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어린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아홉 살 생일이 지나면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카이델의 말에 데미안이 움찔했다.
“준비해야 할 과목이 많겠지만, 도와줄 사람을 붙여 줄 테니…….”
덤덤하게 말을 이으려던 카이델의 미간에 슬쩍 구김이 갔다. 데미안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제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만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미안, 고개 들고 날 봐. 내 눈을 똑바로 봐라.”
카이델의 딱딱한 목소리에 데미안의 어깨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커다란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카이델을 향했다.
“중요한 것은 네 결정이다. 나는 그저 네 선택에 따를 거야. 네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겠다고 하면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지만,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것 역시 받아들이겠다.”
“…….”
“데미안,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
카이델이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피로감에 깊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후로 한참이나 더 기다렸지만, 데미안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발렌타인 형제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데미안은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문을 열기 위해 카이델이 나름대로 애썼지만, 그럴수록 데미안은 점점 제 방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주변 시선이 어떠하든 치료를 받는 일도 생각해 보았으나, 의원을 만나는 일은 극도로 거부하는 탓에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단 말인가.’
카이델은 데미안을 볼 때마다 가슴 위에 바위가 놓인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데미안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아버지까지 전쟁으로 잃으며 카이델은 졸지에 동생의 부모 노릇을 떠맡게 되었다. 그 역할은 카이델이 맡은 어떤 역할보다 더 어렵고 까다로웠다.
흐린 기억 속 어머니를 빼닮은 데미안의 눈을 잠시 바라보던 카이델이 말을 이었다.
“내일 같이 갈 곳이 있다. 네가 만나 봤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
“……!”
데미안의 눈동자에 공포감이 어렸다. 카이델이 짧게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의원은 아니니 무서워할 것 없다. 백작 영애인데……. 아마 네가 마음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그냥 잠시 만나 이야기만 하다 돌아올 거야.”
그제야 창백하게 질렸던 데미안의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
“……그 말을 하려 불렀다. 돌아가도 좋아.”
눈치를 살피며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데미안이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멀어져 가는 자그마한 인영을 바라보던 카이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
‘드디어 오늘이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올려 묶은 엘레노어의 얼굴이 제법 결연했다. 엘레노어는 몇 번씩이나 제 모습과 응접실의 상태를 반복해서 점검했다.
비단 엘레노어뿐 아니라 백작저의 모든 사용인이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황태자와 황자, 발렌타인 공작가 형제, 블레이크 소후작과 그 조카가 전부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편하게 이야기나 나누자’라는 취지였지만, 엘레노어는 전혀 편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늘 속 편하신 높은 분들이나 하는 법이었다.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다’라는 말만큼 무의미한 것이 또 있을까. 엘레노어는 화병에 새로 꽂은 탐스러운 꽃들을 다시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아가씨, 발렌타인과 블레이크의 마차가 방금 대문을 통과했답니다.”
“벌써? 알았어요. 다들 마지막으로 점검해 줘요.”
알베르가 공작가와 후작가의 마차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이른 도착이었다. 엘레노어는 치마 주름을 탁탁 털어 펼치며 현관으로 향했다.
“엘렌.”
“리안, 어서 와. 시에나도 어서 오렴. 아기 때 봤는데, 예쁜 숙녀가 다 되었네.”
“꼭 만나고 싶었어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에나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예법에 맞춰 깍듯하게 건네는 인사가 제법 야무졌다.
시에나는 솜사탕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과 장밋빛 뺨이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는 제 삼촌인 아드리안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했다.
“그나저나 손에 든 건 뭐야?”
“디저트야. 네가 좋아하는 거로 골라왔어.”
“고마워. 잘 먹을게.”
엘레노어의 입가에 사르륵 미소가 번졌다.
“응접실에 가져다 두면 되지?”
“응, 그래 줄래?”
“가자, 에나.”
아드리안은 익숙하게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사두마차가 멈춰 서고 공작과 그 동생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둘은 누가 보아도 형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닮아 있었다.
문간에 선 엘레노어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발렌타인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에버렛 영애.”
그야말로 카이델다운 딱딱한 인사가 돌아왔다. 엘레노어는 살짝 허리를 숙여 소년과 눈높이를 맞추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그냥 데미안이라고 불러도 괜찮아. 편히 대해.”
카이델이 말했다.
뭐, 그게 엘레노어로서도 편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데미안의 의사였다.
엘레노어가 다시 한번 데미안과 눈을 맞추며 친절하게 물었다.
“공작님 말씀대로 대해도 될까요?”
뻣뻣하게 서서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던 소년이 서서히 시선을 들어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는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참이나 말없이 경계하듯 엘레노어의 얼굴을 꼼꼼히 훑어보던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아, 데미안. 들어가자. 맛있는 거 잔뜩 준비해 뒀어.”
데미안이 얼떨결에 제 앞에 내밀어진 엘레노어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장갑에 감싸인 가느다란 손가락을 부드럽게 쥔 엘레노어가 응접실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뺨에 공작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엘레노어는 애써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발렌타인 공작 각하.”
“블레이크 소후작.”
응접실에서 마주친 카이델과 아드리안이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둘 사이에 애매하게 끼인 채 서 있던 엘레노어는 어디선가 찬바람이 쌩하니 불어오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색하게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엘레노어가 어느새 가득 찬 응접실 테이블을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와, 리안.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다 못 먹겠다.”
“네가 좋아할 것 같은 건 다 담다 보니 이렇게 됐어. 타르트는 가운데 둘까?”
“응, 이리 줘. 내가 놓을게.”
“내 쪽에서 더 가까우니 그냥 내가 할게.”
아드리안이 생긋 웃으며 솜씨 좋게 테이블의 접시를 정리했다.
카이델의 시선이 바짝 붙어 선 채 자연스럽게 투덕대는 두 사람에게 내리꽂혔다. 엘레노어는 어쩐지 뒷덜미가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데미안, 이쪽은 시에나라고 해. 시에나, 이쪽은 데미안이야.”
어떻게든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해 보려 엘레노어는 시에나와 데미안을 서로 인사시켰다.
“안녕, 데미안.”
“…….”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시에나와 달리 데미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 줄래? 아직 손님이 다 오지 않으셨거든. 혹시 배고프거나 목마르면 아무한테나 말하면 돼.”
엘레노어는 황태자와 황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기회라 생각했다. 엘레노어는 하녀들에게 아이들을 지켜봐 달라 부탁한 뒤, 아직도 어색하게 서로를 의식하며 서 있는 두 남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공작님,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리안, 너도 같이.”
“그래, 엘렌.”
“물론.”
엘레노어가 입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터져 나왔다. 엘레노어가 복도의 구석진 곳으로 걸어가자 두 남자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랐다.
“다들 보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말도 안 되는 기사 말이에요.”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
“음.”
그런데 어쩐지 돌아오는 반응들이 미적지근했다. 약간 께름칙한 느낌을 받은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그 기사 때문에 다들 많이 곤란하고 난처하셨을 줄 알아요. 저도 그랬고요. 혹시 제 입장이 민망해질까 봐 나서서 대응하지 못하셨던 거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으음…….”
“공작가와 후작가에서 가만히 있는데, 백작 영애인 제가 괜히 나서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정적.
말 그대로 정적이었다. 카이델과 아드리안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먼저 아드리안, 그다음으로는 카이델.
아드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고, 카이델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엘레노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세요? 강경하게 대응하셔도 괜찮다니까요?”
뜻밖의 반응에 엘레노어가 어리둥절하던 그때, 집사가 헛기침으로 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아가씨, 황실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알았어요. 나가 볼게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틀었다. 카이델과 아드리안의 얼굴에 언뜻 안도감이 떠오른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지고들 짬이 없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엘레노어가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커다란 황실 마차가 멈추어 섰다. 황태자와 황자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라 긴장이 되었다.
마차가 열리고, 황가를 상징하는 백금발이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엘레노어는 곧바로 허리를 살짝 굽혀 예법에 맞게 인사를 건넸다.
“벨리움의 빛이 닿기를.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황자 저하. 엘레노어 에버렛입니다.”
“그렇게 깍듯하게 예의 차릴 것 없어. 편하게 대해도 좋아.”
예상과 달리 장난기 어린 유쾌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엘레노어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태자를 마주 보았다.
“꼭 만나 보고 싶었어. 반가워, 에버렛 영애.”
윤기가 흐르는 백금발과 루비 같은 붉은 눈이 매혹적이었다. 성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아름다운 얼굴에 엘레노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는 그런 반응에 익숙하다는 듯 여유롭게 눈을 휘며 웃었다.
“크으응, 맛있는 냄새.”
그때 황태자의 옆구리에서 동그란 머리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황태자와 똑같은 백금발에 자주색 눈동자를 가진 황자, 루카스였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응, 재미있었어. 그냥 루카스라고 불러. 루크라고 해도 좋고.”
엘레노어가 살짝 몸을 낮춰 루카스와 눈높이를 맞췄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방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엘레노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루카스 님. 그럼 들어가 볼까요?”
“안에 가면 먹을 것도 있어?”
“네, 맛있는 디저트가 많아요.”
“마음대로 먹어도 돼?”
“그럼요.”
루카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엘레노어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쓰읍. 선생님께 예의 바르게 굴어야지, 루카스.”
“흐잉.”
이즈멜이 루카스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놓으며 작게 핀잔했다.
황태자는 의외로 격의 없고 소탈한 사람인 듯했다. 엘레노어는 내심 놀라며 두 사람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섰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카이델과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 이즈멜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즈멜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오랜만이군. 벨리움 제국의 낭만을 책임지는 세 사람이 아닌가. 기사 잘 보고 있어.”
이즈멜의 농담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정작 카이델과 아드리안은 무덤덤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지만.
애써 평정을 되찾은 엘레노어가 밝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아, 아이들이랑 이야기하는 동안 여러분께는 따로 방을 내어드릴까요? 편하게 대화하실 수 있도록…….”
엘레노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구동성으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니, 괜찮아.”
“아니야, 엘렌.”
“괜찮다.”
이즈멜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녀석들이랑 따로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구석에서 방해 안 하고 얌전히 있을게.”
“불편할 텐데요.”
“아냐, 편해.”
아니, 내가 불편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