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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2화 (12/168)

12화

“야, 방금 봤어?”

루카스가 시에나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봤어요.”

시에나가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데미안, 너는?”

루카스의 물음에 데미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뭔가 이상하지.”

“방금은 확실히 이상했죠.”

“누가 음식을 저렇게 먹여 줘.”

“아기도 아니고요.”

“두 손도 멀쩡한데.”

시종일관 대립하던 루카스와 시에나가 처음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내내 지루한 얼굴로 앉아 있던 데미안의 눈빛에도 생기가 돌았다.

루카스가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속삭였다.

“연인이면 모를까.”

합. 세 아이가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은 셋 다 연인의 ‘연’ 자에도 괜히 부끄럽고 간지러운 나이였다.

다음 순간 루카스와 시에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럼, 우리 삼촌은……?”

“우리 형님은……?”

데미안은 말없이 뺨을 약간 붉혔다. 시에나의 눈에는 꼭 승자의 여유처럼 보이는 표정이었다. 데미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얄밉게 느껴졌다.

“일단 하나는 짚고 가요. 황태자 전하께서는 아직 제대로 끼지도 않으셨어요.”

시에나가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으며 새침하게 말했다. 그러자 루카스가 곧바로 발끈하며 따져 물었다.

“네가 우리 형님에 대해 뭘 아는데?”

“흥, 여자의 감이라는 게 있다고요.”

“여자 같은 소리 하네. 딸기만 한 게.”

루카스가 포크로 딸기를 쿡, 눌러 찍으며 말했다. 시에나가 코웃음을 쳤다.

“저하께서 저보다 키가 작다는 건 알고 말씀하시는 거죠?”

“무, 무슨 소리야!”

시에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루카스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실제로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차이로 시에나가 루카스보다 조금 더 컸다.

그 나이 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하필 그 상대가 얄미운 시에나였기에 루카스는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런 루카스를 힐끗 곁눈질한 시에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유치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빤히 쓰여 있었다.

“그래요. 저하께서 더 크신 거로 해요. 어차피 곧 그렇게 되실 거고, 제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찻잔에 우유를 쪼록, 따른 뒤 각설탕을 퐁당퐁당 빠뜨린 시에나가 우아하게 티스푼을 휘저으며 말했다.

“저는 저하와 당분간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요.”

“협력 관계?”

“힘을 합치자고요.”

시에나가 통통한 다리를 탁, 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한 어른들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전, 곧잘 이렇게 다리를 꼬곤 했다.

시에나가 자못 엄숙한 얼굴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저는 선생님이 저희 삼촌과 결혼하셨으면 좋겠거든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켜가며 집중했던 루카스가 김이 샜다는 듯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런 거라면 싫어. 나도 영애가 꽤 마음에 들었거든.”

“알아요. 그러니 ‘당분간’만 서로 협력하자는 거예요.”

시에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공동의 적을 떨어뜨려 놓을 때까지만.”

공동의 적, 그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힘이 있었다.

두 아이의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듯 카이델에게로 향했다.

카이델은 여전히 엘레노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만 움찔거리는 입매, 반쯤 허물어진 눈가는 그녀를 향한 호감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얼굴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든 그녀는 카이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삼촌은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둘이 오붓하게 데이트도 했다길래 내심 안심하고 있었는데!

시에나가 삼촌 아드리안을 힘껏 노려보았다. 야속하게도 황태자와 아드리안은 중요하지도 않은 정치 이야기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뭐가 중요한지를 모른다니까.”

이윽고 루카스와 시에나의 싸늘한 시선이 데미안에게로 향했다. 데미안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데미안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지만, 당분간 너희 형제는 나의 적이 될 것 같아.”

“나도!”

시에나의 말에 루카스가 동의했다. 눈만 마주치면 서로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던 두 아이는 어느새 죽이 잘 맞는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임시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지만…….”

데미안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라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데미안은 제가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입을 합 다물었다.

혼란스러운 데미안과는 별개로, 시에나와 루카스 역시 퍽 진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까 보셨다시피 선생님의 남편 후보로 지금 제일 유력한 건 공작님이에요. 솔직히…… 객관적으로 봐도 무척 근사하시잖아요.”

시에나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솔직히 시력이 정상적인 여자라면 다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여덟 살 인생,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지켜본 남자 중에 외모만 따진다면 발렌타인 공작이 으뜸이었다.

‘역시 선생님은 미적 감각도 탁월하셨던 거야.’

결혼 상대를 선택할 때 얼굴은 무척 중요하다. 시에나가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절망하기는 일렀다. 이즈멜과 아드리안, 나머지 두 남자도 부족함 없는 외모의 소유자들이었으니까.

게다가 세상에는 ‘취향’이라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했다.

시에나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분석한 결과, 카이델은 잘생기기는 했지만 섬세함과 다정함, 적극성에서는 아드리안보다 뒤떨어졌다.

사실 그 부분의 최강자는 이즈멜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직 그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미리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건 우리 형님도 그래.”

“알아요. 그건 우리 삼촌도 마찬가지고요.”

루카스는 시에나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었다. 그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계획인데?”

“아는 게 힘이라는 말, 들어 보셨죠?”

“당연히 들어 봤지. 누구를 무시하는 거야.”

루카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시라뇨. 그건 저하의 자격지심이세요. 우리는 같은 편이잖아요. 잊으셨어요?”

“……알았으니 계속 말해 봐.”

루카스는 자격지심이라는 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자격’을 얻는다는 건 좋은 말이니까, ‘자격지심’이라는 것도 나쁜 말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정보가 필요해요. 선생님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시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뜻이죠. 그래야 황태자님이나 저희 삼촌이 선생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

“그 정보를 우리끼리는 공유하되, 발렌타인 형제에게는 비밀로 하자는 거예요.”

시에나의 말에 루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분홍 머리 너, 이런 야비한 쪽으로는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는구나?”

“야비하다는 말은 약간 거슬리지만,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머리는 잘 굴러가는 쪽이 나으니까요.”

시에나가 선심을 쓰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끼리는 각자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고, 필요할 때는 서로 돕기로 해요.”

“좋아. 대신 발렌타인 형제의 계획은 힘을 합쳐 방해하자는 말이지?”

“저하께서도 이렇게 치사한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하시네요.”

“그럼.”

루카스는 머리가 비상하다는 말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지만, 시에나가 다시 봤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으므로 칭찬이겠거니 받아들였다.

“상황이 변할 때까지, 잘 부탁드려요.”

“좋아. 동의해.”

두 아이가 테이블 아래로 자그마한 손을 꼭 붙잡았다. 동맹 성립이었다.

***

“데미안, 얼굴이 조금 창백한데? 무슨 일 있어?”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쩐지 표정이 약간 불편해 보였다. 잠시 멈칫하던 데미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아?”

“…….”

데미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까와는 무언가 좀 달랐다. 카이델에게 데미안을 신경 쓰라 눈짓하자 그가 제 동생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데미안이 바짝 긴장했다.

카이델은 데미안이 정말 괜찮은 게 맞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샅샅이 훑어내렸다. 그 모습이 꼭 목표물을 찾는 군견 같아서, 엘레노어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저렇게 딱딱한 얼굴, 건조한 시선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뜯어보는데 어떻게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 엘레노어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시에나와 루카스에게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두 아이는 아직도 무언가를 속닥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정들지…….’

엘레노어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왜 큰소리가 안 나지? 사사건건 부딪치고 틈만 나면 언성을 높이던 둘 아니었나?’

엘레노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둘은 언성을 높이기는커녕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루카스와 시에나는 나이 외의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완벽한 상극이었다. 그런 둘이 갑자기 저렇게 친해지는 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의아하기는 했지만, 원래 저 나이의 아이들은 이해 못 할 일들을 종종 하곤 했으므로 엘레노어는 곧 관심을 거두었다.

“뭐가 되었든 잘 지내면 좋지.”

“뭐가?”

그때 이즈멜과 대화를 끝낸 아드리안이 싱긋 웃으며 물어왔다.

“루카스 님이랑 시에나 말이야. 둘이 꽤 다정해 보여서.”

“그러고 보니 그러네. 싸우다 정들었나?”

“겨우 두 번째 만남인데, 애들끼리는 역시 빨리 친해지나 봐.”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멀리서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하나가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니?”

이즈멜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황태자 전하의 어머니라면…….’

아드리안과 카이델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란 엘레노어가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키자, 데미안과 루카스, 시에나도 눈치껏 의자에서 내려와 섰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어머, 그렇게까지 어려워할 필요 없어요. 초대도 없이 방문한 나부터가 예의를 차리지 않았는걸.”

깍듯하게 예를 표하자 황후가 부드럽게 만류했다. 이즈멜이 황후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셨어요, 어머니.”

“궁금해서 한번 와 보았단다. 나도 듣는 귀가 있으니. 발렌타인 공, 오랜만이네요.”

“예,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

카이델이 허리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블레이크 소후작도 오랜만이야. 모친께서는 잘 계시지요? 요 몇 달 사교 행사에 걸음 하지 않았더니 얼굴 볼 일이 없었네요.”

“예, 평안하십니다.”

황후의 시선이 긴장한 엘레노어의 얼굴로 향했다. 황후는 눈가에 희미하게 진 주름마저 우아하게 느껴지는 미인이었다. 엘레노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에버렛 영애지요?”

“예, 폐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레노어 에버렛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대할 필요 없다니까요. 난 무서운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어려운걸요……. 무섭고요.

엘레노어가 속마음을 숨기며 생긋 웃어 보였다.

“참하고 곱기도 하지.”

며느리 삼고 싶게.

긴장한 엘레노어는 황후가 작게 속삭인 말을 다행히도 듣지 못했다.

“엘레노어라 불러도 괜찮겠지요?”

“물론입니다, 폐하.”

“식사는 끝난 것 같은데, 괜찮으면 떠나기 전에 산책이나 함께하는 게 어떤가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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