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이즈멜의 제안에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랑 노는 건 재미 없으실 텐데요.”
제가 직장에서 유명하던 노잼 인간이라고요. 엘레노어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난 요즘 영애가 제일 재밌어. 그냥 보고 있기만 해도 웃음이 나.”
그건 제가 웃기게 생겼다는 뜻인가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 존재가 전하께 웃음을 드린다니 참 기쁘네요.”
“응, 나도 영애의 존재가 기뻐.”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아지처럼 해맑게 대답했다. 무려 황태자인데도 이상하게 그와 있으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권위로 누군가를 찍어 누른다거나, 사람을 낮잡아 본다거나 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다.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이즈멜이 긴 다리를 꼬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 내게 크나큰 기쁨이 되어 주시는 영애께서 오늘의 만남을 청한 이유나 한번 들어 볼까?”
“루카스에게는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첫 시간에는 진단 평가를 쳤어요. 제국어, 수리, 외국어, 역사. 필기 과목들만요.”
“녀석, 일언반구도 없더니……. 많이 엉망이었나?”
아무리 이즈멜이 편안히 대해 준다지만, 보호자에게 자녀가 공부에 재능이 부족하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엘레노어가 얼른 칭찬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역사 과목 성적은 무척 훌륭해요.”
“그야 그 녀석은 마땅히 그래야지.”
황족이라는 녀석이 역사에 무지하면 그건 정말로 큰 문제가 아니겠어? 이즈멜이 작게 덧붙이며 눈웃음을 흘렸다.
“제국어, 수리, 외국어를 제쳐두고 역사 성적부터 꺼내 들었다는 건, 나머지는 다 엉망이라는 소리겠군.”
전하께서는 참 눈치도 빠르시지.
뜨끔한 엘레노어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엉망진창이라기보다는…… 아주 약!간!의!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아도 돼. 루카스가 그다지 학문에 뜻이 없다는 건 황궁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이즈멜이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어깨를 으쓱한 엘레노어가 입을 열었다.
“네. 사실은 그리 좋지 않아요. 지금으로서는 아카데미 입학이 가능할지도 불투명하고요.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제 일이니 저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요청해.”
“루카스에게는 기본 개념 강의가 추가로 필요할 것 같아요. 시에나와 데미안도 고려해서 커리큘럼을 짜야 하니까요.”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래서 그런데, 수업이 없는 날 다른 선생님을 한 분 더 붙여 주시는 건 어려울까요?”
“어려울 거야 없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런데 왜 그대가 하지 않고? 추가 수당은 당연히 지급될 텐데.”
이즈멜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제가 요즘 따로 생각하고 있는 사업이 있어서…….”
“사업? 무슨 사업?”
따로 생각하고 있는 사업이라는 말에 이즈멜의 호기심이 동했다.
사업이라니. 눈앞의 영애는 매번 그의 허를 찌르고 들어왔다.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한 달 동안 세 번을 만났는데, 이 정도면 꽤 친하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엘레노어가 퍽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이즈멜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업상 기밀이에요. 아무리 전하라 해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
“내가 그대의 아이디어를 훔쳐 가기라도 할까 봐?”
“신중함은 현대인의 필수 덕목이죠.”
엘레노어가 단호하게 입을 다물자 이즈멜의 호기심에는 도리어 불이 붙었다.
“그러지 말고 나한테만 말해 봐. 사업할 때는 인맥도 중요하지 않은가? 나 정도면 꽤 든든한 뒷배가 될 것 같은데.”
“충성스러운 제국민으로서 전하께서 이런 사사로운 일에 권력을 사용하시도록 할 수 없어요.”
“이미 황후 폐하의 총애를 입었다, 그거군. 그래서 나 같은 건 필요 없다?”
이즈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럴 리가요. 아직 구상 단계라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서 그래요.”
“그렇다면 더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 대신…….”
대신?
“남은 하루는 내게 좀 빌려주는 게 어때? 따로 예정된 일정이 없다면 말이야.”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긴 한데……. 왜 그러세요?”
***
이즈멜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온갖 쓸모없는 것들에 돈을 뿌리고 다녔다. 엘레노어가 봤을 때는 전부 정가보다 두 배는 비싸고 주고 사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그는 그저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렇게 돈을 막 쓰시다간 단단히 호구 잡혀요, 전하.”
“쓰읍.”
“가 아니라…… 이즈멜.”
이즈멜의 강경한 요구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불경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듯 기분이 꺼림칙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돈을 적절히 써 주는 것도 필요한 일 아닌가?”
“물론 그렇긴 한데요……. 이제는 물건을 들 손도 없는걸요.”
어느새 엘레노어의 두 손에도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엘레노어가 작게 툴툴거렸다.
“처음부터 저를 짐꾼으로 부리려는 계획이셨군요.”
“그럴 리가. 혼자 돌아다니면 재미없잖아. 전부 그대에게 선물로 줄게. 그러니 좀 즐겨 봐.”
“그런 건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그랬으면 신중하게 골랐을 텐데요.”
“선물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받을 때 가장 유쾌한 법이지.”
발끈한 엘레노어의 눈썹이 꿈틀하자 이즈멜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너무 많이 사긴 했어요. 이젠 정말 멈추세요. 이게 다 얼마야…….”
“그거 아나? 내 주머니 사정을 걱정해 주는 건 영애가 처음이야.”
“그것참 가문의 영광이네요.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만 사세요.”
“명령 받들지요.”
두 사람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활기찬 분위기의 광장을 가로질렀다. 별것 아닌 표정 하나에도 열성적인 반응을 보여 주는 이즈멜 덕에 대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엘레노어는 한 번도 제가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 마디 한 마디 뱉을 때마다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이즈멜 때문에 엘레노어는 제 안에 저도 알지 못하는 유머 감각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연인인 것 같은데, 궁합 한번 보고 가는 건 어떤가. 내가 이래 봬도 꽤 용하다오. 동화 한 닢에 봐 줄게. 어디 가서 이 가격에 절대 점 못 봐.”
그때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있던 노파의 걸걸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발목을 잡았다.
강한 태양 빛에 검게 그을린 피부와 새하얗게 센 머리가 어쩐지 오싹한 인상을 풍기는 이였다. 점술사보다는 집시나 걸인에 가까워 보였다. 그 흔한 카드나 구슬 같은 것도 하나 없었다.
누가 듣기에도 허황한 말임에도 이즈멜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와, 전하께서는 정말 타고난 호구시구나.’
엘레노어가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호구 잡힌 이력이라면 그녀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보다 더한 사람은 정말이지 처음 보았다.
“그렇다는데, 궁금하지 않나?”
“우리를 연인으로 본 것부터 용하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요.”
“사람 일은 늘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인데, 그걸 어떻게 단정하나?”
엘레노어의 말에 눈썹을 치켜세우며 반박한 이즈멜이 성큼성큼 다가가 노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시위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사기당하려는 거 구제해 주려니까 고집은…….’
엘레노어가 어정쩡하게 떨어져 서 있자 이즈멜이 어서 와 보라며 손짓했다.
황태자가 오라는데 뭐 어쩌겠는가. 오라면 오고 앉으라면 앉아야지. 엘레노어가 떨떠름한 얼굴로 이즈멜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이즈멜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노파의 검은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아니, 뵙기 힘든 귀한 집 자제분이셨군.”
하, 엘레노어가 속으로 작게 코웃음을 쳤다. 공중제비를 돌며 보아도 이즈멜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남자는 장기조차 우아하게 생겼을 거라고 엘레노어는 확신했다.
하지만 이즈멜은 무척이나 감명을 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봤지? 용하지?
엘레노어의 팔을 팔꿈치로 툭툭 건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순진한 도련님을 어쩌면 좋을까. 엘레노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량 같아도 생각이 많고 복잡하구먼. 발 뻗고 편히 자는 날이 많지 않지? 보기보다는 냉철한 성격이야. 사리 판단도 잘하고,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겠어.”
“맞습니다.”
한량 같다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이즈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사리 판단도 잘하고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겠다니. 어떻게 찍어도 저렇게 찍는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돈 낭비였다고 생각하며 엘레노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의심 많은 아가씨는, 어디 보자. 얼굴에 야망은 없는데 일복은 보통이 아니군. 죽을 때까지 일이 끊어지는 날이 없겠어. 명예운도 꽤 보이고. 재밌군, 재밌어.”
엘레노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고 보복이라도 하는 걸까. 죽을 때까지 일이 끊어지지 않는다니,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었다.
“아차, 독특한 두 분이 오셔서 잠시 이야기가 딴 길로 샜군. 연애 쪽을 보자면 둘은 꽤 잘 맞는 편이야. 큰 갈등 없이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 갈 수 있을 걸세.”
“그렇습니까?”
이즈멜이 부드럽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 그런데 총각이 마음고생을 좀 하겠어. 아가씨가 연애 쪽으로는 감이 많이 무디구먼. 웬만한 노력으로는 턱도 없겠어.”
“아닌데……. 저 눈치 빨라요, 할머니.”
“아마 그건 아가씨 혼자만의 착각일 확률이 높아. 다른 문제에서 야무질 수는 있겠지만, 아가씨는 기본적으로 감정에 서툰 사람이야. 겁이 많지.”
엘레노어의 반박에 노파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혼자만의 착각이라니. 아드리안에게도 들었던 말을 모르는 할머니에게서 또 듣고 있자니 울컥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가씨에게서는 짙은 꽃향기가 나. 그 말인즉슨, 벌이 꼬인다는 거지.”
어느새 꽤 집중해서 노파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엘레노어가 제 팔을 들어 킁킁 향기를 맡았다. 이즈멜도 괜히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냥 평소 같은 살 냄새가 나는데.’
“정말 향기가 난다는 뜻은 아니고, 사람을 끄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야. 아가씨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아가씨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계속 나타날 거야.”
“말도 안 돼요.”
“젊은 아가씨가 의심도 많지.”
노파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연인은 아니구먼? 그렇다고 아예 연이 없는 것 같지도 않고…….”
“예, 맞습니다.”
이즈멜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노어가 곧바로 따져 물었다.
“아까부터 맞긴 뭐가 자꾸 맞아요.”
“우리가 정말 아무 연도 없는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한 거라면 서운한데, 엘레노어.”
이즈멜이 눈썹 끝을 늘어뜨리며 섭섭하다는 듯 낮게 읊조렸다.
으윽, 저런 얼굴로 저렇게 말하는 건 반칙이지.
엘레노어가 다시 입술을 꾹 닫았다.
그런 두 사람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노파가 이즈멜을 보며 입을 열었다.
“친절한 총각. 내가 조언 하나 하지. 고민이 길면 늦어. 때로는 신중함이 독이 되는 법이네.”
“그렇지요.”
“때로는 감정에 그대를 내맡겨야 할 때가 있어. 부디 그걸 잊지 말기를 바라네.”
이즈멜이 내민 동화 한 닢을 주머니에 짤랑, 챙겨 넣은 노파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