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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1화 (11/168)

11화

황궁의 인장이 찍힌 고급스러운 초대장을 무심하게 툭, 뜯은 엘레노어가 짧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앨래노어 애버랫 영애」

황자님, 저는 ‘앨래노어 애버랫’이 아니라 ‘엘레노어 에버렛’이에요.

첫 줄부터 잘못된 철자가 눈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 내려간 정성은 일단 꽤 귀여웠다. 엘레노어가 피식 웃으며 다음 줄을 읽어 내려갔다.

「안녕, 나는 황자 루카스다. 그동안 잘 지냈길 바래.」

‘바래’가 아니라 ‘바라’라고 쓰셔야지요, 황자님.

「내 초대를 턱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곳바로 보내지 않아서 미안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턱 빠지게’가 아니라 ‘목 빠지게.’ ‘곳바로’가 아니라 ‘곧바로’요. 아, 그리고 저는 기다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편지가 너무 일찍 도착해 놀랐는걸요.

「그래도 영애에게 재일 먼저 쓰는 거야. 발렌타인 공작에게도 아직 쓰지 않았어.」

‘재일’이 아니고 ‘제일’이요. 공작님보다 절 먼저 신경 써 주신 너그러움은 좀 귀여우신 것도 같네요.

「나는 다 좋은데 이즈멜 형님은 저녁에만 시간이 된대. 그러니 이해해 줘. 야외에서 식사할 기회를 놓쳐 아쉽다면 다음에 점심도 먹자.」

아쉽지 않아요. 정말로요.

「그때 봐, 안녕.

루카스 씀.

추신. 그 버르장머리 없는 분홍 머리도 초대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들어.」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루카스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황족과의 만찬 자리에서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며칠은 짧았다. 물론 그 고민은 엘레노어보다는 하녀들과 백작 부인의 몫이었다.

“그냥 평범한 저녁 식사 자리예요, 어머니. 그렇게까지 제 드레스에 열 올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다들 제가 무슨 색 드레스를 입었는지도 모르실걸요.”

지친 엘레노어의 항변에도 백작 부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네 말대로 평범한 식사 자리래도 거기 모이는 사람들은 조금도 평범하지 않잖니.”

“마님 말씀이 맞아요, 아가씨. 공작 각하에 블레이크가 도련님, 황태자 전하에 황자 저하까지 있으시잖아요.”

“그 자리에 낄 수만 있다면 제 쓸개라도 내어놓겠다고 덤벼드는 영애들이 수천 명은 될 거다.”

……그렇다는데 다들 어디 계세요. 쓸개는 제가 드릴 테니 저 대신 거기 좀 가 주세요.

“그 셋은 그야말로 제국 최고의 신랑감들 아니니.”

“어머니!”

“안다, 알아. 그런 거 아니라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

엘레노어가 발끈하자 백작 부인이 손을 휘휘 내저어 그녀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나도 내 나름의 로망이 있지 않겠니? 남편이야 이미 글렀지만, 그 정도로 근사한 사위를 두고 사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상상해 볼 수 있잖아.”

백작 부인의 목소리에 은근한 장난기가 깃들었다. 내내 질색하던 엘레노어도 이번에는 그냥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께서 들으면 서운하시겠어요.”

“물론 나는 네 아버지를 사랑해. 젊었을 땐 네 아버지도 제법 귀여웠단다. 그래도 그 셋은 정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지?”

그리고 이건 여자들끼리의 비밀이야, 엘레노어. 알겠지? 약속할 수 있지?

뒤늦게 불안해졌는지 몇 번이고 약속을 받아낸 백작 부인이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마지막으로 매만져 주었다.

“예쁘다, 우리 딸.”

엘레노어는 얌전한 디자인의 암녹색 드레스를 걸치고 자그마한 페리도트 귀걸이를 착용했다. 튀지 않으면서도 엘레노어의 흰 피부와 초록색 눈동자를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옷이었다.

“전부 너한테서 눈을 못 뗄걸. 물론 그 신사분들이 제대로 된 눈을 가지고 계신다면 말이야.”

***

결과적으로 백작 부인의 다정한 말은 현실이 되었다. 다만, 조금 많이 불편한 방식으로.

“선생님, 이것도 드셔 보세요.”

“하, 네가 준비한 것도 아니면서 생색은.”

“저번에도 느꼈지만, 저하께서는 참 말씀이 많으시네요.”

시에나와 루카스는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듯 둘만의 세계에 갇힌 느낌이었다. 데미안은 늘 그렇듯 얌전하게 앉아 제 앞의 접시를 깨작깨작 비워내고 있었다.

어른들의 세계는 좀 다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반듯하게 앉아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는 엘레노어의 입꼬리에 자꾸만 잔경련이 일었다.

“엘렌, 테이블이 조금 높아 보이는데 고기 썰어 줄까?”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제안했다.

“마침 내가 다 썰어 두었으니 바꿔 주면 될 것 같군.”

엘레노어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카이델이 툭 끼어들었다. 우아하게 제 것과 엘레노어의 접시를 바꾸어 놓은 카이델이 무뚝뚝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천만에.”

“공작님의 칼솜씨는 무척…… 인상적이네요.”

타고난 무인은 커트러리마저 완벽하게 사용하는 것일까. 카이델이 자른 스테이크는 절단면부터가 남달랐다. 오와 열을 가지런히 맞춘 고기 조각들은 전부 일정한 크기와 모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엘레노어는 약간 질린 눈으로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던 이즈멜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 두 사람, 과도한 친절은 부담이 돼. 그렇게 뭘 몰라서야…….”

이 자리에서 마음을 제일 편하게 해 주는 이가 황태자라니, 놀라운 일이었다. 잘생긴 사람이 센스까지 겸비할 수 있나. 하늘은 불공평한 것이 확실하다.

“오는 길은 어렵지 않았고?”

“네, 황궁 정원이 워낙 넓고 아름다워 즐겁게 구경하며 왔어요.”

어째서인지 가만히 있던 카이델의 어깨가 가늘게 움찔했다.

“그랬다니 다행이군. 사실 나는 다음 달 중으로 생각했었는데, 루카스가 그날 무척 즐거웠는지 날 닦달하더라고.”

“정말요? 기쁘네요.”

“또래 친구가 생겨 즐거운 모양이야.”

이즈멜이 여전히 티격태격하고 있는 루카스와 시에나를 눈짓하며 작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내가 얼마 전에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 카이델, 자네도 들었나?”

새로운 화제를 꺼내든 이즈멜의 얼굴에 설핏 짓궂은 미소가 스쳤다. 카이델이 무뚝뚝한 얼굴로 황태자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 말입니까.”

“소후작과 에버렛 영애가 무척 시끄러운 데이트를 즐기셨다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대화의 불똥이 튀었다. 카이델과 데미안의 시선이 엘레노어를 향했다. 엘레노어는 조금 전까지 황태자를 향해 내린 긍정적인 평가를 재검토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 저녁 식사를 함께했습니다.”

아드리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스테이크를 신중히 썰었다.

“그렇긴 하지만 데이트는 아니었어요! 오해가 있었나 봐요.”

엘레노어가 변명하듯 툭 덧붙였다.

“그럼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와인에 거나하게 취하셨다는 건?”

순간 엘레노어가 멈칫했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건, 애석하게도 어느 정도 근거는 있는 말이네요.”

“노동의 애환에 대해 큰 소리로 설파하셨다는 내용은?”

도대체 어디까지 들은 거야! 엘레노어, 너는 또 무슨 헛소리를 고래고래 늘어놓았고!

밀려오는 민망함에 엘레노어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숙녀의 실수를 그렇게 꼬집어 부끄럽게 하시는 건 벨리움의 신사답지 않으세요, 전하.”

민망한 상황을 제일 우아하게 타개하는 방법은 역시 뻔뻔함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리라. 도도하게 턱을 약간 치켜든 엘레노어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눈과 귀는 물론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마땅하지만, 그걸 저처럼 사소하고 하찮은 이에게 쓰시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국을 향한 지극한 충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랍니다.”

엘레노어를 보는 이즈멜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영애의 충심은 잘 알았어. 에버렛 쌍둥이 남매가 나란히 충언을 아끼지 않으니 무척이나 감격스러워.”

엘레노어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예를 표했다.

“하지만 전부 동의할 수는 없네. 영애는 내게 사소하지도 않고, 하찮지도 않으니 말이야.”

요즘 내가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보는 상대인걸. 이즈멜은 뒷말을 속으로 삼키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도 그대의 프라이버시를 좀 더 존중해 보도록 할게.”

“감사합니다, 전하.”

이후의 식사는 의외로 꽤 순조롭게 흘러갔다. 중간중간 루카스와 시에나가 서로를 향해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데미안에게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디저트 코스가 다가와 있었다.

아드리안과 이즈멜이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엘레노어는 넓은 테이블 가득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를 눈으로 음미했다.

“어떤 것.”

거리가 약간 멀지 않나 생각하던 찰나, 카이델이 무뚝뚝하게 물어왔다.

“라즈베리 타르트요. 저기 있는 거…….”

손끝으로 살짝 가리키자 카이델이 솜씨 좋게 한 조각을 덜어 엘레노어의 앞에 놓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참 친절하시네요.”

별것 아니라는 듯, 카이델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연한 분홍빛이 도는 크림을 살짝 찍어 맛본 엘레노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맛이다. 역시 황실의 디저트는 시중에 파는 것과는 달라도 뭔가 달랐다.

‘아, 이런 게 권력의 맛인가.’

맛을 탐미하는 데 골몰하던 엘레노어는 문득 제게 진득하게 향해 있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카이델이었다.

엘레노어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꼭 얼어붙은 호수 같다고 생각했다. 무심코 그와 눈을 마주치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졌다.

상식적인 미의 기준을 넘어선 존재를 마주하면 잠깐의 뇌 정지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엘레노어는 그것을 공작을 보며 깨달았다.

그래서였다. 말도 안 되게 멍청한 짓을 저지른 것은.

“……한 입 드셔 보실래요?”

넋을 놓은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제 포크로 타르트 조각을 찍어 공작을 향해 내밀었다.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조금도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그러지.”

잠시 흠칫한 카이델은 망설임 없이 몸을 기울여 타르트를 받아먹었다. 그의 입술에 어울리지 않는 분홍빛 크림이 조금 묻어났다.

“맛있네.”

혀로 제 입술에 묻은 크림을 핥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엘레노어는 그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지고 그의 뺨에 긴 보조개가 잠시 파였다가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세상에, 내가 방금 뭘 본 거야.’

엘레노어는 그 순간을 동영상으로 남기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은 좌절을 느꼈다. 만약 모두가 카이델의 그 미소를 보았다면 인류는 조금 더 행복해지고 세상은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며 자신이 방금 저지른 일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1. 발렌타인 공작에게

2. 쓰던 포크로

3. 먹던 라즈베리 타르트를

4. 손수 먹여 주었다.

겨우 한 문장 안에 지적할 포인트가 네 가지나 있었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이즈멜과 아드리안의 얼굴을 재빨리 살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엘레노어의 실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왜 그런 얼굴이지?”

그런 엘레노어를 보던 카이델이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물었다.

‘아니, 저 인간은 애초부터 그걸 왜 또 넙죽 받아먹은 거람. 나는 미모에 잠시 정신을 놓았다지만…….’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엘레노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엘레노어의 뺨이 붉어진 것을 본 카이델이 설핏 웃었다.

“마저 먹어.”

“네에…….”

그때까지 엘레노어는 알지 못했다. 자그마한 눈동자 여섯 개가 두 사람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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