격적인 행보였기에 편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들 쉬쉬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말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엘레노어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럴수록 엘레노어는 보란 듯이 증명해 보이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

엘레노어는 출전하는 장군처럼 결연한 다짐을 하고 약속 자리에 나갔다. 하지만 엘레노어가 걱정한 것과는 달리 그들은 무척 정중했다. 지레 겁먹은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훌륭한 식사였어요. 감사합니다.”

엘레노어가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건넸다.

“저희야말로 감사드려야지요. 흔쾌히 만남에 응해 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물론이지요. 제안에도 감사드려요. 충분히 생각해 보고 회신 드릴게요.”

엘레노어가 슬쩍 웃어 보인 뒤 마차에 올라탔다.

내내 우아하고 당당한 태도로 필딩 형제를 상대하던 엘레노어는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의자에 반쯤 드러누웠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이 노곤해졌다.

기진맥진해 백작저로 돌아온 엘레노어는 곧장 드와이트의 방으로 향했다.

“나 들어간다?”

막 퇴근했는지 드와이트는 옷도 완전히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나 옷 갈아입는 중인데.”

“응, 안 봐. 갈아입어.”

드와이트가 셔츠 단추를 풀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엘레노어는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오늘 필딩 형제랑 만났다며? 어땠어?”

드와이트가 물었다.

“나쁘지 않았어. 아니, 생각보다 좋았어. 괜찮은 사람들이더라. 정중하고.”

엘레노어의 말에 드와이트가 피식 웃었다.

“그야 당연하지.”

엘레노어가 번쩍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슨 소리야?”

“신문마다 발렌타인 공작이 너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떠들어대는 중인걸.”

“여전히 이해가 안 가. 그게 이 일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엘레노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옷을 다 갈아입은 드와이트가 엘레노어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설명했다.

“그야 필딩가에서는 발렌타인 영지에 자기 물건을 납품하려고 애쓰고 있잖아. 그런 상황에 네게 잘 보이려 드는 건 당연한 거지.”

“뭐?”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드와이트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난 너도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몰랐어?”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업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려는 게 아니라 카이델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걸까.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풍선처럼 부풀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펑, 터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드와이트가 재빨리 덧붙였다.

“엘렌,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이건 뇌물이라고 볼 수도 없고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제안이야. 너에게 뭔가를 요구하지도 않잖아.”

드와이트가 엘레노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기껏해야 공작에게 환심이나 좀 사 볼까 하는 생각이겠지. 사업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투자하는 것일 테고.”

하지만 드와이트의 너스레에도 엘레노어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엘렌. 나쁘게만 볼 거 없어. 투자가 성사되면 너도 블레이크가에도 훨씬 이득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엘레노어의 머릿속이 한없이 복잡해졌다.

***

며칠이 흘렀다. 엘레노어는 늘 그렇듯 현관에서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데미안을 보던 엘레노어가 카이델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데미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네요.”

“그래 보이는군.”

카이델은 뒷짐을 진 채 현관 안을 흘끗 쳐다보았다.

“잠시 걷지 않겠어?”

카이델이 엘레노어에게 불쑥 제안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좋아요.”

엘레노어가 선뜻 응하며 그를 따라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두 사람은 현관 근처에 있는 분수 주변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분수대 중앙에는 활시위를 당기는 큐피드 동상이 반쯤은 이끼에 덮인 채 놓여 있었다.

말없이 한 바퀴 반쯤 돌았을 때였다. 잠시 머뭇대던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니콜라스 필딩과 만났다고 들었다. 투자를 제안했다던데?”

“네, 그랬어요. 거절했고요.”

“그것까지도 들었어. 실례가 아니라면 이유를 물어도 될까?”

엘레노어가 투자 제안을 거절한 가장 큰 이유는 카이델이 곤란해지는 상황이 생길까 봐 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엘레노어는 잡아떼는 쪽을 선택했다.

“별 이유 없었어요. 그냥 더 나은 제안을 기다릴 뿐이에요.”

“조건이 좋지 않던가?”

“그런 건 아니지만…….”

엘레노어가 말끝을 흐렸다. 카이델이 한 걸음을 크게 내디뎌 엘레노어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르게 묻지. 그대가 투자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나와는 전혀 무관한가?”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어 카이델과 눈을 맞췄다. 카이델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예전처럼 그가 무섭지는 않았지만, 그렇대도 그의 앞에 서 있으면 어딘지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살짝 눈치를 살피던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렸다.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지도요…….”

카이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엘레노어가 작게 어깨를 으쓱하며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혹시 모르니까요. 다들 당신과 내 사이를 오해하고 있으니, 당신의 환심을 사려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죠. 그걸 이용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용해도 돼.”

“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엘레노어가 눈을 홉떴다. 카이델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이 그대에게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이용해도 괜찮아. 내 선에서 알아서 끊어낼 수 있으니 그건 그대가 염려할 일이 아니야.”

“감사해요. 무척이나 관대한 제안이시네요.”

엘레노어가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반 바퀴쯤 돌았을 때, 마음을 정한 엘레노어가 입술을 뗐다.

“그래도 필딩 씨의 제안은 거절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째서?”

카이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엘레노어가 한 발짝 뒤에서 그녀를 따라 걷던 카이델을 돌아보며 당차게 대답했다.

“순전히 제 능력으로 평가받고 싶어서요. 그래야 의미가 있잖아요.”

엘레노어가 생긋 웃었다. 발그레한 뺨과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동자가 싱그러웠다. 카이델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놀라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엘레노어가 치맛자락을 살짝 쥐며 야무지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오만한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카이델이 한 걸음을 크게 내디뎌 엘레노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재빠른 동의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분수에서 물방울이 이리저리 튀는 소리에 맑은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그 순간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이 새하얀 목덜미를 타고 금빛 폭포처럼 쏟아졌다. 신선한 라벤더 향기가 카이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카이델은 넋을 놓은 채 그런 엘레노어를 눈에 담았다. 한낮의 태양이 엘레노어 위에만 빛을 쏟아부은 것인지, 그녀 주변만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카이델은 어쩐지 목이 타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엘레노어가 카이델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들어갈까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래.”

어지럽다.

카이델이 약간의 아득함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분수대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기 때문인지, 제 곁의 여인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앗, 차가워.”

그때 분수대에서 물이 튀었는지 엘레노어가 코를 살짝 찡그렸다. 엘레노어는 뺨 위에 맺힌 물방울을 검지로 훔쳐내며 활짝 웃었다.

쿵.

내내 불규칙하게 뛰어대던 카이델의 심장이 세게 내려앉았다. 그 순간 그는 제 어지럼증의 이유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다.

멍청한 분수대 때문이 아니다. 엘레노어 에버렛, 그녀 때문이다.

이끼 낀 큐피드의 화살이 내리꽂힌 곳은 카이델의 심장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나중에 봬요.”

짧은 인사를 한 엘레노어가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카이델은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놓았다.

멀어지는 엘레노어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카이델은 제 오른쪽 소매가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시선을 내린 그가 제 젖은 소매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언제 이렇게 흠뻑 젖은 걸까. 젖어 드는 줄도 몰랐는데.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감각이 유난히 생경하게 느껴졌다. 엘레노어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마차가 눈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영원히 이 분수대 앞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엘레노어. 엘레노어 에버렛.”

카이델이 나직이 엘레노어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은 꼭 부르고 싶었는데, 부르지 못했다. 카이델은 아쉬움에 두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다.

문득, 카이델은 내내 그의 평정심을 위협하던 감정의 이름을 깨달았다. 너무나도 명확했다.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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