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시, 시간을 내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낭만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말이었다.
‘언제 내 동생과 한번 이야기를 나눠 주겠나.’ 라거나 ‘상담은 어느 요일이 편하겠느냐.’ 하는 정확하고 중립적인 표현도 있었다.
적어도 남들이 듣지 못하게 귓가에 속삭여 주든지.
……아, 그게 더 이상한가.
경악에 찬 시선이 쏠리는 것을 느끼며 엘레노어가 카이델에게 슬쩍 원망스러운 눈빛을 흘렸다.
“엘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잔을 든 아드리안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발렌타인 공작 각하.”
“블레이크 소후작.”
두 사람이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엘레노어가 침을 꼴깍 삼키며 바쁘게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 사이가 원래 이렇게 별로였나?’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 것 같은데.
엘레노어가 이 틈을 타 살그머니 빠져나가려 뒷걸음질을 쳤다.
“대답은 해 주고 가야지, 영애.”
“같이 가, 엘렌.”
그러자 두 남자의 시선이 곧바로 그녀에게 향했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느새 모두가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관심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 명 중 그것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엘레노어 하나인 듯했다.
조용히 상황을 빠져나가기 글렀다고 판단한 엘레노어가 빠르게 대답했다.
“일주일 뒤, 오후 두 시가 좋겠어요. 선물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공작님.”
카이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에게 속삭였다.
“난 바람이라도 좀 쐬어야겠어. 테라스로 따라 나와.”
***
“무슨 관계야?”
테라스로 나서자마자 아드리안이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물어왔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초조함이 떠올랐다.
“뭐가?”
“공작 각하 말이야.”
“아무 관계도 아니야.”
엘레노어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의 표정은 오히려 더 굳어갈 뿐이었다.
“아무 관계도 아니라면 왜…….”
“각하께서 춤을 신청하셨고 나는 승낙했어. 무도회잖아. 뭐가 문제야?”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엘레노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굳은 것을 눈치챈 아드리안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상대가 발렌타인 공작 각하라는 게 문제지. 그를 둘러싼 소문이라면 너도 잘 알잖아. 난 단지 걱정이 되어서 그래.”
아드리안이 제 겉옷을 벗어 엘레노어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걱정할 것 없어. 이유가 있어서 한 번 만났고, 그뿐이야.”
“알았어.”
아드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석연찮은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엘레노어가 짧게 부연설명을 더했다.
“드와이트가 인터뷰한 기사를 보셨나 봐. 동생을 부탁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아.”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셔서 딱 잘라 거절하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한번 만나서 이야기만 나눠 보기로 한 거야. 봐, 별거 없지?”
엘레노어가 과장되게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아드리안은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발코니 아래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엘레노어의 목걸이를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그 드레스랑 목걸이가 각하의 선물이야?”
“응.”
“그렇구나.”
아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낯설었던 아까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평소의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잠시 후, 엘레노어를 향해 고개를 돌린 아드리안이 두 눈을 살포시 접어 웃으며 물었다.
“다음 주에, 나도 가도 될까?”
“공작님 오시는 날?”
“응. 에나가 많이 아쉬워했어. 네가 한 번이라도 만나 주면 좋을 것 같아.”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에나랑 같이 와. 둘이 나이도 같으니 아무래도 함께 이야기 나누면 더 편할 것 같아.”
아드리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고마워. 에나가 정말 좋아할 거야.”
차가운 바람이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뜨려 놓았다. 가늘게 몸을 떤 엘레노어가 몸을 웅크렸다.
“추워? 들어갈까?”
“좀 춥긴 한데…….”
엘레노어는 연회장 안으로 돌아가면 제게 몰릴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오늘은 좀 일찍 돌아가고 싶네. 안에서 드와이트 좀 불러줄 수 있어?”
“물론.”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겉옷을 벗어 돌려주려 하자 그가 가볍게 그녀의 손을 붙잡아 만류했다.
“춥잖아. 입고 있어.”
“그럼 넌…….”
“난 괜찮아.”
아드리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외투의 단추를 꼼꼼히 채워 잠갔다. 드레스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단단히 외투를 여민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됐다. 잠깐만 기다려.”
아드리안이 연회장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엘레노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피곤한 하루였다. 파티장에 도착한 지 겨우 두 시간 남짓인데, 꼭 이틀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공작이 춤을 청할 줄은 몰랐는데.’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턱을 괸 엘레노어가 종전의 일을 회상했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보지도 못했기에 남은 것이라고는 온통 희미한 감각뿐이었다.
엘레노어는 그에게서 몇 가지 의외의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건드리면 ‘앗, 차가워!’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은 인상인데, 그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오히려 조금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잘 때도 각을 잡고 잘 것 같은 남자가, 의외로 춤을 출 때는 부드럽고 우아했다.
‘몸을 쓰는 일이라면 전부 잘하는 걸까.’
엘레노어는 잠시 실없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공작은 소문처럼 무시무시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아직도 그의 앞에 서면 저도 모르게 무릎이 떨렸지만, 그는 늘 정중했다.
심지어는 그녀가 마구 발을 밟아 댔을 때도 불쾌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 순한 드와이트조차 가끔은 못 참고 짜증을 내는데 말이다.
“소문처럼 무시무시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작게 중얼거린 엘레노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지나치게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아직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걸.
그러고 보면 오늘은 아드리안도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만 보이던 그가 오늘은 어째서인지 조금 조급하고 까칠하게 행동했다.
공작과 마주 선 그에게서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아드리안을 거의 평생 지켜봐 온 엘레노어에게도 낯선 모습이었다.
겉옷을 걸쳐 주고, 그녀를 대신해 드와이트를 불러 주는 친절함은 평소와 같았지만.
“대체 왜 그런 거지?”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등 뒤에서 드와이트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렌!”
“드와이트, 미안한데 우리 오늘은 조금…….”
엘레노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온 드와이트가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너 발렌타인 공작이랑 연애해?”
“무슨 헛소리야!”
뜬금없는 말에 엘레노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드와이트가 어깨를 움찔하며 소심하게 항변했다.
“그렇다기엔 다들 그 얘기로 정신이 없던걸.”
“동생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신 게 전부야. 이게 다 드와이트 네 입방정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것만 알아둬.”
후. 짧게 숨을 내뱉은 엘레노어가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나 너무 피곤해.”
“난 아직 좀 더 있고 싶은데.”
“이러기야? 정말로?”
엘레노어가 눈을 부릅뜨자 드와이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그냥 해 본 말이었어. 계속 있어 봐야 너랑 공작님, 리안 이야기밖에 안 나올 것 같으니까. 진짜 특종이라도 잡은 것처럼 떠들어 대더라고.”
“금방 시들해질 거야. 가십이라는 게 보통 그렇잖아.”
며칠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잊히겠지. 그럴 거야.
목덜미가 선득해지는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엘레노어가 작게 속삭였다.
***
하지만 불안한 예감은 어째서 늘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걸까.
「발렌타인 공작의 그녀는 누구인가! 지인 독점 인터뷰!」
「벨리움 제국을 뜨겁게 달군 삼각관계 스캔들!」
「발렌타인과 블레이크, 승자는 누구?」
이 세계나 저 세계나 지라시가 문제다. 엘레노어의 손아귀에서 누런 타블로이드지가 파스슥 구겨져 들어갔다.
발렌타인 공작이 처음으로 춤을 청한 여성. 그런 두 사람 사이에 과감하게 끼어든 블레이크 소후작.
세 사람의 이야기를 희대의 로맨스 소설처럼 포장해 둔 기사는 흥미진진했다. 다음 기사를 은근히 기다리게 될 정도로.
어떻게 알았는지 기사에는 엘레노어가 입은 드레스를 공수한 것이 발렌타인 공작 측이라는 것도 적혀 있었다.
문제는 그 정보 외에는 전부 사실과 동떨어진 기자의 상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더 문제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다는 것이었고.
카이델 이드리스 발렌타인.
아드리안 블레이크.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두 남자가 여자 문제로 얽혔으니 시끄러울 만도 했다. 외모, 능력, 집안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데도 지금껏 스캔들 하나 없었던 둘이 아닌가.
다 좋은데 그 둘 사이에 끼인 게 왜 하필 나냐고!
엘레노어가 머리를 덥석 움켜쥐며 침음을 삼켰다.
“사실이기나 했으면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실상은 로맨틱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전한 만남이었지만,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집 앞을 서성이는 기자들 탓에 외출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다. 백작이 단단히 경고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전보다 교묘하고 은밀해졌을 뿐.
한동안 잠잠하기만 하던 벨리움의 사교계에 그야말로 대형 스캔들이 터진 것이니 기자들이 온통 혈안이 되어 덤벼드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세상이 나를 농락하는 게 분명해.”
트레이 가득 쌓인 초대장을 뒤적이던 엘레노어가 울먹거렸다.
모든 일의 화근인 드와이트는 얼마 전 황궁으로 첫 출근을 한 뒤로 늦은 밤에야 수척해진 얼굴로 퇴근했다. 화낼 마음도 쏙 들어갈 만큼 짠한 몰골이었다.
‘그래. 앞으로 평생 가문 일은 네가 도맡아 하게 될 텐데, 이젠 그만 원망해야지.’
엘레노어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공작님이나 리안은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야? 본인들이 제일 손해일 텐데.”
곧바로 강하게 반박하며 대응에 나설 거라는 엘레노어의 예상과 달리 공작가와 후작가는 며칠째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신경 쓸 만한 가치도 없는 헛소문이라는 건가?”
침묵이 길어질수록 소문은 점점 기정사실로 굳어질 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해프닝이라 웃어넘기던 백작도 슬슬 헷갈리는지, 엘레노어에게 발렌타인 공작과 아드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넌지시 물어올 정도였다.
엘레노어는 도저히 공작과 아드리안의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지금 그 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 하나도 모르겠다.”
엘레노어가 쿠션에 얼굴을 푹 묻었다. 차라리 어서 시간이 지나서 두 사람을 직접 보고 설명이라도 들을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엘레노어는 알지 못했다. 아직 제일 큰 폭탄 하나가 남아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