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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5화 (15/168)

15화

<2교시 수리 영역>

데미안: 100점(풀이 과정까지 완벽. 수학에 재능이 있는 듯.)

시에나: 70점(중간 난이도의 문제부터 실수가 나옴)

루카스: 20점(조금 더 잘 찍어 보지…….)

“데미안은 정말 이쪽에 재능이 상당한데?”

엘레노어가 작게 감탄했다. 데미안의 성격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풀이는 엘레노어가 만든 모범 답안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나중에 공작님께 말씀드려야지.

“시에나는 수학이 조금 약하구나.”

계산 실수도 조금 보이고, 접근부터 틀린 것들도 있네.

풀이를 살펴보던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인 개념은 이해하고 있는 듯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루카스는, 시험지가 참 깨끗하네.”

한 번호로 쭉 밀었으면 25점은 받았을 텐데……. 그래도 나름의 예의는 지켰으니 아주 나쁜 건 아니야. 괜찮아.

다시 한번 긍정의 힘에 기댄 엘레노어가 애써 웃으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3교시 외국어 영역>

데미안: 65점(어휘 학습 필요)

시에나: 70점(문법 파트에 약함)

루카스: 30점(아직 포기하지 말자!)

세 명 다 외국어는 썩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얼굴에는 전에 없이 자신만만한 빛이 감돌았다.

중립국인 델른에 위치한 아카데미에서는 대체로 제국어가 통용되었지만, 인접한 대륙인 바르칸의 언어도 종종 사용되었다. 바르칸어는 영어와 무척이나 유사한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알파벳의 형태만 약간 다른 정도랄까.

대학에서 영어 교육학을 전공했던 엘레노어에게는 행운인 일이었다. 엘레노어가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렀을 때 고득점을 기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세계도 국영수 중심이라니 약간 암울하긴 하지만…….

“그 말인즉슨,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과목이라는 거지. 외국어만큼은 책임지고 올려놓을 수 있으니 상관없어.”

사교육의 참맛을 보여 주마.

<4교시 역사 영역>

데미안: 90점(역시 훌륭함)

시에나: 75점(세계사 공부 필요)

루카스: 85점(드디어!!!)

마지막으로 역사 영역 성적을 확인한 엘레노어가 힉,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루카스가 무려 85점을 받은 것이다.

‘역시 황자는 황자……. 애국심, 뭐 그런 건가.’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본인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일 테니 받아들이기가 쉬웠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많이 들은 이야기이기도 했을 테고 말이다.

“그래, 이것 봐. 교육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 거야. 엘레노어, 너도 할 수 있어.”

엘레노어가 다짐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떤 가능성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주 아주 희미하고 미약하고 가느다란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게임에서 어려운 퀘스트를 마주한 듯 의욕이 불끈 솟았다.

“물론 보호자와 약간의 상담은 필요할 것 같긴 해. 루카스에게만 맞춰서 수업을 진행할 수는 없으니까.”

데미안, 시에나와 루카스의 학습 수준 격차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였다. 일단 루카스의 교육을 맡아 하던 보호자를 만나 나머지 공부를 부탁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레노어는 깨끗한 편지지를 꺼내 짧은 쪽지를 사각사각 써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당분간 루카스 황자님의 수업을 맡은 엘레노어 에버렛입니다.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 잠시 만남을 청합니다. 편하신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시면 따르겠습니다. 좋은 날씨만큼이나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엘레노어 에버렛 드림.」

***

그렇게 아이들에 관한 대략적인 파악을 마친 엘레노어가 복작복작 떠드는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자자, 채점한 것들 나눠 줄게. 다들 수고 많았고 정말 잘했어.”

이건 데미안, 이건 시에나, 남은 건 루카스 것.

엘레노어가 시험지를 나누어 주자 시에나는 재빨리 제 것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틀린 문제를 볼 때는 분한지 입술을 꼭 깨물기도 했다.

그에 비해 데미안과 루카스는 점수 자체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종이를 휙휙 넘겨보던 루카스가 물었다.

“이제 끝이에요?”

“응, 시간도 다 되었고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이야.”

“좋았어!”

순식간에 루카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피식 웃은 엘레노어가 물었다.

“아, 루카스. 지금껏 황궁에서 교육을 전담하는 분이 따로 계셨니?”

“으음,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주 바뀌어서……. 안젤라가 보통 알아서 했던 것 같은데.”

엘레노어가 루카스에게 쪽지를 슬쩍 건네며 부탁했다.

“그분께 이것 좀 전해 줄 수 있을까?”

“이게 뭔데요?”

“잠깐 여쭤볼 게 있어서 만남을 청할까 하고. 해 줄 수 있어?”

커다란 눈이 반짝 빛났다. 고개를 주억거린 루카스가 재빨리 편지를 받아 챙기며 위풍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만 믿어요!”

시에나와 데미안의 시선이 홱 루카스에게 향했다. 웃음을 터뜨린 엘레노어가 밝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좋아. 마차가 데리러 올 때까지 다들 간식 먹으면서 기다리면 되겠다. 주스 마실 사람?”

루카스가 한쪽 팔을 번쩍 들며 외쳤다.

“나는 코코아!”

“저도 코코아요.”

“데미안도?”

데미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잠깐 기다려.”

***

엘레노어가 응접실 옆에 딸린 작은 방으로 사라지자마자 시에나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다리를 척 꼬고 팔짱을 낀 시에나가 루카스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뭐가?”

루카스가 간질간질한 왼쪽 귀를 후비적대며 태연하게 되물었다.

“이러면 협상 결렬이지.”

“결렬? 그게 뭔데?”

하여튼 저 젠체하는 분홍 머리는 일부러 어려운 단어만 골라 쓰는 못된 버릇이 있다니까. 루카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렇게 혼자서 야비한 꼼수를 쓰면 우리의 동맹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뜻이지.”

같은 편일 때는 묘한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저 어려운 단어들이 얼마나 든든하게 느껴졌던가. 하지만 시에나에게 공격받는 처지가 되니 사정이 좀 바뀌었다. 뜻 모를 단어들에 콕콕 찔리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재수 없긴 하지만, 역시 쟤를 적으로 돌리면 안 되겠어.’

루카스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작게 항변했다.

“야비한 꼼수라니.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일부러 시험을 망친 거 아냐?”

시에나가 빨간색 별표로 가득한 시험지를 척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평소의 너를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닐 것 같긴 하네. 그래도 경고야. 그 편지, 안젤라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께 드릴 생각이지?”

“당연하지. 너라도 엄마 아빠 대신 너희 삼촌 가져다줄 거면서.”

“그건 그렇지만…….”

루카스는 의외로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시에나는 그에 순순히 납득하면서도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러다가는 견제하지도 않았던 황태자 전하에게까지 뒤처지게 생겼다.

선생님은 내가 제일 먼저 좋아했는데. 나는 아기 때도 선생님 만난 적 있는데.

“치사해.”

시에나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전부 다 미웠다. 그중에서도 제일 미운 건 역시 바보 같은 삼촌이다.

이게 다 삼촌을 위해서라는 건 왜 모르는 걸까. 조카가 이렇게 고군분투하는 줄도 모르고 속 편하게 일이나 하고 있겠지. 만나면 뽀뽀 안 해 줄 거야.

루카스는 그런 시에나를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제일 비열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분홍 머리, 인생이라는 건 원래 치사한 거야.”

데미안은 둘의 모습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저렇게 유치해지지는 말아야지. 데미안은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때 문간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세 아이의 시선이 몰린 곳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은, 아드리안이었다.

루카스와 데미안을 향해 눈인사를 건넨 그가 시에나를 보며 슬쩍 물었다.

“엘렌은?”

“옆방에 있어요! 코코아 가지러!”

시에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자그마한 얼굴 가득히 놀라움과 기쁨이 파도처럼 번져갔다. 예상치 못한 열렬한 대답에 아드리안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지만, 그는 곧 긴 다리로 성큼성큼 부엌 쪽으로 향했다.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시에나가 빙글 돌아섰다. 루카스와 데미안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시에나가 피식 웃었다.

똑똑히들 봤지?

“인생에는 늘 반전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

***

“엘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엘레노어가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어, 리안! 시에나 데리러 온 거야?”

“아니, 난 너 보러 왔는데.”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엘레노어의 옆으로 걸어왔다. 늘 그렇듯 농담으로 받아들인 엘레노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연스럽게 엘레노어의 옆에 붙어 선 아드리안이 그녀를 도와 머그잔을 늘어놓았다. 그가 곁에 서 있으니 너른 주방이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다진 초콜릿을 찬장에서 꺼낸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향해 물었다.

“애들 주려고 타는데, 너도 한 잔 줄까?”

“응.”

자연스럽게 통을 건네받은 아드리안이 뚜껑을 열며 대답했다.

“좋아. 그럼 네 것 타면서 내 것도 한 잔 타야지. 마시멜로도 넣을래?”

“응, 넣어 줘.”

“그 옆에 있는 마시멜로 상자 좀 줘.”

달달한 것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엘레노어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드리안은 엘레노어가 다진 초콜릿을 넣고,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신중하게 부은 뒤 빠르게 휘젓는 일련의 과정을 빤히 지켜보았다.

“왜 그렇게 봐?”

시선을 느낀 엘레노어가 웃으며 아드리안을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네가 예뻐서.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삼키며 아드리안이 슬며시 웃었다.

“그냥. 다 됐으면 내가 가져다주고 올까?”

“아직 애들 먹기는 좀 뜨거워. 약간 식어야 해. 너부터 마셔.”

엘레노어가 스윽 잔을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코코아를 잠시 내려다보던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어때?”

엘레노어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달아.”

“기껏 만들어 줬더니 소감이 그게 뭐야. 시시하게.”

미적지근한 반응에 살짝 토라진 엘레노어가 툴툴거렸다. 뾰로통해진 얼굴을 보며 아드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벨리움 최고의 선생인 엘레노어 에버렛 양이 직접 타 준 음료를 마시고 있다니 영광이네.”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할래? 네 거에는 마시멜로도 세 개나 넣었다고. 내 거엔 겨우 두 개만 넣었는데 말이야.”

그래서인지 아드리안의 입맛에는 너무 달았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가치관에 따르면 마시멜로의 개수는 그녀의 호의와 비례하는 듯했으므로, 혀가 아릴 정도의 단맛도 기꺼이 감내할 만했다.

엘레노어가 홀짝홀짝 제 것을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뜨거운지 호호 불어가며 마시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드리안의 시야에 엘레노어의 입가에 우유 거품이 약간 묻은 것이 들어왔다. 붉고 도톰한 입술로 자연히 시선이 이끌렸다.

아드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엘레노어를 불렀다.

“엘렌.”

“응?”

왜 그러냐는 듯 엘레노어가 그가 서 있는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허리를 숙여 엘레노어와 눈높이를 맞춘 아드리안이 엄지로 엘레노어의 입가를 살짝 닦아냈다.

순간 예고 없이 훅 가까워진 얼굴에 엘레노어의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거품이.”

선명한 금색 눈동자에 놀란 엘레노어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확인한 아드리안의 눈매가 슬쩍 휘었다.

아드리안이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여기 묻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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