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갑작스러운 초대에 엘레노어가 어버버 하는 사이 이즈멜의 허락이 돌아왔다.
“그럼. 당연하지.”
이즈멜은 성큼성큼 다가와 루카스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헝클어 놓았다.
“대신 사과는 해야겠지. 숙녀를 대하는 매너가 낙제점이던데, 루크.”
“저 꼬맹이가 숙녀는 무슨!”
“루카스.”
이즈멜의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그래도 제 형의 말은 잘 듣는지 루카스가 입을 삐죽이며 시에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사과.”
건성건성 무성의한 사과에 시에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분을 꾹꾹 눌러 참은 시에나가 루카스의 손끝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좋아. 화해도 했겠다, 시에나도 같이 초대하는 거지?”
이즈멜이 루카스의 어깨 위에 손을 툭 얹으며 물었다. 질문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은근한 명령이었다. 루카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루카스가 괜히 툭툭대기는 했지만, 황궁에는 정말 구경할 것들이 많아. 놀러 올 거지?”
이즈멜이 시에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가 눈꼬리를 슬쩍 휘며 미소 짓자 얼지도 않았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시에나가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홀린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카스는 그런 시에나를 보며 코웃음을 쳤지만, 엘레노어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런 얼굴로 부탁하는데 약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이즈멜이 가볍게 뒤돌아 앉아 있던 두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이델, 아드리안. 그대들도 함께 초대하지. 거절은 미리 거절하겠어.”
엘레노어는 이즈멜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내심 감탄했다. 그는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하고 자리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황태자는 역시 황태자인가 보다.’
싱글벙글 사람 좋게 웃으며 가볍게 던지는 말속에 묘하게 그의 뜻대로 움직이게 되는 힘이 있었다. 속으로 감탄하던 중, 붉은 눈동자가 돌연 그녀를 향했다.
“다른 사람도 그렇지만, 에버렛 영애는 꼭 와 줘. 나는 영애에게 개인적인 관심이 무척이나 많거든.”
“좋……아요.”
엘레노어가 갑작스러운 제안을 얼떨결에 승낙했다.
개인적인 관심이라는 말이 왠지 섬뜩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건 아마 요즘 이상한 가십에 휩쓸려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일 테다.
“좋아. 그땐 루카스 말고 나랑도 이야기해 줘.”
이즈멜이 코끝을 찡긋했다.
‘암요. 그럼요. 당연하죠.’
엘레노어는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열렬함으로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새로운 유형의 미남은 늘 이롭다. 아드리안이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이고, 카이델이 현실감 없는 절세미남이라면, 이즈멜은 살랑살랑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부류의 미남이었다.
‘동물로 따지자면, 여우가 아닐까.’
이세계 사람들의 외모 수준에 어느 정도 적응하기는 했지만, 제 미모를 제대로 알고 활용할 줄 아는 이를 보는 것은 또 다른 것이었다.
“엘렌, 오늘 고마웠어.”
그때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어깨 위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자연스럽게 엘레노어가 이즈멜에게서 돌아섰다.
“아냐, 내가 뭘 했다고. 그냥 같이 간식 나눠 먹은 게 전부인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아드리안은 이즈멜과 카이델의 시선이 제 등 뒤에 닿는 것을 느끼며 엘레노어를 향해 환히 웃었다.
황태자가 재미있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것이야 유명한 일이니 그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발렌타인 공작이 엘레노어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했다.
둘 사이의 접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연정이 싹텄는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아드리안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카이델은 누가 보아도 근사한 사내였고, 그 사실은 아드리안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엘레노어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드리안, 그의 속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또 문제겠지만…….
‘내가 너의 눈치 없음에 감사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면 아무리 눈치라고는 없는 엘레노어라 해도 알 수밖에 없게 만들면 그만이다. 다른 이들이 감히, 둘 사이에 끼어들기 전에.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제안했다.
“오늘, 오랜만에 저녁 같이 할까?”
“오늘……은 조금 그렇고 다른 날 어때? 내일은 괜찮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아니라지만, 어쨌든 수락은 수락이었다. 조카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둘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 오히려 더 나은 제안이기도 했다.
공작의 얼굴이 굳어졌으리라는 사실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상히 되물었다.
“좋아. 오늘은 왜?”
“공작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눌까 해서.”
순식간에 방 안을 채운 공기의 흐름이 반전되었다.
카이델을 향해 돌아선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의 얼굴이 희미하게 구겨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공작님,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
자리에 우뚝 서 있던 카이델이 살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가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답했다.
‘……묘하게 기뻐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의심도 이 정도면 도끼병이라며 엘레노어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조심하자, 자의식 과잉!
“그럼 데미안은 내가 데려다주도록 하지. 멀지도 않으니.”
이즈멜이 밝은 얼굴로 제안했다.
“데미안, 네 생각은?”
카이델이 데미안을 쳐다보며 물었다. 데미안의 어깨가 버릇처럼 움츠러들었다. 잠시 머뭇대던 데미안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카이델의 등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갔다.
“그럼 엘렌, 내일 저녁에 데리러 올게.”
“응, 좋아.”
“그럼 내일 봐.”
아드리안이 가볍게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으며 웃었다. 엘레노어가 허리를 숙여 시에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 인사를 건넸다.
“잘 가, 시에나.”
“다음에 또 봬요, 선생님.”
“그냥 엘렌이라고 불러도 괜찮아.”
나는 그 ‘선생님’인지 뭔지가 아니니까.
카이델과 아드리안, 이즈멜이 무뚝뚝한 인사치레를 주고받는 동안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데미안과 눈을 맞췄다.
“데미안, 정말 괜찮겠니? 기다리고 있다가 각하와 함께 가도 괜찮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텐데.”
데미안이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엘레노어가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놀러 오면 언제든지 맛있는 코코아를 대접해 줄게. 좀 더 따뜻해지면 정원을 산책하는 것도 좋을 거야.”
인형처럼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데미안이 조금 발그레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입가가 희미하게 녹은 것이 보였다.
“좋아. 만나서 반가웠어.”
***
조용한 응접실,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울려 퍼졌다.
엘레노어는 이미 설탕이 다 녹은 찻잔을 괜히 휘저으며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은 엘레노어를 바짝 얼어붙게 했다.
“오늘 봤겠지만, 데미안은…….”
한참이나 머뭇대던 카이델의 입술이 열렸다. 엘레노어는 테이블 위에 티스푼을 재빨리 내려놓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말을 거의 하지 않아. 의원에게도 보였지만,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더군. 그저 자의로 입을 닫은 거지.”
“언제부터였나요?”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묻자 카이델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원래도 워낙 조용한 녀석이기는 했지만, 요즘처럼 입을 닫은 건 3년쯤 된 것 같아.”
“3년이요.”
엘레노어가 낮게 속삭였다. 제법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데미안 혼자 끙끙거렸으리라 생각하니 엘레노어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되도록 목소리에 어떤 감정이나 판단도 섞지 않으려 애썼지만,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혹시 그즈음 데미안에게 큰일이라도…….”
카이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래서 더더욱 짐작이 안 가.”
카이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데미안도 앞으로의 거취를 슬슬 결정해야 해. 아카데미로 진학할지, 집에서 가정 교습을 받을지부터 그 이후의 문제까지.”
“아카데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얼굴이 굳어지던걸요.”
“다른 말은 하지 않던가?”
엘레노어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냥 공작가의 교육을 받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공작저는 아카데미랑은 비교할 수도 없이 안락하고…….”
“쓸데없이 크고 화려하기는 하지만, 공작저에 좋은 일이라고는 그다지 없어. 답답하고 삭막한 곳이지. 데미안이 원한다면 그리하겠지만, 아이가 지내기에 좋은 곳은 아니야. 아카데미 쪽이 훨씬 자유롭지.”
카이델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힐끔 회중시계를 곁눈질한 그가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때가 다 되었군. 그대의 시간을 너무 빼앗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뵙기를 청한 건 저인걸요.”
“오늘 한 이야기는…….”
“비밀로 할게요. 염려하지 마세요.”
두 사람은 마차까지 말없이 걸어갔다. 공작이 막 마차에 오르려던 때였다. 엘레노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왜 제가 적임자라고 생각하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공작이 엘레노어를 향해 돌아섰다. 엘레노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데미안은 착한 아이예요. 똑똑하고요. 한 번 본 거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알겠어요. 저도 데미안이 안쓰럽고, 그 아이가 좋은 스승을 만나 건강하게 자라나기를 바라요.”
엘레노어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제가 그 스승에 걸맞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가?”
“저를 높이 사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그리 좋은 사람이 못 돼요.”
“그대는 좋은 사람이야.”
카이델이 단호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그냥 하는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엘레노어의 표정이 한층 부드럽게 풀어졌다.
“저를 잘 모르시잖아요. 이 일이 있기 전에는 대화 한번 나눠 본 적이 없는걸요.”
“있어.”
카이델의 대답에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랬다면 제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어요.”
카이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지?”
“그야 공작님은 쉽게 잊기 힘든 분이니까요. 워낙…….”
엘레노어가 말을 멈췄다. 카이델은 계속하라는 듯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압도당한 엘레노어가 홀린 듯 말을 이었다.
“그…… 미남이시잖아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의 눈이 약간 커졌다. 조금 놀란 듯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엘레노어가 얼굴을 붉히며 사과를 건넸다.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전혀.”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대는 까맣게 잊은 모양이야. 오래된 일이니 그럴 만하지.”
카이델의 입매가 슬쩍 솟았다. 제가 내뱉은 말에 당황한 엘레노어는 마차에 올라타는 그의 얼굴에 유쾌한 기색이 가득한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생생하게 기억해. 아무래도 쉽게 잊기 힘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영애 쪽인 듯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