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예상치 못한 아드리안의 칭찬에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쓱함에 그녀는 잔에 남은 와인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 취해.”
아드리안은 엘레노어의 잔을 다시 채워 주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모르는 소리 마. 원래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야.”
“방금 그 말 우리 아버지 같았어…….”
엘레노어가 웃음을 터뜨리며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맛있는 음식, 비싼 와인, 친한 친구. 엘레노어는 잔뜩 들뜨고 말았다.
병이 비어갈수록 엘레노어의 뺨은 점점 더 붉게 달아올랐다. 아드리안의 뺨에도 취기의 흔적이 발그레 물들기 시작했을 때, 엘레노어의 본격적인 주사가 시작되었다.
“리안 네가, 노동자의 설움을 알어?”
눈이 반쯤 풀린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향해 삿대질하며 말했다. 혀가 잔뜩 꼬인 채였다.
“모르지. 그런데 너도 모르잖아, 엘렌. 내내 집에만 있었으면서.”
“나는! 알아.”
엘레노어가 제 가슴을 퍽 내리치며 대답했다.
“나는! 다아 알아.”
“응, 넌 똑똑하니까.”
아드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거나하게 취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척 하고 턱을 괸 엘레노어가 중얼중얼 푸념을 시작했다.
“너 자정까지 학부모 전화 받아 봐써? 응?”
“전화가 뭔데?”
“그런 게 이써……. 넌 몰라도 돼.”
“알았어.”
아드리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려 하자 아드리안이 재빨리 제 손을 받쳐 막아냈다.
“내가아 신도 아니고! 아드님이 공부에 재능이 없는걸…….”
“그렇지. 공부에 재능이 없을 수 있지. 루카스 황자님처럼.”
아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불충한 말을 내뱉었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엘레노어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따지냐구우…….”
“이상한 사람들이네.”
“맞아. 이상한 사람들이지. 문제는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거야.”
엘레노어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갑자기 전생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가며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 그 얼마나 한 많은 나날이었던가.
“나, 정말 열심히 살았다? 어떻게든 가난이라는 꼬리표 한번 떼보겠다고 아등바등 애썼단 말이야. 잠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고오.”
엘레노어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아드리안이 멈칫했다.
“엘렌, 백작가가 언제부터 가난했어?”
그리고 너는 자정이면 자고 정오에 가까워서야 일어났잖아.
아드리안의 논리적인 반박을 사뿐히 무시한 엘레노어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흥, 곱게 자란 너야 가난의 쓴맛을 모르겠지.”
“너도 모르잖아.”
“금수저 물고 태어난 너는 감사한 줄 알아야 해, 리안.”
“금수저가 뭔데?”
“금으로 만든 스푼……? 그런 게 있어. 도련님처럼 복잡하게 따지고 들지 마.”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인생이라는 게 얼마나 허무한지 넌 모를 거야.”
“아까부터 뭘 자꾸 모른대.”
“리안, 네가 몇 살이지?”
“너랑 같은 나이지.”
“어리다, 어려. 제일 좋을 때지.”
엘레노어가 끌끌 혀를 차며 귀엽다는 듯 아드리안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
‘아, 얘가 정말 제대로 취했구나.’
체념한 아드리안은 그녀의 손에 제 머리를 얌전히 맡겼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스스럼없는 모습은 처음이라 신선했다.
친하지만 은근히 속을 전부 알기는 어려운 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엘레노어에게서는 아무런 벽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그래서 한번 편하게 살아 보고 싶었다 이거야. 맘 편히 누리기만 하면서……. 그 정도로 바쁘게 살았으면 이번에는 게으르게도 살아 봐야 하는 거잖아.”
“그래서 누구를 가르치는 일도 싫은 거고?”
엘레노어의 말을 곱씹던 아드리안이 천천히 되물었다.
“싫은 건 아냐. 자신이 없는 거지.”
차가운 손등에 열 오른 이마를 비비적거리던 엘레노어가 볼을 부풀렸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귀엽다는 건 잘 알겠다.’
그런 엘레노어를 빤히 지켜보던 아드리안의 입매가 느른하게 풀어졌다. 가끔은 이렇게 단둘이 술잔을 부딪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단둘이. 늘 중요한 건 그거였다. 단둘이.
“내가 가르치는 건 고작 분사구문, 관계대명사 그런 거야. 빈칸 채우기, 연결사 넣기…… 뭐 그런 거.”
“엘렌, 미안한데 아까부터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
“지극히 정상이야. 그런 얼굴 안 해도 돼.”
멍해진 아드리안을 보던 엘레노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 내어 웃자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오랜만의 음주에 지나치게 들떴었나 보다.
옛날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으니, 꼭 에버렛 백작 영애가 아니라 고여진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엘레노어는 지금의 제 인생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 가끔은 구질구질할 만큼 치열하게 살았던 그때 생각이 났다.
매달 꼬박꼬박 부치는 생활비를 제하면 접점이 없어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 어느 순간 연락조차 주고받지 않았던 친구들, ‘쌤’하며 따르던 학생들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쌤, 저 집에 가기 싫어요.’
‘다들 일찍 가고 싶어서 난리인데 너는 왜?’
‘그냥요. 저는 학원에 있을 때가 제일 마음이 편해요.’
흐려진 정신 틈으로 문득 과거의 한순간이 툭 떠올랐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 강박적으로 박박 지워대던 기억이었다.
‘쌤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싱겁긴.’
엘레노어의 속눈썹이 파르르 잘게 떨렸다. 재빨리 감정을 갈무리한 엘레노어가 무심한 목소리로 툭 말했다.
“누군가의 인생에 책임감을 느끼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지치는 일이거든.”
“……엘렌, 너 울어?”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안 울어.
작게 중얼거린 엘레노어는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 이후로는, 암전이었다.
***
“엘렌, 너는 중간이라는 게 없지.”
“으으……. 목말라. 물 좀 줘 봐.”
눈을 뜨자마자 끔찍한 숙취가 엘레노어를 집어삼켰다. 머리는 깨질 듯 지끈거리고, 속은 멀미하듯 울렁거렸다. 언제 느껴도 끔찍할 만큼 불쾌한 감각이었다.
‘숙취로 고생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고삐 놓고 달리다니. 인간의 실수는 끝이 없고…….’
때늦은 후회였다. 입안이 바짝 말라 목이 탔다. 드와이트가 끌끌 혀를 차며 물을 따라 건넸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어머니 아버지가 보셨으면 너는 당분간 외출 금지였을걸.”
“다행이네. 겨우 와인 한 병 마신 게 고작인데 외출 금지까지 당했으면 억울할 뻔했어.”
“술도 약하면서 왜 매번 말술인 양 구는 거야?”
드와이트가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와인이랑 안 맞아서 그래. 아니면 이 몸뚱이가 지나치게 연약하든지.”
소주는 다섯 병도 거뜬했단 말이야. 뒷말은 속으로 삼킨 엘레노어가 빈 잔을 도로 건넸다. 익숙하게 그것을 받아 든 드와이트가 침대 옆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드리안이 집까지 데려다줬지?”
“정확히 말하면 직접 업어서 침대에 내려놓아 주고 갔지.”
“세상에.”
뒤늦게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떠올리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애써 떠올리지 말자. 지나간 기억은 그냥 잊는 게 나아.’
불안한 엘레노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드와이트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그녀를 콕콕 찔러댔다.
“저번에도 이러지 않았나? 그 이후로 아드리안이 코빼기도 안 보이기에, 너한테 데여도 크게 데였나 보다 생각했었는데.”
“일 때문에 출장 갔던 거야. 머리 울리니까 제발 그 망할 입 좀 닫고 있어 봐.”
엘레노어가 으르렁거리며 베개를 집어 던졌다. 낄낄 웃으며 가볍게 받아낸 드와이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아, 황궁에서 초대장이 왔더라?”
“황궁……?”
“언뜻 보기로는 황자님이 보낸 것 같던데. 짐작 가는 거 있어?”
불행히도, 짐작 가는 게 있었다.
귀여운 황자님께서는 기어이 은혜를 원수로 갚기로 작정하신 듯했다. 숙취에 스트레스가 더해지자 정말 콱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차라리 아버지께 말씀드릴래. 내가 술을 궤짝으로 마시고 외간 남자의 어깨에 짐짝처럼 실려 왔다고 말이야. 그럼 단번에 외출금지령을 내리시겠지.”
이불을 허리께까지 확 걷어 내린 엘레노어가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드와이트는 피식 웃으며 논리적으로 그녀의 바람을 깨부수었다.
“하지만 그 외간 남자가 아버지가 사위처럼 생각하는 아드리안이라는 점에서 1차로 참작이 되고.”
“젠장.”
“황실에서 네 앞으로 초대장을 보내왔다는 사실에 2차 참작이 되겠지.”
“빌어먹을!”
제가 아는 최고로 무시무시한 욕을 내뱉은 엘레노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무엇일까.
물론 드와이트, 저놈이지만 그보다 더욱 근원적인 문제가 있지 않을까.
“드와이트, 내가 정말 많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의아함이 담긴 드와이트의 시선이 엘레노어에게 향했다.
“내가 그렇게 예쁜가?”
“미쳤어?”
“아드리안이 그러더라고. 난 내가 예쁘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너무 없다고.”
“쌍으로 제정신이 아니네…….”
드와이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드와이트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엘레노어의 중얼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큰일이야. 조용히 살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놓아주지를 않잖아.”
“이제 그냥 막 나가기로 했어? 아니면 이것도 네 무슨 전략이야?”
“정말 이러다 기사가 현실이 되는 거 아닐까. 발렌타인, 블레이크에 이어 벨리움 황실까지 내게 집착하는 거지.”
“그냥 술이 덜 깬 거구나.”
드와이트의 핀잔은 어느 순간 들리지도 않았다. 엘레노어가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지금까지는 잘나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잘나게 태어나 사는 인생도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요즘 좀 배우고 있어.”
“내가 너를 아끼기는 하지만, 솔직히 좀 재수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노어의 사고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말 학원이라도 크게 하나 차려 봐? 나는 원장실에서 차나 홀짝이고……. 드와이트 네 반질반질한 얼굴을 광고지에 커다랗게 인화해서 학부모들을 현혹하는 거지.”
말하고 보니 그리 나쁜 의견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바지사장 같은 원장 정도라면 못할 게 뭔가.
“인화가 뭔데?”
“아, 그렇지. 여긴 사진이란 게 아직 없구나. 아깝네. 네 얼굴은 선전용으로 딱 맞는데.”
“아까부터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는 거야. 엘렌, 정말 어디 아파?”
이제는 정말 걱정스러운지 드와이트가 성큼성큼 다가와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난 멀쩡해. 초대장이나 가져다줘.”
전혀 멀쩡해 보이지 않는 엘레노어를 보는 드와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곧 순순히 책상 위에 놓인 초대장을 가져다주며 툭 덧붙였다.
“여기. 글씨 보니 황자님이 직접 쓰신 것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