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엘레노어가 헐레벌떡 연못가로 달려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데미안이 허우적거리며 물을 향해 손을 뻗는 광경을 보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연못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아이가 잘못 빠지면 위험할 수 있었다.
놀란 시에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저희끼리 장난치다가……. 어떡해요. 어쩜 좋아.”
“둘이 같이 저택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불러와. 욕조에 따뜻한 물을 준비하라고 하고. 할 수 있지?”
재빨리 신을 벗어 던진 엘레노어가 연못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성큼성큼 팔다리를 뻗어 다가간 엘레노어가 다급하게 데미안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엘레노어는 놀란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는 데미안의 귓가에 또박또박 소리쳤다.
“데미안, 괜찮아. 이제 괜찮아. 안전해. 다치게 하지 않을게.”
“푸하-.”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데미안이 가는 팔로 엘레노어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선생님…….”
“많이 놀랐지. 이제 괜찮아, 데미. 따뜻한 물로 씻고, 따뜻하고 달콤한 차도 마시자. 곧 공작님께서 데리러 오실 거야.”
데미안을 연못가에 내려 둔 엘레노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친 곳은 없어?”
데미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리 와. 젖어서 추울 거야. 선생님한테 업혀서 들어가자.”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향해 등을 내밀었다.
“데미안!”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에 엘레노어와 데미안이 홱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카이델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델이 엘레노어에게서 데미안을 받아 들었다.
“욕실을 좀 빌려야겠어.”
“금방 준비할게요. 제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긴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지.”
두 사람은 반쯤 뛰다시피 저택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다행히 따뜻한 물이 준비되어 있어서 곧바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아이를 다루는 데 익숙한 하녀 둘이 데미안의 목욕 시중을 거들었다.
데미안이 욕조 안에 몸을 담근 다음에야 카이델은 숨을 쉴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데미안이 물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카이델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정말 큰일 날 뻔했군.’
그때 카이델의 등 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공작님.”
엘레노어였다.
“아까 좀 젖으신 것 같아서 수건 가져왔어요.”
“고맙군.”
수건을 받으려고 뒤돌아선 카이델의 말이 뚝 끊겼다. 엘레노어는 여전히 찬물을 뒤집어쓴 몰골이었다. 긴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창백한 뺨에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무심코 시선을 내린 카이델의 몸이 흠칫 굳었다. 얇은 드레스는 완전히 젖어 몸에 밀착되어 있었다. 카이델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수건은 내가 아니라 그대에게 필요한 것 같은데.”
수건을 받아 든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얼굴을 조심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깨어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 곳곳을 섬세하게 훑었다.
“제가 해도 되는데요…….”
“그래.”
카이델은 길게 고집부리지 않고 순순히 수건을 넘겼다. 더는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애써 엘레노어에게서 시선을 돌려 허공을 응시한 카이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는 편이 좋겠어.”
헉.
엘레노어는 그제야 제가 흠뻑 젖어 안이 살짝 비치는 드레스 차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망했다.’
도망치듯 제 방으로 달음박질한 엘레노어가 문을 닫고 주저앉았다.
“세상에 이런 꼴로 누굴 대한 거야. 미쳤어,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엘레노어는 머리를 부여잡고 기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쥐구멍보다 훨씬 따스하고 안락한 욕조에 몸을 담그게 되었다.
따뜻한 물 속에 들어가자 불안하게 마구 뛰어대던 심장이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엘레노어가 자책하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비죽이 솟았다.
“잠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방심한 내 잘못이야.”
만약 데미안이 잘못되기라도 했었다면…….
상황 수습이 되지 않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엘레노어가 눈물을 훔치며 코를 훌쩍였다.
‘저택 안에서 아이들의 안전 문제는 내 책임이야. 제대로 사과해야 해.’
어느 정도 몸이 녹았다고 판단되자마자 엘레노어가 욕조에서 나와 몸을 닦아냈다. 진정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자꾸만 맥없이 다리 힘이 풀렸다.
“일단 데미안은 오늘 여기서 재우는 게 좋겠다. 놀랐을 텐데 마차를 한 시간이나 타고 이동하는 건 무리야.”
재빨리 옷을 갈아입은 엘레노어가 응접실로 향했다. 카이델과 데미안이 나란히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공작님. 데미안.”
두 사람의 시선이 엘레노어에게 향했다. 엘레노어는 재빨리 데미안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혈색도 좋고 표정도 편안해 보였다.
“정말 어떤 말로 사과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더 주의해서 지켜보았어야 했는데…….”
“아이들끼리 장난치다 실수로 벌어진 일이야. 부주의했던 데미안도 잘못이 있고. 그러니 자책은 그만해.”
카이델의 말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마음은 조금도 편안해지지 않았다.
“사과는 충분히 받았고, 데미안도 괜찮으니 더는 마음 쓰지 마.”
엘레노어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카이델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지금은 조금 괜찮아졌다고 해도 데미안은 많이 놀랐을 거예요. 오늘은 백작저에서 하루 쉬어가시는 게 어떠실까요?”
엘레노어가 간절한 바람을 담은 눈으로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평소 집이 아닌 곳에 머무르는 일은 극도로 피하는 그였지만, 투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겁에 질려 잘게 떨리는 것을 보자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지.”
“다행이에요. 손님방을 준비할게요. 두 분 방은 따로 준비해 드릴까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카이델이 제 동생을 힐끗 눈짓했다. 무척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안아본 데미안은 무척이나 가볍고 작았다. 차갑게 식은 뺨을 감싸 쥐었을 때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카이델이 대답했다.
“하나면 족해. 오늘은 데미안도 많이 놀랐을 테니, 곁에서 지켜봐 줄 사람이 필요할 테지.”
예상 밖의 대답에 데미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늘 저만 보면 한숨을 내쉬던 형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식사하는 일조차 잘 없는 사이였다.
데미안은 카이델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슬프지만 이해도 했다.
제 탄생은 어머니의 죽음과 맞바꾼 것임을 데미안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공작가의 가신들이 데미안을 볼 때마다 그 이야기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선대 공작은 데미안에게서 제 아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고 했다. 끝내는 참지 못하고 피가 튀는 전쟁터로 자진해 나섰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국 그를 사랑하는 제 아내 곁에 묻히게 만들었다.
숙부는 데미안을 앞에 앉혀 두고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제 어미에 이어 아비까지 잡아먹은 놈이야. 다음은 누구겠나? 제 형이지.”
그 말을 들은 날,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죽고 어머니가 살았더라면 우리 가족은 행복했을 텐데.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우리 가족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야.’
그렇다면 그는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카이델에게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서 유령처럼 존재해야 했다.
가주가 된 카이델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 그런 선택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같은 방을 쓴다니. 밤새워 지켜보겠다니.
“데미안은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니 보호자가 필요하지 않겠나.”
데미안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가득 찼다.
***
“드와이트 옷인데, 일단은 제일 큰 걸로 가져왔어요.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고마워.”
“데미안도 이걸로 갈아입자.”
드와이트의 옷장을 뒤져 잠옷으로 걸칠 만한 가장 큰 옷과 가장 작은 옷을 찾아 건넸다.
데미안을 옷을 갈아입는 것을 거들어 주던 엘레노어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곤혹스러운 목소리에 몸을 틀었다.
“옷이 약간 작은 것 같아.”
“그럴 리가…….”
드와이트가 입었을 땐 분명 헐렁했는데?
엘레노어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푸흡.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델에게 드와이트의 셔츠는 딱 맞았다. 그러니까, 정말 ‘딱’ 맞았다는 소리다. 무심코 팔을 들어 올렸다간 옷이 찢어지고, 힘겹게 잠근 가슴팍의 단추는 숨을 크게 들이쉬기만 해도 앞으로 발사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드와이트도 작지 않은 키라 방심했다. 하지만 꾸준한 훈련으로 다져진 카이델의 몸은, 평생 책만 읽어 온 드와이트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단단한 근육으로 섬세하게 짜인 신체는 어딜 보나 드와이트보다 훨씬 크고 굵었다.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몸이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우스운 것이 사실이었다.
엘레노어가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부들부들 떨수록 카이델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달아올랐다. 데미안도 웃지 않기 위해 베개에 제 얼굴을 깊이 파묻어 버렸다.
“……그냥 가운이면 돼. 원래도 그렇게 자니까.”
카이델이 홱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귓바퀴가 붉어져 있었다.
“정말 죄송해요. 하녀에게 가운을 준비하라 말해 놓을게요.”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머리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 자, 데미. 안녕히 주무세요, 공작님.”
엘레노어는 조용히 방을 빠져 나갔다. 탁,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방 안에는 침묵이 찾아들었다. 밝고 훈훈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환복을 마친 카이델이 말했다.
“소등할 테니 누워.”
능숙하게 벽등을 끈 카이델은 도톰한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 누웠다. 옆을 묵직하게 채우는 존재감에 데미안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춥지는 않나? 아픈 곳은?”
데미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데미안 쪽으로 이불을 조금 옮겨 덮어 준 카이델이 자리에 누웠다.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게 조금은 불편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죄송해요.”
그때 이불 끝을 쥐고 꼼지락거리던 데미안이 작게 속삭였다.
데미안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기에 카이델의 눈은 한계치까지 커졌다.
애써 평정을 되찾은 그가 평소처럼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이.”
“조, 조심해서 놀았어야 했는데 저 때문에 불편하게…….”
데미안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꾸역꾸역 말을 내뱉었다. 카이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편하지 않아. 그런 일로 내게 사과할 필요 없다.”
딱딱하게 대답한 카이델은 어둠 속에서 움츠러든 작은 인영을 보며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