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안녕, 선생님.”
며칠 뒤, 첫 수업을 맞아 엘레노어는 현관에서 아이들을 맞았다. 의외로 루카스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루카스 님.”
“루카스 님이라고 부를 필요 없어, 요. 그냥 루크라고 불러, 요.”
루카스는 어디 한 군데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루카스를 따라온 황실 시종이 작게 귀띔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스승에게는 예의를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요.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게 더 불편할 것 같은데…….”
엘레노어가 작게 속닥거리자 시종이 이해한다는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래, 루크. 들어와. 시에나와 데미안은 조금 이따 도착할 거야.”
“내가 1등으로 왔어, 요?”
“응, 루크가 1등이야.”
그때 뒤에서 시에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저도 왔어요!”
마차에서 내려 달려왔는지 통통한 뺨에 분홍빛 홍조가 감돌았다.
“시에나 왔구나. 루카스랑 같이 응접실에 앉아 있을래?”
“네, 그럴게요.”
뭔가 투덜거리는 말이 따라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에나는 순순히 응접실 쪽으로 향했다. 심지어 응접실 쪽에서 작은 웃음소리마저 간간이 들려왔다.
‘정말 싸우다가 정이라도 들었나? 애들 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때 문밖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 공작님이 직접 오셨나……?”
엘레노어가 말을 끝맺은 순간, 응접실이 순간 고요해졌다.
“공작님, 안녕하세요. 데미안도 안녕.”
데미안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생긋 웃었다.
“루카스와 시에나는 방금 도착해서 응접실에 있어. 같이 들어갈까?”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데미안의 고개가 움찔하며 멈춰 섰다.
데미안은 눈치가 무척 빨랐다. 늘 밤늦은 시간까지 가주 업무에 쫓기는 카이델이 굳이 마차를 타고 백작저까지 함께 온 목적은 뻔했다. 지금 엘레노어의 손을 잡고 같이 응접실로 가 버린다면 그는 겨우 이 몇 초를 위해 수십 분을 달려온 셈이 되었다.
재빨리 셈을 마친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엘레노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들어가기 싫은 거야?”
“……혼자, 갈 수 있어요.”
데미안이 속삭였다.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카이델과 엘레노어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데미안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먼저 들어가 있어. 금방 갈게.”
당황한 속내를 재빨리 갈무리한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데미안이 입을 열다니 좋은 신호네요.”
“……그렇군.”
얼떨떨한 얼굴의 카이델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놀라움이 약간 가시면서 엘레노어는 만찬 자리에서 카이델에게 타르트를 먹여 주었던 실수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입술에 묻은 크림을 핥던 요망한 혀끝에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민망해진 엘레노어가 재빨리 자리를 정리하려 입을 열었다.
“오늘도 데미안이 걱정돼서 직접 오신 거죠? 바쁘실 텐데 굳이…….”
“하나도 바쁘지 않아.”
엘레노어의 말을 끊으며 카이델이 정정했다. 무의식적으로 뱉어 버린 답에 당황한 듯 카이델의 눈이 약간 커졌다.
‘하나도 바쁘지 않다니, 이처럼 무능하게 들리는 말이 또 있을까.’
카이델이 자책하며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아니, 바쁘지 않은 건 아니다. 해야 할 일은 무척 많지만, 데미안을 데려다주고 데리러 올 만큼의 시간은 있다는 뜻이었어.”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 변명을 덧붙이던 카이델의 광대 위에 희미하게 홍조가 감돌았다. 제 꼴이 더 우스워졌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풋 웃어 버렸다. 처음으로 그가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제가 신경 쓸게요.”
“고맙군.”
카이델이 약간 멍해진 눈으로 환하게 웃는 엘레노어를 응시했다.
“나중에도 데리러 오실 건가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카이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 하나 더 생기는 순간이었다. 왜 이 여자 앞에만 서면 자꾸만 멍청하게 굴게 되는지 모를 노릇이다.
“그럼 나중에 또 뵐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공작님.”
***
“얌전한 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털이 복실거리는 여우였어.”
팔짱을 단단히 낀 시에나와 루카스가 반듯한 자세로 앉은 데미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더 똑똑한 녀석이었잖아.”
루카스가 턱을 괴며 말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방심했어요. 아니, 방심했어.”
습관처럼 루카스에게 말을 높인 시에나가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첫 시간부터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곤……. 훌륭한 전략이었다는 건 인정할게. 둘만 있을 시간을 만드는 기술도 수준급이더라. 솔직히 감탄했어.”
시에나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데미안의 행동을 조목조목 평가했다. 의도치 않게 시에나의 인정을 받은 데미안이 작게 눈썹을 으쓱했다.
따지고 보면 데미안이 형에게 동행해 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었으므로 여우 취급은 퍽 억울한 일이었다. 공작저에서 백작저까지는 마차로 거의 한 시간 거리. 절대 짧지만은 않은 그 시간을 형과 마주 앉아 어색한 침묵을 견뎌야 했다. 불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제 형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겨우 두 번으로 사람을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엘레노어는 괜찮은 사람 같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카이델이 즐거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또…… 나를 내쫓거나 구박하지도 않을 것 같아. 두 사람이 결혼한다면 말이야.’
루카스와 시에나가 작당한 일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해는 되었다. 내 눈에 좋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좋은 사람인 법이니까.
‘그래도 아직은 우리 형이 더 유리해.’
머릿속으로 카이델, 이즈멜, 아드리안의 얼굴을 차례차례 떠올려 본 데미안이 곧 판단을 내렸다. 제 형이 앞서나가고 있다는 확신이 서자 어깨가 으쓱해졌다.
“방심하지 마, 데미안. 우리도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거니까.”
“맞아. 우리도 얍삽함이라면 뒤떨어지지 않아.”
“그럼.”
어느새 죽이 잘 맞는 한 쌍이 된 루카스와 시에나가 주거니 받거니 합을 맞췄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들 하고 있어?”
그때 엘레노어가 종이 뭉치를 들고 응접실로 들어섰다.
“이제 수업 시작해도 될까?”
“네!”
“난 싫은데…….”
루카스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엘레노어가 커다란 칠판 앞에 섰다. 익숙한 마커펜이 아닌 투박한 석고 덩어리가 조금 어색했지만, 분필과 비슷한 물건이라 생각하자 금세 익숙해졌다.
“먼저 정리하고 갈 게 있어.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에 대해서.”
엘레노어가 세 아이와 차례차례 시선을 맞췄다.
“이곳에서 우리는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준비하게 될 거야. 물론 아직 시험에 대한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도 있겠지만…….”
엘레노어의 시선이 잠시 데미안에게 닿았다.
“수업은 일주일에 세 번, 입학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기 위한 목적에 충실하게 진행될 거야.”
돌아선 엘레노어가 칠판에 시험 과목들을 쭉 적어 내려갔다. 글씨를 쓸 때마다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났다.
1. 제국어
2. 수리
3. 외국어
4. 역사
“여기까지가 필기 과목이야. 우리가 주로 공부할 과목이지.”
“보기만 해도 토 나올 것 같아, 요.”
“하지만 아직도 남았는걸.”
5. 사교 예절/체술/예술
“그리고 이 세 과목은 실기인데……. 비중이 큰 과목은 아니야. 그냥 일종의 가산점을 주겠다는 거지.”
아마 이것들은 다른 선생님을 찾든지 해야 할 것 같아…….
실기 과목을 물끄러미 보던 엘레노어가 말끝을 흐렸다. 세 과목 다 끔찍이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춤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드와이트가 학을 뗄 정도로 파트너의 발을 마구 밟아대는 데다, 유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체력 역시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2층에 있는 제 방까지 오르내리는 것만으로 엘레노어는 가끔 헉헉거리곤 했으니까.
예술과도 그다지 인연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레노어의 미적 감각은 오로지 잘생긴 남자와 그렇지 못한 남자를 구분하는 쪽으로만 발달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던 시에나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선생님, 그런데 저 종이 뭉치는 다 뭐예요?”
“뭐일 것 같아?”
엘레노어의 입가에 음험한 미소가 번졌다.
“시험지야.”
세 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 순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짜릿함이 온몸을 관통했다.
‘그래, 이 맛이었어. 이 맛에 쌤 소리 듣는 거였지.’
이런 순간이야말로 재미없는 강사 일의 몇 안 되는 낙이었다. 학생들의 좌절 섞인 앙탈을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 비슬비슬 웃음이 났다.
악취미였지만, 동료 선생님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곤 했으니 아예 특이한 증상은 아닐 것이다.
“간단한 테스트야. 그냥 너희들이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한 거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쳐.”
엘레노어가 한 명 한 명에게 시험지를 나눠주었다. 데미안은 얌전하게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고, 시에나는 열의에 불타는 얼굴로 시험지를 읽어 내려갔다. 루카스는…….
말을 말자.
“시간은 과목당 20분씩. 보기 네 개 중에 정답에 제일 가까운 것 하나 고르면 돼.”
시계를 힐끗 쳐다본 엘레노어가 짝짝, 손뼉을 쳐 주의를 집중시켰다.
“준비됐지? 그럼 시-작!”
***
“흐음.”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결과였다. 빠르게 채점한 끝에 세 아이의 성적을 과목별로 정리한 엘레노어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생각보다 좋고, 생각보다 나빴다.
물론 생각보다 좋은 쪽은 데미안과 시에나, 생각보다 나쁜 쪽은 루카스였다.
<1교시 제국어 영역>
데미안: 90점(매우 우수)
시에나: 85점(매우 우수, 문법 파트 실수)
루카스: 45점(……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데미안과 시에나의 제국어 점수는 무척 높았다. 변별력을 갖추기 위해 심어 놓은 고난도 문제에서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볼 수 있었다.
초대장을 읽을 때 이미 예견한 일이기는 했다. 루카스의 제국어 실력은 뭐랄까. 참 자유분방했다.
“괜찮아. 뭐 못하는 과목이 있을 수도 있지.”
글을 읽을 줄 안다면 최악은 아니야!
작게 중얼거린 엘레노어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음 페이지를 펼쳐 들었다.
이번에는 수리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