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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5화 (5/168)

5화

“발렌타인 공작과 블레이크 소후작이 연적 관계라…….”

황태자 집무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햇볕에 결 좋은 백금발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타블로이드지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이즈멜의 입가가 슬며시 휘었다.

“심심하던 차에 재미있는 일이 생겼어. 세상에, 카이델 그 목석같은 놈이 누군가에게 연정을 품는다고?”

쯧. 말세로군, 말세야.

이즈멜이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카이델이라니. 심지어 짝사랑이라니!

오랜만에 흥미가 동하는 놀잇감을 찾은 듯, 루비 같은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즈멜은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썼다.

“헨리, 어떻게 생각해. 진짜일까?”

이즈멜이 제 수석 보좌관을 향해 물었다.

“저도 그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 같더군요.”

“그래? 자네가 보기엔 누구 쪽에 승산이 있는 것 같나? 나는 왜 하필 그런 날 도망하였는지, 운도 지지리도 없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이즈멜이 발을 굴렀다. 헨리는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굳이 고르자면…… 블레이크 소후작 쪽이 아닐까 합니다만.”

“왜지?”

“에버렛 영애가 소후작과 함께 테라스로 사라졌으니까요. 돌아갈 때도 소후작의 외투를 걸치고 갔고요.”

이즈멜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지식하고 무뚝뚝해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없는 육촌이 한 방 제대로 먹었다는 게 왜 이리 즐거운 건지. 얼굴도 모르는 백작 영애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카이델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즈멜은 카이델을 꽤 높이 평가하는 편이었다.

세간의 소문과 달리 카이델은 제법 순진한 사내였다. 욕심도 없고 요령을 피우는 일도 없었다.

농담 한마디를 받아주지 않는 그의 무심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사람이 어찌 완벽할 수 있겠나.

“그나저나 대체 그 영애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게 쟁쟁한 두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걸까? 그렇게 미인인가?”

이즈멜의 관심이 카이델에게서 엘레노어에게로 옮겨갔다. 에버렛 백작가의 여식이라……. 어쩐지 귀에 익기는 하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는 이름은 아니었다.

에버렛, 에버렛, 에버렛……. 어디서 들었더라?

헨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확실히 미인이시기는 하지요. 미모보다는 다른 것으로 더 유명하시지만요. 아, 그 친구의 쌍둥이 누이입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막내 보좌관, 드와이트 에버렛.”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이즈멜이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다, 했다.

이즈멜이 얼굴에서 장난기를 걷어낸 채, 위엄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헨리, 아무래도 그 친구와 면담을 좀 해야겠어. 내 보좌관인데 어떤 사람인지 내가 잘 알아야 하지 않겠어?”

“예, 전하. 알겠습니다.”

상관의 속내를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헨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즈멜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다과도 부탁해.”

***

드와이트는 동상처럼 뻣뻣한 자세로 앉아 진땀을 뺐다. 출근한 지 닷새째, 황태자와의 독대는 처음이었다.

“편히 들도록 해.”

이즈멜이 싱긋 웃으며 찻잔을 밀어 주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전하.”

이즈멜은 각 잡힌 모습으로 덜덜 떨고 있는 풋내기 보좌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하고 곱상한 얼굴이었다.

우유처럼 흰 피부, 밝은 금발,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

‘쌍둥이라니 많이 닮았겠지?’

이즈멜은 어렵지 않게 백작 영애의 외모를 상상할 수 있었다. 헨리의 말대로 제법 미인일 듯했다.

“그래, 일은 좀 할 만한가? 헨리가 좀 빡빡하게 굴지?”

“전혀 아닙니다.”

“그렇게 어렵게 굴지 않아도 괜찮아. 헨리야 나한테도 늘 잔소리가 많은데, 그대에게는 더하겠지. 절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이즈멜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황궁에서 일하며 알아두면 유용한 것들을 몇몇 전해 주었다. 30분쯤 지나자 드와이트는 이즈멜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즈멜에게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재주가 있었다. 헨리는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며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는 것’이라 정정했지만, 어쨌든.

“드와이트, 자네는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나?”

“쌍둥이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아, 그렇지. 들었던 것 같아. 쌍둥이라 특별히 더 애틋하겠어.”

이즈멜은 짐짓 모른 척 시침을 떼며 제가 궁금했던 주제를 꺼내 들었다.

여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드와이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무척이나 돈독한 관계인 듯했다.

드와이트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여동생에 대한 칭찬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저 예의상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즈멜은, 어느 순간 진심으로 제 보좌관의 쌍둥이 여동생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엘레노어 에버렛은 그가 예상했던 부류의 여인이 전혀 아니었다. 아니, 그가 아는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즈멜이 우아하게 찻잔을 집어 들며 여상히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기사를 본 것 같은데. 발렌타인 공과 블레이크 소후작이 에버렛 영애에게 흠뻑 빠졌다고.”

쿨럭.

드와이트가 사레가 걸린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런.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래서…… 사실인가?”

“아닙니다! 그건 사실과는 좀 다릅니다.”

드와이트가 손사래를 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즈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아니라고?”

“네. 소후작이야 워낙 친한 사이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공작 각하는 정말 아닙니다.”

“그럼?”

“제 합격 인터뷰가 나간 뒤 엘렌에게 선생님이 되어 달라는 편지가 산처럼 왔습니다. 두 분도 그중 하나였고요.”

“아, 데미안 때문이겠군.”

재미없는 제 형보다도 더 말이 없는 녀석이지.

이즈멜이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캔들이 난 뒤 공작가나 후작가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들고 일어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사실 조금 곤란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말이 없다, 라.

이즈멜이 잠시 곱씹었다. 아마 백작 영애의 처지에서 생각한다면 드와이트의 말이 전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즈멜은 카이델을 알았다. 지금껏 그와 다른 영애들을 엮어 보겠다고 기자들이 얼마나 악착같이 덤벼들었는지도, 그런 소문에 카이델이 얼마나 칼처럼 대처해 왔는지도 잘, 너무 잘 알았다.

‘순진한 녀석.’

그런데도 카이델이 잠잠하다면 이유는 딱 하나였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퍽 유쾌해진 이즈멜이 싱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사교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들 아닌가. 발렌타인, 블레이크. 기자들이 그토록 극성인가?”

“네. 엘렌은 며칠째 정원에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런. 그럼 안 되지. 곧 조처하겠네.”

“감사합니다, 전하.”

드와이트가 감동한 얼굴로 이즈멜을 바라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래서, 영애는 어느 가문 아이의 선생님이 되어 주기로 했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엘렌은 원래 누구를 가르칠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전부 거절했었거든요.”

“아하.”

“이틀 뒤에 다 같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고는 들었습니다. 아마도 거절하기 전에 예의를 차리는 거겠죠.”

이즈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전부 다? 공작과 소후작, 영애까지 전부 다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 차 한잔 더 들겠나?”

이즈멜이 친절하게 권하자 드와이트가 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즈멜은 제가 듣고 싶은 말을 끌어내는 데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드와이트는 저도 모르는 새 엘레노어가 얼마나 좋은 선생님인지, 얼마나 특별하고 완벽한 존재인지를 줄줄 늘어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에버렛 백작가에는 황실의 인장이 찍힌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영애에 대한 칭찬은 익히 들었어. 무척이나 인상적이더군. 대단하게 생각해.」

편지를 쥔 엘레노어의 손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애에게 내 동생, 루카스의 교육을 부탁하고 싶어.」

“미친.”

엘레노어의 입술 사이로 짧고 굵은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부담 갖지 말고 의자 두 개만 더 놓아 주면 돼. 의자가 없다면, 서 있어도 좋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고.」

부담 갖지 말라는 말만큼 부담스러운 말이 또 있을까.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각하, 정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실 겁니까?”

공작의 집무실 문을 두드린 집사, 조나단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며칠 지켜본 결과 그냥 알아서 가라앉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명령하시면 이전처럼 헛소문이라 강경하게 대응…….”

“그냥 둬.”

카이델이 조나단의 말을 잘라내며 대답했다.

“하지만, 어째서입니까?”

“데미안을 데려와. 전할 말이 있으니까.”

어째서냐고.

그러게, 어째서일까.

조나단을 내보낸 카이델이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얼어붙은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 위로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엘레노어 에버렛.

요즘 그의 일상 속에 가장 많이 끼어드는 이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끼어든 쪽은 카이델이었다. 그저 조용히 제 갈 길을 가고 있던 엘레노어의 인생에 카이델이 억지로 발을 들이민 것이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녀에게 편지를 썼는지, 거절 답신이 돌아왔을 때 왜 곧바로 마차를 준비시켰는지, 사람들이 떠들어댈 것을 훤히 알면서도 불쑥 춤을 청했는지.

일련의 일들은 다분히도 충동적이었다. 평소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카이델이 제 귀에 들릴 듯 말 듯 한 크기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영애는, 늘 나를 조금 이상하게 만들어.”

엘레노어는 모르겠지만 카이델은 그녀를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눈에 띄었다. 특별히 눈에 띌 만한 구석이 없는데도 그랬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곱슬곱슬한 금발, 약간 당혹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눈,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뺨 위에 점점이 흩뿌려진 옅은 주근깨.

분명 예쁜 얼굴이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미인은 아니었다.

지금껏 카이델에게 다가왔던 이들이 전부 제국에서 쟁쟁한 미모로 유명한 이들이었음을 생각하면,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외모였다.

그런데도 시선이 갔다. 가끔 참석한 파티에서 엘레노어를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파티가 조금은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

엘레노어는 전부 시시하고 지루하다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늘 두 볼 가득 뭔가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볼 때마다 카이델은 허기가 졌다.

엘레노어가 제 쌍둥이의 귀에 무언가 속삭이곤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면 카이델은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게 되었다. 무슨 얘기를 한 걸까. 뭐가 그렇게 즐거운가. 괜히 궁금해지게 하는 환한 미소였다.

그리고…….

똑똑.

계속해서 이어지려던 생각이 자그마한 노크 소리에 가로막혔다. 카이델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말했다.

“들어와.”

데미안이 쭈뼛대며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앞에 앉아.”

데미안은 목각 인형처럼 뻣뻣한 걸음을 옮겨 카이델의 앞에 앉았다. 카이델의 키에 맞춰진 의자가 조금 높은지 잠시 끙끙거렸지만, 데미안은 이내 반듯한 자세로 앉아 시선을 푹 내리깔았다.

카이델이 남자답고 날카로운 분위기의 미남이라면, 데미안은 그보다 조금 섬세하고 선이 고운 느낌의 미소년이었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형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둘은 닮아 있었다.

“편히 앉아도 괜찮다.”

카이델의 허락에도 데미안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카이델이 짧은 한숨을 내쉬자 데미안의 속눈썹이 파르르, 가늘게 진동했다.

마주 앉은 발렌타인 형제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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