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엘레노어의 뇌에 순간 과부하가 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해롭다. 심혈관 건강에 유해한 얼굴이다. 장장 20년에 걸쳐 익숙해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꼴사납게 심장을 부여잡고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놀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른 엘레노어가 큼큼, 헛기침했다.
“내가 애들 가져다줄게.”
자연스럽게 찬장에서 트레이를 꺼내 든 아드리안이 적당히 식은 코코아 잔을 그 위에 올리며 말했다. 누가 보아도 손님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퍽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엘레노어가 응접실로 향하는 아드리안의 뒤를 따랐다. 그러던 중 문간에서 아드리안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발렌타인 공작 각하.”
그사이 카이델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블레이크 소후작.”
“아, 데미안을 직접 데리러 오신 겁니까?”
아드리안의 말에 카이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공작님은 ‘아까도’ 데미안을 ‘직접’ 데려다주셨어요.”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시에나가 톡 끼어들어 한 마디를 보탰다.
‘삼촌, 그러니까 삼촌도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겠어?’
담고 있는 메시지가 몹시도 명확한 발언에 루카스와 데미안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것은 아드리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닐 터인데, 동생을 위하는 마음이 각별하십니다. 공사다망하신 와중에도 이렇게 친히 걸음 하시는 것을 보면, 두 분의 우애가 어느 정도로 돈독한지 가히 짐작됩니다.”
요약하면, 네 개수작 다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시에나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기특하게도, 아드리안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중하고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미소는 서늘했다.
‘감히 누구한테 눈독을 들여. 하던 대로 검이나 휘두르다 대충 혼인해 살 것이지.’
그런 아드리안을 덤덤히 응시하며 카이델이 대답했다.
“하나뿐인 혈육이니 애틋할 수밖에.”
“저도 각하를 본받아 하나뿐인 조카에게 조금 더 마음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시에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소후작이야말로 가문을 이어받으려면 배우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을 텐데, 제법 여유로워 보이는군.”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네 공부 하기도 바쁠 놈이 어딜 감히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냐는 말이었다.
트레이를 들고 있는 아드리안과 그 옆에 나란히 선 엘레노어는 꼭 신혼부부처럼 보였다. 카이델은 나란히 붙어 서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엘레노어의 앞을 막아서며 그의 시선을 차단하자, 카이델의 기운이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거슬려.’
카이델이 보기에 이것은 음흉한 늑대 한 마리가 착하고 순진하고 귀여운 양 한 마리를 보며 군침을 흘리는 광경, 그 자체였다. 선량한 친구의 탈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악질이라 할 수 있었다.
사사건건 거슬리는 놈이다. 저런 놈은 후작가의 울타리 안에 평생 박아 놓는 것이 마땅했다. 배알도 없이 반질반질한 낯짝 하며 음험하기 짝이 없는 미소, 기름이라도 들이부었는지 현란하게 놀리는 세 치 혀까지.
그러고 보면 얼마 전에는 단둘이 저녁을 먹었다던가. 그것도 아주 보란 듯이.
그것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카이델은 아드리안에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입이 달려 있다는 사실마저도 고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당장 저 거슬리는 놈을 치워 버리기에는 명분이 없었다. 호흡을 가라앉힌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무슨 시험을 쳤다던데.”
“아, 맞아요. 그러잖아도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 깜빡할 뻔했네요.”
엘레노어가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뭉치들을 탁탁 정리하며 말했다.
“리안, 잠시 애들 좀 지켜봐 줄래? 혹시 루카스를 데리러 온 마차가 도착하면 말 좀 해 줘.”
“……네가 원한다면.”
떨떠름한 기색을 재빨리 지워낸 아드리안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빌어먹을 황실의 마차가 지금쯤 어디를 달리고 있을지를 끊임없이 상상하면서.
***
카이델과 엘레노어가 거실에 놓인 작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들고 있는 종이를 뒤적이느라 여념이 없는 엘레노어와 달리, 카이델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잔뜩 긴장해 몸을 굳혔다.
엘레노어가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마다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카이델의 코끝을 휘감았다.
넓게 퍼진 드레스 자락이 카이델의 다리 위를 살짝 덮었다. 그 미약한 자극에도 카이델은 움찔움찔 몸을 굳혔다.
우스운 일이라는 걸 알지만, 이성과의 접촉에 면역이 없는 카이델에게는 언뜻언뜻 팔이 스치는 이 정도 거리가 굉장히 불경스럽게 느껴졌다.
“오늘 간단한 진단 평가를 봤어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제가 알아야 앞으로의 커리큘럼을 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게 데미안의 성적표예요.”
엘레노어가 공작에게 데미안의 성적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부터 차례로 제국어, 수리, 외국어, 역사 영역이에요.”
카이델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인 엘레노어는 손가락으로 숫자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설명을 덧붙였다.
“훌륭하죠? 기초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꽤 어려운 문제도 많이 섞여 있었어요. 지금 당장 시험을 친대도 합격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이에요. 무척 똑똑한 아이예요.”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전에 데미안을 가르쳤던 가정교사도 그의 학습 능력은 무척이나 우수하다 칭찬한 바 있었다.
“……외국어가 좀 약한 것 같은데.”
뻣뻣하게 굳은 카이델이 어색한 얼굴로 지적했다. 학부모 노릇은 처음이라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성적이 워낙 높다 보니 그래 보이지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그보다 수리 영역 좀 보세요.”
‘100점’.
100이라는 숫자를 콕 짚은 엘레노어가 눈을 반짝이며 카이델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 없냐는 얼굴이었다. 눈썹을 찌푸린 카이델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100점이군.”
“네, 100점이죠.”
엘레노어의 시선은 여전히 카이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카이델은 뇌에서 땀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엘레노어의 얼굴을 멀뚱히 마주 보았다.
엘레노어는 이대로라면 해가 질 때까지 원하는 답을 얻어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단하지 않나요? 훌륭하다거나, 자랑스럽다거나 그렇지 않으세요?”
“대단히, 인상적이군……?”
카이델이 슬쩍 엘레노어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표현이 낯선 사람에게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래요. 그렇게 데미안을 많이 칭찬해 주세요.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것보다 잘한 점을 칭찬해 주는 게 동기부여에는 더 도움이 돼요.”
“노력하지.”
엘레노어가 말하고자 한 것을 깨달은 카이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이라……. 익숙하지는 않지만 못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공작님은 데미안을 많이 아끼시지요?”
그런 카이델을 빤히 바라보던 엘레노어가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카이델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엘레노어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제게 몇 번이고 부탁하실 정도로 마음을 쓰시잖아요. 이렇게 직접 데리러도 오시고요.”
“그건…….”
부인하려던 카이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다른 마음이 없지 않았다. 신문에서 익숙한 이름을 보니 반가웠고, 자녀 교육에 혈안이 된 귀족들이 앞다투어 편지를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먼 거리를 굳이 동행한 것도 그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에게 엘레노어가 좋은 선생님이 되어 주리라 생각한 것은 한 터럭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잠시 카이델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엘레노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때로는 표현하지 않으면 무엇도 전해지지 않아요. 전해지지 않으면 무엇도 바뀌지 않고요.”
학생을 대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카이델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조금 뒤집으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제대로 표현되어 올곧게 전해진 진심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고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카이델이 천천히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엘레노어가 차분한 목소리로 던진 말이 카이델의 안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말인데, 어째서인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면담 요청하셔도 괜찮아요. 보호자 역할이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면담이라.”
카이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내내 부옇고 답답하던 시야가 맑게 갠 느낌이었다. 전쟁에 나가기 전 공들여 전략을 세우듯, 카이델의 머릿속에 수많은 경우의 수가 빠르게 스쳐 갔다.
“저도 답을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 같이 고민해 봐요.”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이델은 엘레노어의 입에서 흘러나온 ‘우리’라는 단어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우리’ 다음에는 ‘같이’라는 단어도 나왔다.
우리 같이.
곱씹을수록 마음에 드는 말이다. 글자의 배열, 발음, 무엇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다. 카이델의 입가가 느른하게 풀어졌다.
똑똑.
그때 가볍게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고개를 돌렸다.
“황실 마차가 도착했어.”
아드리안이 마차의 도착을 알리며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반쯤 넋을 놓은 듯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카이델이 보였다. 아드리안이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엘레노어는 루카스를 챙겨 마차에 태우고 쪽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시킨 뒤 보냈다.
데미안과 시에나까지 전부 돌아가자, 엘레노어는 한바탕 전투라도 치른 병사처럼 침대 위에 나동그라졌다. 긴장했었는지 온몸의 근육이 꽉 뭉쳐 있었다.
“겨우 한 번 했는데 이렇게 힘들 일이야?”
여덟 살 애들의 에너지란……. 젊음이 좋지, 좋아.
엘레노어가 푹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하고, 맡은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니.
“내가 미쳤지, 미쳤어.”
잠시 잊고 있었지만, 돈 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의 지갑을 여는 것이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것을 엘레노어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엘레노어가 체념하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 세계나 저 세계나, 인생살이는 역시 피곤한 일이었다.
***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 잠시 만남을 청합니다. 편하신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시면 따르겠습니다. 좋은 날씨만큼이나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엘레노어 에버렛 드림.
짤막한 편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이즈멜이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동글동글한 글씨도 꼭 저를 닮았다.
“영애께서 만남을 청하신다면 기꺼이 나가야지.”
팔랑. 빳빳한 새 종이 하나를 펼친 이즈멜이 깃펜을 집어 들었다.
「친애하는 엘레노어 에버렛 선생님께.」
사각사각 소리가 책상 위를 경쾌하게 울렸다. 펜촉이 지나간 자리에는 감탄이 나올 만큼 유려한 필체가 남았다. 이즈멜은 평소보다 배는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담았다.
「녹음이 아름다운 오후입니다. 티 하나 없이 좋은 날씨를 충분히 즐기고 계시는지요? 보내주신 편지는 곧바로, 또 무사히 전달받았습니다.」
상기된 얼굴로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와서는, 당당하게 편지 한 장을 내밀던 루카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즈멜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편지를 마저 써 내려갔다.
「요청을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는 바입니다. 저 역시 선생님께서 편하신 시간과 장소에 일정을 맞출 의향이 충분히 있으나, 그편이 선생님께 더 부담을 지워드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요일 오후 두 시, 카페 아미키디아.
혹 위의 시각과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 불가하실 경우 루카스 편으로 답신을 전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만날 때까지 부디 평안하고 다정한 하루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여신의 축복이 그대에게 머물기를.
우정을 담아,
그대의 벗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