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와…….”
떨떠름한 마음으로 따라나선 것이기는 하지만 황후궁의 안뜰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아름다웠다. 어둑한 저녁 하늘을 수놓은 등불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들어서자마자 신선한 꽃향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고, 저녁 바람에 나뭇잎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름답지요?”
“네, 무척 아름다워요.”
“환한 대낮에는 또 다른 멋이 있답니다.”
황후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싱긋 미소 지었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 부인을 위해 직접 꾸미신 곳이랍니다. 그래서인지, 정원 곳곳에서 만든 사람의 애정이 느껴져요.”
버드나무 아래 작은 벤치가 놓여 있었다. 황후가 손짓해 앉을 것을 권했다.
“이곳에는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들어올 수 없지요. 황비라 해도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어요.”
“그런 곳에 초대받게 되어 영광이에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은 엘레노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두 번의 인생을 살면서 본 풍경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으니까.
특별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는 곳. 황실 사람이라 해도 황제와 황후를 제외하면 멋대로 드나들 수 없는 장소.
그런 곳에 왜 그녀가 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엘레노어를 왜 불러내었는지 궁금하지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다는 듯, 황후가 웃었다.
엘레노어는 얌전히 속눈썹을 내리깔며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
“궁금해서 와 보았다 했던 말은 진심이었어요. 사실 요즘 영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장난기가 섞인 황후의 말에 엘레노어가 뺨을 붉혔다.
“발렌타인 공작, 블레이크 소후작. 두 사람의 부모들과 깊은 연이 있다 보니 더 관심이 갔어요. 특히 카이델은 내게는 조카 같은 아이라.”
엘레노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 발렌타인 공작 부인과 황후가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은 엘레노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내 아드님과 루카스도 영애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더군요. 좀 놀랐어요. 이즈멜은 겉보기에는 속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을 함부로 곁에 두지 않는 아이거든요. 여자라면 더더욱.”
“전하께서는 현명하신 분이세요. 유쾌하시고요.”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눈치 빠르게 치켜세우자 황후가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영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부탁이라면……?”
“루카스, 그 애가 아카데미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엘레노어가 잠시 경계를 늦춘 사이, 황후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차라도 마시던 중이었다면 입안의 차를 뿜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레노어도 알고 있겠지만, 루카스는 내 배로 낳은 자식이 아니에요. 재작년 작고한 황비의 아들이죠.”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황후가 그 이야기를 직접 꺼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미워하지는 않아요. 루카스는 귀여운 아이죠. 조금 가엽기도 하고요. 나는 내 나름대로 그 아이를 아껴요.”
살랑 불어온 바람에 버들잎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침묵을 메웠다. 처음 본 사이에 나누기에는 지나치게 내밀한 이야기였다. 엘레노어는 당황과 긴장이 드러나지 않게 갈무리하며 담담한 눈으로 황후를 마주 보았다.
‘쫄지 마. 결국 이것도 학부모 상담이야.’
이미 수없이 해본 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학부모들이 자녀 문제 이외의 개인적인 일들을 털어놓는 일이야 늘 겪던 일이었다. 어느 정도 강사로 잡고 나서부터는 웬만한 이야기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있고, 그 가족들의 개수만큼 다양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엘레노어만큼 잘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는 잘 알지만, 엘레노어에게는 솔직하게 말할게요.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이즈멜이에요. 그래서 나는 루카스, 그 아이를 마냥 너그러운 시선으로 볼 수만은 없어요. 날 이기적이라 판단하더라도 이해해요.”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어요. 제가 어찌…….”
엘레노어가 손사래를 치자 황후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어쩐지 조금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루카스가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내가 가끔은 나도 경멸스러운걸요. 그 애가 이즈멜을 잘 따른다는 것도 알고, 착하고 욕심 없는 아이라는 것도 알지만…….”
황후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응시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황실은 그런 곳이에요. 루카스가 황궁에 있는 한 그 애는 이즈멜에게 위험 요소가 돼요. 나는 루카스가 가능한 한 황궁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해요.”
그제야 황후의 저의를 파악한 엘레노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황자님이 아카데미로 진학하기를 원하시는 거군요.”
“그래요. 적어도 그 몇 년 동안 이즈멜은 이곳에서 제 기반을 더 단단히 다질 수 있을 테니까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황후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루카스가 학업에 관심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나를 기껍게 했어요. 하지만 그 사실이 아카데미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걸림돌이 되더군요. 좀 우스운 일이지만…….”
황후가 자조하듯 쓰게 웃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경멸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나는 엘레노어가 루카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루카스도 그대를 좋아하고, 나도 그대에게 신뢰가 가니…….”
엘레노어와 황후의 시선이 공중에서 만났다.
엘레노어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황후가 할 말을 빤히 예상하면서도 새삼 긴장이 되었다.
“엘레노어, 내가 그대를 믿고 이 일을 부탁해도 괜찮겠어요?”
***
망했다. 다 망해 버렸다.
황후가 제 밑바닥까지 드러내며 부탁한 일을 거절할 배짱이 있을 리가. 엘레노어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황후는 감사와 신뢰의 표시로 황궁의 어떤 곳이든 마음껏 출입할 수 있는 허가 패를 내어주었다.
제국에서 딱 다섯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황후를 뒷배로 출셋길에 올라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것 나는 필요 없는데…….”
벨리움을 상징하는 앨버트로스 문양이 조각된 나무패를 만지작거리던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욕심이라고는 없었다. 물론 아주 조금은 있었지만, 상식적인 선을 벗어나지 않은 아주 귀엽고 양심적인 욕심이었다.
이왕 부잣집 딸로 태어난 거, 게으르고 안락하게 일평생 살아 보겠다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사실 웬만한 귀족 영애들은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부터가 전생의 일개미 근성을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일 거다.
“돈도 써 본 놈이 잘 쓰고, 노는 것도 놀아 본 놈이 잘 논다더니.”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도 있는 법인데, 엘레노어에게는 평생 공부하고 일하고 호구 잡혀 착취당한 기억밖에 없었다. 생각할수록 억울한 일이었다. 전생의 일개미는 환생해도 일개미란 말인가.
익숙하게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뒤적거리던 엘레노어가 투덜거렸다.
“흥, 나도 마음만 먹으면 아주 방탕하고 게으르게 살 수 있어.”
아직 마음을 먹지 않았을 뿐.
따뜻한 섬에서 미남만을 동서남북으로 거느리고 이렇고 이런 일, 저렇고 저런 일을 하며 끝내주는 하루를 보낼 테다. 언젠가는 반드시.
하지만 당분간은 또 일개미 생활을 이어 나가게 생겼다. 당장 다음 주부터 루카스와 데미안, 시에나의 수업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엘레노어는 황후에게 시에나와 데미안도 함께 수업할 수 있게 해달라 요청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마음이라도 편해지는 것이 남는 장사 같았기 때문이다.
“1년도 안 되는 시간이잖아. 겨울에 시험이 있으니까.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 노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어.”
게으르고 방탕한 미래를 착실하게 설계하면서도, 엘레노어의 눈은 책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첫 수업 시간에 치를 진단 평가 문제를 내기 위해서였다.
“컴퓨터도, 프린터도 없다니. 끔찍한 일이야.”
겨우 열 문제쯤 만들었는데도 손이 저릿해 왔다.
이 일을 한동안 반복해야 한다니, 끔찍했다. 이곳에는 참고자료로 쓸 만한 마땅한 문제집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품이 배로 들었다. 드와이트를 가르칠 때는 이렇게 정성을 쏟지 않았지만, 수업료를 받는 이상 엘레노어는 학생들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책을 뒤지며 문제를 내고 있으니 묘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펜촉 끝이 종이와 만나 사각거리는 소리도, 책장이 팔랑 넘어가는 소리도, 은은한 종이 냄새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엘레노어는 익숙하게 책에 밑줄을 긋고, 별표를 치고, 중간중간 설명을 덧붙였다. 집중할수록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다했다.”
과목당 스무 문제. 많은 양은 아니지만 열댓 권도 넘는 책을 넘나들고 있자니 진이 빠졌다.
밝았던 창밖에는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언제 다녀갔는지 하녀가 벽 등을 켜둔 것이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 않지만, 오랜만에 느낀 성취감이었다.
“옛말 틀린 것 하나 없어.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니까.”
엘레노어는 그런 스스로에 대해 희미한 자괴감을 느끼며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때 책상 구석에 대충 던져둔 루카스의 초대장이 눈에 들어왔다.
「앨래노어 애버랫 영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썼을 루카스의 동그란 뒤통수가 보이는 것 같았다.
픽 웃은 엘레노어가 그것을 잘 정리해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루카스가 황궁에 있는 한 그 애는 이즈멜에게 위험 요소가 돼요.’
그러자 어제 황후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엘레노어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2황자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황태자에게 견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본인이 욕심을 내지 않더라도, 황태자와 뜻을 달리하는 무리에게는 황태자를 대체할 수 있는 패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제 배 아파 낳은 아이와 남편의 후궁이 낳은 아이를 똑같이 사랑할 수 없는 것 역시 엘레노어는 이해했다.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했다면, 그쪽을 더 의심했을 것이다.
다 이해는 하는데…….
“왜 황자님께 못할 짓을 하는 기분일까.”
엘레노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카데미에 진학하는 것 자체는 루카스에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인맥을 넓히기에도 적격이었다. 성인이 되면 작위와 봉토를 받아 궁을 떠나게 될 테니, 그때에도 아카데미에서 보낸 시간은 좋은 자산이 되어 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탁한 이가 황후이고, 그 이유가 루카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장난기가 철철 흐르는 소년의 말간 얼굴에 악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형님, 형님 하며 이즈멜을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애정과 동경, 자부심이 가득했다.
루카스를 떠올리자 모래를 삼킨 듯 입안이 텁텁했다.
“……신경 쓰지 말자. 난 그냥 과외 선생일 뿐이고, 내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돼.”
잡념을 떨치는 데는 단순 노동만 한 것이 없지.
가볍게 뺨을 툭툭 두드린 엘레노어가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 이제는 시험지를 3장씩 베낄 차례였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엘레노어의 방 불은 꺼지지 않았다.
바야흐로 일개미로의 완벽한 복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