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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24화 (24/168)

24화

“형님!”

루카스가 이즈멜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달려 들어갔다.

“루크, 내가 뭐라고 했지?”

“집무실에 들어올 땐 노크를 하라고…….”

“잘 알고 있구나. 나갔다 다시 들어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즈멜이 루카스의 행동을 지적했다. 루카스가 입술을 삐죽이다가 터덜터덜 방을 빠져 나갔다.

똑똑똑.

허리 높이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이즈멜의 입매가 긴 호선을 그렸다. 그가 짐짓 모른 체하며 물었다.

“누구지?”

“루크…….”

문밖에서 시무룩한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내내 서류를 향해 있던 이즈멜의 시선이 동생의 앳된 얼굴로 옮겨갔다.

“오늘 수업 잘 갔다 왔어? 공부는 열심히 했고?”

“응. 하지만 그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야.”

공부하러 다녀온 녀석이 그게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하다는 거야…….

이즈멜이 황당하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큰일 났어, 형님. 완전 큰일이야.”

“무슨 큰일.”

“선생님이랑 데미안네 형이 심상치 않아.”

“카이델이?”

그래, 때에 따라서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수도 있겠군.

루카스의 말을 어느 정도 인정한 이즈멜이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엘레노어의 이야기는 늘 그를 흥미롭게 했다. 최근에는 엘레노어 개인에 대해 알아가는 일에 치중했던 탓에 삼각관계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못했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어쩐지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이즈멜이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데미안이 공작님이랑 선생님이랑 같이 잤대.”

루카스가 해맑게 입을 열었다. 앞뒤 설명은 가뿐히 건너뛴 채였다.

데미안이 사뿐히 내려놓은 폭탄은, 루카스의 입을 통해 이즈멜에게 직구로 던져졌다.

푸흡.

이즈멜이 머금고 있던 차를 그대로 뱉었다. 그가 잔기침을 토해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뭐……?”

“데미안이 그러던데. 형님이 안 먹을 거면 이거 내가 가져간다?”

제가 방금 얼마나 엄청난 오해를 빚어냈는지 조금도 알지 못하는 루카스는 다과를 향해 손을 뻗으며 헤헤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즈멜은 멍한 눈으로 루카스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난 말해 줬으니 나머지는 형님이 알아서 해.”

양손 가득 달콤한 과자를 야무지게 챙겨 든 루카스가 룰루랄라 자리를 떴다. 시에나가 말하기를 바보 멍청이가 아니라면 뭔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형님은 똑똑하니 알아서 잘하겠지!’

한편 똑똑한 이즈멜의 머릿속은 온통 암흑이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 도리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공작님, 선생님, 잤다.

강렬한 세 단어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루카스의 평소 언어 습관을 보아 분명 맥락을 싹둑싹둑 자른 후 제 마음에 드는 말만 뱉은 것일 거다.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 저도 모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난 불경한 상상.

이즈멜은 그 불쾌한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애쓰며 손수건을 꺼내 주변을 정리했다. 기분이 바닥을 친 이즈멜의 주변 공기가 서늘해졌다. 늘 매끄러운 미소가 지워지지 않던 그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했다.

관심 있게 지켜보던 일이다. 내내 목석같이 굴던 육촌이 저답지 않은 일을 하기에, 은근히 곁에서 놀려대기도 했다.

엘레노어 에버렛.

엘레노어의 소식은 늘 이즈멜을 즐겁게 했다. 함께 있으면 유쾌했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유쾌했다.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은근히 관심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 그래서 호의를 갖게끔 하는 사람. 당연하게도 호감이 가는 사람.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속이 답답해진 이즈멜이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도무지 제 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의 실수도 없이 정도만을 걸어야 하는 황태자로서의 삶. 이즈멜은 사람 좋은 미소와 농담을 갑옷처럼 둘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조금은 한심해 보이는 그 모습이 저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호해준다는 것을 이즈멜은 일찍이 깨달았다.

흥미로운 일. 재미있는 뉴스. 새로운 것.

저런 것들에 몰두하는 순간은 이즈멜에게 일종의 숨 돌릴 틈 같은 것이었다. 좀 별나기는 하지만, 그를 둘러싼 의무감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낄 방법이기도 했다.

엘레노어에 대한 관심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기사를 보았고, 소문을 들었다. 그로 만족할 수 없어 직접 만났다. 그런데도 그녀를 향한 호기심은 그치지 않았다.

일하다가도 문득, 길을 걷다가도 문득, 잠을 청하다가도 문득 생각이 났다. 다음에 보면 또 어떤 농담으로 엘레노어의 뺨을 붉힐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피식피식 웃게 되기도 했다.

이즈멜은 엘레노어를 향한 제 관심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즈멜은 그녀라는 사람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기를 원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 좋은 친구로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진심으로 웃게 되었고, 그녀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 마구 던진 실없는 농담들은 끝 맛조차 달았다.

일상을 무사히 견뎌내기 위한 잠깐의 휴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이즈멜은 그녀 생각에 서류를 손에 잡지도 못하고 있었다. 완벽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데.”

이즈멜이 초조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냥 평소처럼 피식 웃고 지나가야 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잠시 즐거워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조금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아니, 속이 들끓었다.

이즈멜은 인정해야 했다. 더 부정해 봐야, 외면해 봐야 제 꼴만 더 우스워질 뿐이었다. 이즈멜은 ‘인간 대 인간으로’, ‘좋은 친구로서’ 엘레노어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속절없이 이끌리고 있었다.

더없이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

지나치게 실험적인 시도는 아닐까? 망하면 어떡하지?

엘레노어의 걱정과는 달리, 신문 기사가 나자마자 다음 날부터 체험 신청이 앞다퉈 쏟아져 들어왔다. 무료 체험분을 신청한 사람 중 결제로 이어지는 비율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절반의 성공이었다.

“리안, 이제 재고가 몇 부 남았지?”

“비상용 서른 부가 전부야.”

“일단은 그것까지도 내보내야 하겠네.”

아드리안과 응접실에 마주 앉은 엘레노어가 뻐근한 어깨를 꾹꾹 주무르며 말했다. 갑자기 몰아닥친 일거리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지만, 기분만은 여느 때보다 훨씬 상쾌했다.

“아버지는 아예 한 번 더 찍어내자고 하시던데.”

“그래야 하나? 아,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잘하고 있어. 다음 주부터는 인터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

“인터뷰? 윽…….”

만든 것을 조금 더 찍어낼 뿐이니 신경 쓸 것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엘레노어는 제가 사업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만만하게 봤음을 인정했다. 몸만 움직이지 않을 뿐, 엘레노어가 결정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엘렌, 안색이 별로야. 마실 거라도 좀 가져다줄까?”

“응, 그냥 물로 부탁해.”

엘레노어가 지친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익숙하게 부엌으로 향한 아드리안이 하녀에게서 물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받아 돌아왔다.

“엘…….”

습관처럼 엘레노어를 부르려던 아드리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엘레노어는 그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아드리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엘레노어를 엎드리게 한 뒤 제 겉옷을 살며시 덮어 주었다.

“잘 자.”

아드리안이 소리 없이 속삭였다. 그는 엘레노어의 앞에 앉아 턱을 괴고 잠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와 똑같은 얼굴인데, 그 얼굴을 바라보는 마음은 조금도 같지 않았다.

“와, 너 정말 천사같이 생겼다. 꼭 잡지 모델 같아.”

“그게 몬데……?”

“몰라도 돼. 너 꼭 그대로 잘 커야 해, 알았지? 잘 커서 누나한테 장가오는 거다?”

문득 엘레노어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린 아드리안이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별난 구석이 많은 소녀였다. 도저히 또래 같지 않은 모습에 때로는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겨우 한 달 먼저 태어난 주제에 어찌나 누나 타령을 해대는지, 일곱 살 때까지는 홀라당 속아 넘어가 엘레노어를 누나라고 부르기도 했다.

꼭 그대로 커서 누나한테 장가 와. 우유도 많이 마시고, 잠도 일찍 일찍 자고. 그래야 쑥쑥 크지.

만날 때마다 농담처럼 던지던 말이었다. 그 말을 또 듣는 게 무서워 열심히 그녀에게서 도망 다녔던 때가 기억이 났다.

“그때 도장이라도 찍어둘 걸 그랬어. 이 사기꾼 아가씨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제일 원망스러운 건 저 자신이었다. 우정과 사랑 그 사이 어디쯤에서 그는 늘 비겁했으니.

엘레노어를 향한 마음을 접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마음이 정리되지 않을까 해서 충동적으로 마차에 올라타기도 했다. 마음을 비웠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와서 엘레노어를 본 순간 아드리안은 그것이 제 완벽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너무 늦지는 않았기를 바라.”

아드리안은 문득 며칠 전 시에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삼촌, 데미안이랑 공작님이 선생님 집에서 자고 갔대.”

별것 아닌 일이다. 엘레노어 성격에 놀란 아이를 그대로 돌려보내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담담한 말투로 시에나를 달랬지만, 아드리안의 속은 시시각각 검게 타들어만 갔다. 요즘 부쩍 공작과 엘레노어의 사이가 가까운 것 같아 심기가 거슬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난 외모. 사교성 없고 무뚝뚝한 성격. 전쟁이 난다면 무조건 선봉에 서야만 하는 가문의 숙명.

애써 그의 흠을 잡아 불안감을 잠재워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에 그쳤다.

잘난 외모는 무시무시하게 잘났든,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났든 그냥 잘난 것이었다. 엘레노어 입으로 남자는 얼굴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사교성 없고 무뚝뚝한 성격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한눈팔지 않고 제 사람에게만 충실한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무뚝뚝하다고는 하지만, 요즘 보면 그는 전에 없이 얼빠진 놈처럼 흐물흐물한 얼굴로 엘레노어를 대하고 있었다.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아마 잠시도 쉬지 않고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으리라.

마지막으로 꼽은 단점은 사실 억지에 가까웠다. 첫째, 전쟁이 나지 않으면 애초에 의미가 없는 이야기이고 둘째, 그만큼 강인하고 능력 있는 남자라는 뜻이니까.

아드리안이 빠득 이를 갈았다.

‘쓸데없이 보는 눈은 있어서.’

잠든 엘레노어의 뺨이 책상에 눌리며 입이 살짝 벌어졌다. 곤히 잠든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는데, 엘레노어의 얼굴은 그저 평화로웠다.

아드리안이 느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엘렌, 나는 네가 눈치가 없어서 좋고, 눈치가 없어서 싫어.”

가끔은 네가 밉고, 그러다가도 보면 그저 좋아. 네가 날 보며 웃으면 또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웃게 돼. 바보가 따로 없지.

“이렇게 네가 잠든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나 하나였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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