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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7화 (17/168)

17화

“맞춤 교재를 만들고 싶은데, 컴퓨터가 없으니 곤란하네.”

흐응, 두꺼운 책들을 뒤적이던 엘레노어가 턱을 긁적였다. 기존의 책들은 오로지 학술적인 목적으로 쓰인 것들이라, 아이들이 보고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곳은 참고서, 문제집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귀족 자제들만이 가정교사와 1대1로 수업하는 것이 보통인 사회이니, 굳이 그런 것이 만들어져 보급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문맹률이 하늘을 찌르는 판에 다른 교육에 대해 논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기도 했고 말이다.

“컴퓨터로 작업해도 교재 제작은 품이 많이 드는 일인걸. 아니, 애초에 네 과목 교재를 만드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하지만 이 책들은 효율성이 너무 떨어져. 교과서처럼 학습을 위해 딱 정리된 책이 필요하긴 한데……. 굳이 그걸 만드는 사람이 나여야만 하냐는 거지. 엘레노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예스, 그렇다였다.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 자체가 없으니 그것을 만들려는 사람이 짠하고 나타날 리는 없었다.

한참이나 곰곰이 생각하던 엘레노어가 마음을 정했다.

“그래, 뭘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고, 이왕 무를 썰 거라면 효율적인 방식으로 예쁘게 썰어야 한다는 게 엘레노어의 지론이었다.

일단 틀을 잡고 초고를 만드는 게 어렵지. 그 이후의 작업은 출판사나 인쇄소에서 해 줄 테니 하려고 하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집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거지. 겨우 다음 주 수업에 쓸 교재를 정리할 정도인데 언제 책 네 권을 다 쓰냐고.”

그것을 인쇄해 주겠다는 곳이 나타날지도 의문이었다. 완성된 원고가 아니니 출판사에 맡길 수도 없는데, 그냥 인쇄를 맡기자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벨리움은 아직 사람이 일일이 활자로 인쇄판을 짜 맞춘 후 찍어내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웬만큼 대량 인쇄가 아니면 그냥 사람이 직접 베껴 쓰는 수고를 감내해야 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삼백 부쯤 찍으면 모를까. 겨우 세 부를 누가 찍어 주겠어.”

인쇄에 대해 생각하던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그럼 삼백 부, 찍으면 되지?’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촤라락 주판알 굴러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국만큼 교육열이 치열한 곳은 아니지만, 그때 산처럼 쌓였던 편지를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개인 교습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다들 귀하게 큰 귀족 자제들이니 한국의 학원 시스템을 그대로 들고 오는 건 무리야.’

학생 세 명 관리하는 것도 부담스러운걸. 더 정원을 늘릴 수는 없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사업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품이 많이 들고 자잘하게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황자인 루카스를 맡은 이상 애초에 허가조차 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교재만 판매하는 거라면?”

어차피 만들겠다 마음먹은 교재를 조금 더 찍어내는 것에 불과하니, 엘레노어의 업무가 마구 불어나지도 않을 것이었다.

“일주일 정도 공부할 만큼의 교재를 매주 인쇄하는 거야. 그리고 그걸 신문처럼 집집마다 배달하는 거지.”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사업 모델 하나가 그려졌다. 이곳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너무나도 익숙한 방식이었다. 주 단위, 혹은 달 단위로 정해진 커리큘럼에 맞는 범위의 교재를 보내주는 것.

쉽게 말해 ‘학습지’였다.

“교사가 참고할 수 있는 커리큘럼도 함께 전달한다면, 수업용으로도 쓸 수 있어.”

떠오른 아이디어를 이리저리 굴려보던 엘레노어가 눈을 반짝였다.

유통이라면 아드리안의 아버지, 블레이크 후작이 상단을 소유하고 있으니 그쪽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터였다.

“후작님께 사업에 대한 조언을 좀 구해야겠어.”

제멋대로 사업 고문까지 선임한 엘레노어가 빈 종이를 꺼내 사업계획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해 본 적 없는 일이기에 처음에는 조금 헤맸지만, 곧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언제쯤 후작저를 방문하면 될까? 이번 주 중은 좀 이른가?’

엘레노어의 일정표가 조금 더 빡빡해진 순간이었다.

***

후작저를 방문해도 되겠냐는 엘레노어의 요청에 후작은 곧바로 환영한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우리 사이에 정중하게 방문 의사를 밝힌 것이 도리어 서운하다며, 최대한 빨리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였다.

‘후작님은 참 변하지를 않으신다니까.’

엘레노어도 어서 후작을 만나 이것저것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먼저 만나기로 약속된 사람이 있었다.

“저, 카페 아미키디아를 찾는데요.”

“아미키디아라……. 아, 그곳인가? 저 모퉁이를 돌면 나무문이 바로 보일 거요. 내 짐작이 맞았다면 그곳일 것 같은데.”

루카스의 교육을 맡은 책임자였다.

‘이름이 안젤라라던가. 편지 쓰기 장인이었던…….’

유려한 글씨로 단정하게 쓴 편지는, 짧게 휘갈긴 쪽지를 민망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냥 그 자체로도 꼭 작품 같아 보여서 엘레노어는 침대 머리맡에 그 답신을 며칠 놓아두기도 했다.

만나기로 한 카페는 도심에 있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찾기가 힘들었다. 꼭 일부러 꼭꼭 숨겨놓은 것처럼.

“여긴가 보다.”

문고리에 작게 새겨진 글씨를 확인한 엘레노어가 삐그덕, 문을 열고 들어섰다.

“와.”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선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라하고 투박한 외관과 달리 건물의 내부는 무척이나 세련되고 화려했다.

엘레노어는 새하얀 대리석 바닥을 따라 걸어가며 벽에 걸린 그림 액자들은 빤히 쳐다보았다. 예술에 대해 문외한인 엘레노어가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그림들이었다.

“어서 와. 찾기 어렵지는 않았어?”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지만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이즈멜이었다.

“황태자 전하? 전하께서 어떻게……?”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뒤늦게 예의를 표한 엘레노어가 이즈멜의 앞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루카스가 전하께 쪽지를 전해드린 거군요.”

“맞아. 그나저나 나도 이즈멜이라고 불러주면 안 되나? 듣기 좋은데.”

곰곰이 상황을 정리하던 엘레노어가 이즈멜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는 안젤라라는 분이 나오실 줄 알았어요.”

“시녀장? 원래라면 쪽지가 그녀에게 가는 게 맞았겠군. 하지만 내게 온 것도 틀린 건 아니야. 내가 그 애의 형이니, 나도 루카스의 보호자고 교육 책임자가 될 수 있지.”

“그럼요. 전하께 자격이 없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놀랐거든요. 여기서 전하를 뵐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엘레노어가 주변을 자꾸 두리번거리자, 이즈멜이 픽 웃으며 물었다.

“신기한 곳이지?”

“네. 바깥에서는 이런 공간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가 없으니까요.”

“황족들이 종종 이용하는 장소야. 다른 이들의 시선을 벗어나 쉬고 싶을 때나, 누군가와 비밀스럽게 만나고 싶을 때 오지. 예를 들면…….”

한쪽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 이즈멜이 작게 속삭였다.

“연애할 때.”

미끈하게 눈을 휘며 웃는 이즈멜을 보던 엘레노어가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렸다. 잘생겼다는 말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백금발과 붉은 눈의 조화가 위험할 정도로 완벽했다.

“비밀이야. 알았지?”

이즈멜이 입술 위에 검지를 얹으며 싱긋 웃었다.

“그런 비밀을 왜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제가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면 어쩌시려고요.”

“어라, 정말 그럴 거야? 그럼 집무실에 딱 잡아두고 놓아주지 말아야지.”

“당연히 안 그러죠!”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으며 큰 소리로 답하자 이즈멜이 웃음을 터뜨렸다.

“영애를 여기서 자주 보고 싶다는 뜻이었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

“모르겠는데요.”

“그럼 더 생각해 봐.”

그대는 똑똑하니 금방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이즈멜이 턱을 괴고 고개를 느른하게 기울였다. 붉은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 고여 있었다. 엘레노어가 곰곰이 그가 했던 말을 되짚기 시작했다.

‘연애할 때.’

문득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그가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미묘해지자 입꼬리를 조금 더 말아 올린 이즈멜이 재차 물었다.

“이젠 알 것 같아?”

“전하는 참 짓궂은 장난을 많이 치시네요. 순진한 숙녀를 놀리시는 건 나빠요.”

엘레노어가 뺨을 붉히며 이즈멜을 가볍게 타박했다. 그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리며 선선히 시인했다.

“내가 좀 짓궂은 데가 있긴 해. 폐하께서도 걱정이 많으셨지.”

그렇다고 전부 농담인 건 아닌데, 어쨌든.

“저번에 보니 단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달콤한 디저트 위주로 준비시켰어. 괜찮아?”

“네, 좋아해요.”

이즈멜이 눈짓하자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이 테이블 위에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향긋한 차를 내려놓았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는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게 감사를 표한 엘레노어가 케이크를 약간 떠서 입에 넣었다. 사르륵. 혀끝에서부터 퍼져가는 고급스러운 달콤함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네. 편하게 먹어.”

이즈멜이 접시를 조금씩 앞으로 밀어 놓아 주며 더 먹기를 권했다. 엘레노어가 하나하나 열심히 맛보는 동안 그는 거의 손대지 않고 그녀가 먹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이즈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영애를 부른 이유는, 영애도 이곳을 이용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감사, 합니다?”

……감동받아야 할 타이밍인가?

엘레노어가 긴가민가하며 답하자 이즈멜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감사할 것 없이 사실이 그렇다는 뜻이야. 어머니께 나무패를 선물 받지 않았어? 앨버트로스가 새겨진.”

“아, 받았어요.”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패가 의미하는 바는 커.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무궁무진하지. 그 패를 받기 위해 목을 매는 이들이 명예만을 위해서 그러는 건 아냐.”

“그래요?”

이즈멜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원한다면 그대도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원칙은 예약제지만 자주 쓰이는 곳은 아니니 그냥 와도 괜찮아. 어때, 마음에 드나?”

“대단하네요.”

VIP들만 이용할 수 있는 라운지 같은 것인가 보다. 엘레노어의 귀가 쫑긋 섰다. 귀찮고 부담스럽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제법 솔깃한 이야기였다.

그런 엘레노어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이즈멜이 슬며시 물었다.

“더 알고 싶어?”

“네, 알고 싶어요.”

엘레노어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는 비밀스러운 데다 고즈넉하고, 고급스러운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차와 디저트가 훌륭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이즈멜은 곧바로 알려주는 대신 팔짱을 끼며 조건을 내걸었다.

“그럼 나랑 자주 만나야겠다. 하루에 하나씩 가르쳐 줄 테니.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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