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7화 (7/168)

7화

그렇게 조금 이상한 입시 상담이 시작되었다.

엘레노어는 등 뒤의 뜨거운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아이들의 앞에 따끈한 음료를 한 잔씩 놓아 주었다. 피곤한지 연신 하품을 하던 루카스가 코를 킁킁대며 물었다.

“이건 뭐야?”

“코코아예요.”

“난 코코아 별론데.”

“일단 드셔 보세요.”

엘레노어가 자신 있게 권했다.

학원 탕비실에서 수년간 수련한 장인의 손맛이 더해진 것이다. 평범한 코코아와 비교는 금물이었다.

완벽한 물과 우유, 초콜릿의 비율부터, 마시멜로를 다져 넣어 배가 된 달콤함까지. 엘레노어는 제 음료 제조 스킬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에나도 마셔 봐. 마음에 들 거야.”

엘레노어가 시에나의 앞에 갓 구워낸 스콘 한 조각을 놓아 주며 말했다. 잠시 물끄러미 컵 속을 들여다보던 시에나가 제일 먼저 용기 내어 한 모금을 호록 머금었다.

데미안의 앞에도 스콘 한 조각을 놓아 주며, 엘레노어가 시에나를 향해 물었다.

“어때?”

“맛있어요! 역시 선생님…….”

도대체 뭐가 ‘역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에나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시에나가 마시기 시작하자 루카스와 데미안도 컵을 집어 들었다.

“와, 이거 뭐야? 왜 맛있어? 더 마실래.”

루카스에게서 즉각적이면서도 화끈한 반응이 돌아왔다. 엘레노어가 웃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데지 않게 후후 불어서 드세요.”

데미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컵을 꼭 쥐고 계속 홀짝이는 것을 보면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엘레노어가 제 찻잔을 채우고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한담.

엘레노어의 시선이 루카스, 시에나, 데미안에게로 차례로 옮겨갔다. 루카스는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비우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고, 데미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컵만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국, 엘레노어는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시에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시에나는 아카데미 수석이 꿈이라면서?”

“네! 선생님도 입학시험에서 1등 하셨다고 삼촌한테 들었어요.”

시에나의 말에 엘레노어가 아드리안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던 것인지 그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약간 머쓱해진 엘레노어가 곧바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구나. 요즘은 혼자 공부하고 있는 거야?”

시에나는 한참이나 종알종알 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드리안의 말대로 똑똑하고 야무진 소녀였다. 아이답게 약간 엉성한 면도 있지만 제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하고 공부한 티가 났다. 엘레노어가 간단한 덕담과 조언을 건넸다.

그다음은 루카스 차례였다. 루카스는 집중력이 다 떨어진 것인지 반쯤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루카스 님도 아카데미 진학을 준비하시나요?”

묻자마자 루카스의 얼굴에 순식간에 그늘이 드리웠다.

“다들 가야 한다고는 하던데…….”

퍽 심각한 얼굴의 루카스가 웅얼웅얼 입을 열었다.

‘하던데?’

덩달아 심각해진 엘레노어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어질 루카스의 말을 기다렸다. 시에나와 데미안의 시선도 루카스를 향했다.

“공부 싫어.”

“……?”

“재미없어.”

지나치게 심플한 대답에 엘레노어의 머릿속이 순간 정지했다. 엘레노어와 비슷한 표정으로 루카스를 바라보던 시에나가 소곤소곤 물어왔다.

“이분이 진짜 황자님이세요?”

“그래. 내가 황자인데, 뭐.”

“흐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에나가 새침하게 루카스의 시선을 피하며 딸기를 콕 집어 입에 넣었다. 잠시 곱씹던 루카스가 뭔가 뉘앙스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는지 씩씩거리며 시에나에게 따져 물었다.

“야, 분홍 머리. 방금 그거 무슨 뜻인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아무것도 아니긴.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아, 황자님은 바보가 아니시니 알아서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루카스와 시에나가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루카스 님, 시에나. 그만 싸우고 우리 사이좋게…….”

엘레노어가 말리는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것인지 두 아이의 언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루카스는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신분도 아니었기에 더욱 곤란했다.

둘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엘레노어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뇌물을 받는 게 아니었는데! 아직도 개미 근성을 다 못 버려서야…….’

문득 전생의 입시 철을 떠올린 엘레노어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로 끝내야지.’

***

응접실 구석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남자는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아드리안은 제 조카와 황자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조금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이즈멜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었다.

그런 황태자를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카이델이 불쑥 물었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로 친히 오셨습니까.”

“그대와 정확히 같은 이유로 왔지.”

이즈멜의 말에 카이델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동생에게 최고의 선생님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이야 공이나 나나 같지 않겠나?”

“정말 그 이유뿐입니까?”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역시 네놈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지.

속으로 중얼거린 이즈멜이 의뭉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카이델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물론 한평생 목석처럼 살아온 내 육촌과, 영애들의 열정적인 애정 공세를 꿋꿋이 거절해온 소후작이 절절하게 목을 맨다는 영애를 꼭 보고 싶기도 했지.”

“도대체……!”

“마침 그 영애가 내 막내 보좌관의 누이라지 않나. 인연인 거지.”

카이델은 드와이트 에버렛이 황태자 직속 보좌관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애초에 그 기사에서 그가 주의 깊게 본 것은 오로지 엘레노어에 대한 설명뿐이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잊고 있었나? 소후작이야 워낙 잘 알고 있었을 테고.”

이즈멜의 말에 아드리안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드와이트가 자네를 무척 아끼는 모양이던데.”

“어렸을 때부터 엘렌까지 셋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슬쩍 카이델을 곁눈질하는 시선에는 묘하게 서늘한 데가 있었다.

“들었나, 카이델? 그대에게 불리한 싸움이라는 건 알고 시작하라는 얘기야.”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즈멜이 카이델 쪽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을 법도 한데,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정말 둘 중 누구도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는군. 그냥 헛소문은 아닐 것으로 짐작했지만, 정말이었다니.”

“전하!”

“저는 그저…….”

“늦었네. 이미 다 들킨 후에 발끈해 봐야 뭐하나.”

이즈멜이 웃으며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확실히 영애에게 뭔가 남다른 면이 있기는 해. 흥미롭고. 두 사람이 왜 끌렸는지 십분 이해가 가.”

그가 말을 맺자마자 카이델의 기운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예의 바른 미소를 잃지 않은 아드리안도 눈빛만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 사람을 흥미롭게 관찰하던 이즈멜이 장난기를 거두며 툭 일갈했다.

“불경스러운 눈빛은 넣어둬. 정말 다른 마음이 있어서 온 건 아니니까.”

그의 시선이 다시 세 아이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엘레노어에게 향했다.

“……적어도 지금은.”

***

둘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향해 말을 건넸다.

“코코아는 입맛에 맞아? 너무 뜨겁지는 않고?”

데미안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보았지만, 데미안은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침묵을 지켰다.

“데미안은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칠 마음이 있어?”

아카데미에 대한 화제가 나오자, 고갯짓으로나마 제 의사를 표현하던 것마저 뚝 그쳤다. 컵을 쥔 데미안의 손끝에 새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예민한 부분인가.’

엘레노어는 그 화제가 데미안에게 민감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빠르게 눈치채고 말을 돌렸다.

“데미안은 취미가 있어? 그냥 생각만 해도 즐거운 것 말이야. 나는 집을 가꾸는 걸 좋아해. 머무르는 곳이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으면 해서.”

내내 불편한 듯 시선을 내리깔던 데미안은 엘레노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이야기를 이어가자 조금씩 긴장을 풀었다. 아무 말이나 마구 늘어놓은 것이 그에게는 도움이 된 듯했다.

“공작저에 비하면 많이 작지? 그래서 구경할 게 많지는 않지만, 정원은 꽤 볼만한 편이야. 내가 하나하나 신경 써서 가꿨거든.”

솔직히 여덟 살짜리 남자아이를 어떻게 대했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애초에 엘레노어는 이 나이의 아이들을 상대한 경험이 많지 않았다.

‘처음 1년 반쯤 맡았던가. 그 이후로는 줄곧 고등학생들만 가르쳤으니까…….’

가르치던 학생들의 얼굴이 문득 떠오르는 것을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아, 뒤뜰에 있는 연못에는 오리들도 살아. 일부러 데려와서 키운 건 아니고, 근처에 살다가 우연히 흘러든 것 같아.”

수줍음이 많고 말이 없는 학생들은 전생에서 수도 없이 보았다. 단순히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학생들도 많았고.

하지만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지켜보고 느낀 것은 조금 달랐다. 데미안은 생각을 표현하는 데 서툰 것이 아니라, 표현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만 같았다.

“다음에 오면 소개해 줄게. 무척 시끄럽긴 하지만, 새끼 오리들은 정말 귀엽거든.”

“저도 보러 와도 돼요?”

엘레노어가 데미안에게 건넨 말에 시에나가 쏙 끼어들었다. 그러자 입이 부루퉁해진 루카스가 자랑하듯 한 마디를 보탰다.

“황궁에는 오리 말고 다른 동물들도 많아.”

“좋으시겠네요.”

시에나가 관심 없다는 듯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재수 없는 분홍 머리, 너는 와 본 적도 없겠지. 올 수도 없고.”

“와, 아쉬워라.”

만난 지 겨우 한 시간쯤 되었을까. 둘은 완벽한 앙숙이 되어 버린 듯했다.

제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는 것이 분한지 루카스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간이 콩만 해진 엘레노어가 황태자가 앉아 있는 쪽을 힐끔 눈짓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두 아이의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시에나. 언제든지 와서 구경해도 돼.”

“와아!”

시에나가 활짝 웃으며 짤깍짤깍 손뼉을 쳤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루카스가 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어왔다.

“나는?”

“루카스 님도 물론 오셔도 괜찮고요.”

루카스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환해졌다. 봤냐는 듯 시에나를 향해 오만한 미소를 슬쩍 흘린 루카스가 엘레노어를 향해 호기롭게 말했다.

“좋아. 그럼 나도 황궁으로 영애를 초대할게.”

“네? 아니, 그럴 필요는…….”

엘레노어의 친절한 미소에 쩌적, 실금이 갔다.

“맛있는 걸 대접받았으니 마땅히 나도 대접해야지.”

“맛있게 드셔 주신 것만으로도 기뻐요.”

그냥 가. 제발 그냥 가.

“역시 근사한 저녁이 좋아? 야외에서 점심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굳이 사양하지 않아도 돼.”

루카스가 홱 뒤를 돌아보며 황태자에게 동의를 구했다. 사실상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형님, 그래도 괜찮지?”

아, 제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