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날은 꼭 여름처럼 무더운 봄날이었다. 카이델은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권태감을 내리누르며 꼿꼿이 서 있었다.
“카이델, 무어라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군.”
“부친께서는 제국의 승리에 이바지하고 눈 감으신 것을 명예라 생각하셨을 겁니다. 폐하께서 이같이 친히 마음을 써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말들은 신경 쓰지 말게. 그대는 그대의 부친 이상으로 훌륭한 가주가 될 테니. 부디 정진하여 황태자의 든든한 벗이 되어 주게.”
“발렌타인은 늘 폐하의 충실한 검이요, 제국의 방패가 될 것입니다.”
선대 발렌타인 공작이 전사하고, 카이델은 갑작스럽게 공작위를 승계받았다.
황궁에서 열린 승전 연회에 참여한 카이델은 황제와 잠시 독대한 뒤 곧바로 회장을 빠져나왔다. 그에게 쏠리는 시선과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말들이 신경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저, 괜찮으시다면 휴게실까지만 부축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술을 마셨더니 조금 어지럽네요.”
“시종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아이참.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 아시면서…….”
무엇보다 은근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유혹의 손길을 뻗어오는 영애들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일찍 돌아갈 수도 없고. 답답해 미치겠군.’
아무도 없는 구석진 골목에 들어선 카이델은 크라바트를 풀어헤치고 강박적으로 끝까지 채워 올린 단추를 두어 개 끌렀다.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아, 발이며 발목이며 아파 죽겠네. 어차피 치마 때문에 보이지도 않을 텐데 구두를 꼭 신어야 하나?”
그때였다. 치맛자락을 발목이 보이도록 마구 걷어 올린 영애 하나가 성큼성큼 그가 선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조용히 나온다고 나왔는데, 뒤를 밟은 건가? 치마까지 걷어 올린 걸 보면 보통이 아닌 여자 같은데…….’
재빨리 단추를 채워 올린 카이델이 모자를 푹 눌러썼다.
“도대체 여긴 무슨 연회가 끊이지를 않아. 좋은 날엔 갓 튀긴 치킨 한 마리 배달시키고 캔맥주나 따는 게 최고인데…….”
여자는 치킨이니 캔맥주니, 카이델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친 사람인가.’
카이델의 안에서 여자에 대한 첫 평가가 내려졌다. 바짝 긴장한 그의 앞을 여자가 휙 스쳐 지났다.
그래, 스쳐 지났다. 카이델에게는 시선 한 자락 주지 않고. 그녀는 아예 그의 존재마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미친 사람 같기는 하지만, 내게는 하등 관심이 없는-적어도 아직은 그래 보이는- 사람.
카이델은 마음속에서 그녀를 향한 평가를 약간 수정했다.
“무슨 황궁 정원에 벤치 하나가 없어. 예산이 부족한 것도 아닐 거면서. 쓸데없이 넓기만 하고 실용성이라고는 없네.”
카이델의 눈썹이 움찔했다. 가만히 지켜보자니 이제는 위험한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카이델은 여자의 옆모습을 건조하게 훑었다. 겉모습만은 문제없이 멀쩡한 귀족 영애였다. 여자의 외모에 별 관심이 없는 그가 보기에도 제법 예쁜 얼굴이었다.
막 성년이 되었는지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고, 초록빛 눈동자는 총기 있게 반짝였다. 반만 묶은 곱슬곱슬한 금발은 새하얀 목덜미를 타고 부드럽게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입고 있는 분홍색 드레스는 지나치게 화려한 감이 있었지만, 여자에게는 잘 어울렸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카이델이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앗!”
쨍그랑.
등 뒤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음에 카이델이 빠르게 돌아섰다.
일곱 살쯤 된 여자아이가 새파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엌에서 먹을 것을 얻어오던 길이었는지 깨진 접시 조각 주위로 고깃덩이와 뭉개진 케이크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고급스럽게 반짝이던 분홍색 드레스 밑단은 고기에서 흘러나온 기름이며 생크림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지켜보던 카이델의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서 있어.”
“영애님 제가 자, 잘못했어요! 죄송…….”
재빠르게 쏘아붙인 여자가 제 발아래를 휘휘 둘러보았다. 저 비싼 드레스를 저렇게 망쳐놓았으니 이해는 하지만, 뒤이어 터져 나올 고성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조용히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카이델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저기요. 모자 쓰신 신사분.”
‘젠장. 좀 더 일찍 움직였어야 했는데.’
카이델은 달갑지 않은 기색을 조금도 감추지 않은 채 천천히 돌아섰다.
“저, 말입니까.”
“네. 달리 부를 만한 분도 주변에 없지 않나요?”
“그래 보이는군요.”
유감스럽게도.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 손수건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다지 죄송한 것처럼 들리지는 않지만 퍽 예의 바른 목소리로 여자가 부탁했다.
“……예, 물론.”
마찬가지로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꽤 깍듯하게 답한 카이델이 여자에게 다가가 손수건을 건넸다. 카이델에게도 곤란한 상황의 숙녀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매너 정도는 있었다.
“베풀어 주신 친절에 정말로 감사드려요.”
당연히 제 치맛자락을 닦아내리라 생각한 카이델의 예상과는 달리, 여자는 곧바로 아이의 손을 손수건으로 감싸 쥐었다.
“접시를 가지고 갈 땐 조심해야지. 유리가 깨졌을 때 함부로 움직이거나 손을 대면 안 돼. 봐, 이렇게 다치잖아. 아파?”
눈이 동그랗게 커진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여자는 이내 딱딱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지만, 돌아가면 약부터 챙겨 발라. 알았니?”
“저 때문에 드, 드레스가…….”
“망가졌지. 그래도 다행히 나한테는 이것 말고도 드레스가 몇 벌 더 있단다.”
분명 따뜻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흙 묻은 무릎을 털어 주고, 다친 곳이 없는지 이리저리 살핀 후 유리 조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다 놓는 손길만큼은 퍽 다정했다.
“덕분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서 발 뻗고 쉴 수 있으니 잘된 일인지도…….”
중얼중얼 따라붙는 말이 본심인 것 같았다. 카이델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좀 이상한 여자였다.
아이를 내려놓고 나서야 여자는 제 치마를 툭툭 털고 닦아냈다. 무신경해 보일 정도로 성의 없는 손길이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가 봐.”
“정말 그냥 보내주시는 거예요?”
아이가 우물쭈물하며 얼룩진 드레스 자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누가 보아도 도저히 연회장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상태였다.
한숨을 푹 내쉰 여자가 아이에게 휘휘 가 보라 손짓하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맘 변하기 전에 가. 10초 센다. 10, 9, 8…….”
“감사합니다!”
여자의 마음이 바뀔세라 아이가 줄행랑을 쳤다.
“아, 손수건.”
여자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제 손에 들린 손수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먼지 한 톨 묻지 않아 깨끗하던 손수건은 도저히 다시 건넬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어 있었다.
카이델이 얼른 선수를 쳤다.
“그건 굳이 돌려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물론 이것 말고 새 물건으로 돌려드릴 생각이었어요.”
“그것도 됐습니다.”
카이델이 거절하자 여자의 미간에 작게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무척 비싸고 고급스러워 보이는데요.”
“그 드레스도 비싸 보입니다만.”
“제 돈으로 산 건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입니다.”
신기한 여자였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평범한 구석이 없었다. 이성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가슴을 짓누르던 불편함이 그녀와의 대화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꽤, 즐거웠다.
“같은 걸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보내드릴게요.”
“됐습니다. 다행히 나한테는 이것 말고도 손수건이 몇 장 더 있으니까.”
카이델이 여자가 아이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뺨에 보조개가 팰 정도로 환하게 웃자 일순 주변이 조금 밝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얼굴의 개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은 순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도발적이었다. 광대에서 콧등까지 희미하게 이어진 주근깨 때문에 말괄량이 같은 인상도 들었다. 제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시니컬한 분위기도 독특했다.
“이름이 뭡니까?”
이름을 물은 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제 이름이요?”
“예. 달리 물을 만한 사람도 주변에 없지 않습니까?”
카이델은 또 한 번 그녀의 말을 인용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엘레노어요.”
엘레노어. 카이델이 입안에서 그 이름을 슬며시 굴려 보았다. 흔하다면 흔한 이름인데,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엘레노어 에버렛.”
어딘가 이상하고 조금 뻔뻔하고 심지어는 그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도 않지만, 궁금해지는 여자였다.
***
“역시 예약하기 힘든 데는 이유가 있어. 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잖아.”
아드리안이 썰어 주는 고기를 바쁘게 입안으로 가져다 나르며 엘레노어가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 맛있어!’
아드리안이 예약해 둔 레스토랑은 수도에서 최근 무척 인기를 끄는 데이트 코스였다.
프라이빗한 룸에서 오붓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어 귀족 영애와 영식들에게 무척이나 인기가 드높았다. 음식이 훌륭한 건 물론이었다.
몇 달 전에 예약을 해 둬야 겨우 올 수 있을까 말까 한 곳인데 어떻게 하루 만에 자리를 얻은 걸까.
좀 의아하기는 했지만, 뭐 그 과정이야 어떻든 좋은 건 좋은 거다. 이건 그야말로 완벽한 저녁 식사였다.
얼마나 즐거웠던지, 몇 달간 아드리안을 보지 못하면서 묘하게 서먹해졌던 관계가 순식간에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엘레노어가 메뉴판을 붙잡고 고민하자 아드리안은 ‘여기부터 여기까지’를 시전하며 후작가의 윤택한 재정을 우아하게 과시했다. 게다가 평소 엘레노어가 알코올의 ‘ㅇ’ 자 근처에만 가더라도 눈썹을 찡그리던 그가 먼저 와인 한 병을 주문해 주기도 했다.
한 잔을 쭉 들이켠 엘레노어가 웃으며 물었다.
“오늘 너, 왜 이렇게 후해?”
“그렇게 말하면 언제는 내가 너한테 인색했던 것 같잖아, 엘렌.”
“그럼 평소보다 더 후한 거로 하자. 왜 이렇게 잘해 줘? 나한테 바라는 거 있어?”
“너한테 바라는 거야 늘 있었지.”
아드리안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엘레노어는 알겠다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시에나 때문이구나?”
가니쉬로 나온 아스파라거스를 콕 찍어 입에 넣으며 엘레노어가 경쾌하게 덧붙였다.
“가끔 놀러 오는 거야 환영이야. 귀엽고 착하고. 나도 그런 딸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더라.”
“딸? 전엔 결혼하기 싫다더니.”
아드리안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했었나?
잠깐 혼자 생각한 엘레노어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야 그때는 너무 어렸으니까. 여긴 결혼을 너무 일찍들 해.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나이에…….”
“여기? 꼭 다른 곳에 살아 본 것처럼 말한다, 너. 벌써 취한 거야?”
아드리안이 웃으며 말의 오류를 지적했다. 뜨끔한 엘레노어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너는 매번 내가 술 근처에만 가도 말리더니 오늘은 왜 아무 말이 없어?”
“여기에는 네게 집적대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없으니까.”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엘레노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엘레노어가 잔을 마저 비우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도대체 누가? 아무도 나한테 관심 없어.”
“확신해?”
아드리안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엘레노어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좀 빨라.”
“엘렌, 단언컨대 그건 네 착각이야.”
피식 웃음을 터뜨린 아드리안이 잔을 향해 손을 뻗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넌 네가 예쁘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너무 없어. 그래서 불안한 건 늘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