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드리안은 엘레노어의 하나뿐인 친구였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 누구보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
적어도 엘레노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드리안이 멀리 가게 되어 당분간 연락이 뜸할 것 같다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훌쩍 떠나버리기 전까지는.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의 행동이 못내 서운했다.
“오랜만?”
엘레노어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팔짱을 단단히 낀 엘레노어가 따지듯 물었다.
“몇 달을 피하다가 뜬금없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오랜만이라니…….”
“피하지 않았어. 왜 그렇게 생각해?”
“그때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퉜고, 너는 날 볼 때마다 이상하게 굴었으니까.”
둘 사이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챈 드와이트가 슬금슬금 방을 벗어났다. 달칵,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상단 일을 익히려 여기저기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어.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원하던 대로 됐어?”
아드리안이 묘한 눈으로 엘레노어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어떤 면으로는.”
“잘됐네.”
엘레노어가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방 안에 냉랭한 분위기가 흘렀다.
“엘렌. 나 좀 봐.”
그런 엘레노어를 잠깐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꿀을 마구 휘저어 놓은 것 같은 금빛 눈동자가 눈앞에 바짝 다가왔다.
“미안해.”
갑자기 가까워진 얼굴에, 엘레노어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부드러운 캐러멜색 머리카락에서 못 본 새 조금 야윈 뺨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스무 해를 넘게 보았지만, 여전히 마음을 약해지게 만들 만큼 반짝반짝 잘난 얼굴이었다.
보통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꽁하던 속이 사르르 녹곤 했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엘레노어는 다시금 울컥울컥 솟는 분을 삭이려 애쓰며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멀리 갈 거면 인사라도 하고 갔어야지. 몇 줄짜리 편지는 절대 충분하지 않아.”
“알아. 바보 같은 일이었어.”
“그건 편지라고도 할 수 없어. 쪽지였지.”
“네 말이 맞아.”
아드리안은 반듯한 자세로 서서 엘레노어의 분노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야말로 얌전한 학생 같은 태도에 엘레노어의 마음도 서서히 진정되어 갔다.
엘레노어의 눈매가 평소처럼 부드러워진 것을 발견한 아드리안이 슬쩍 물었다.
“용서해 주는 거야?”
“아니.”
엘레노어가 새침하게 속눈썹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이미 그녀의 마음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아드리안은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래?”
“모르겠어. 너 싫어.”
엘레노어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작게 중얼거린 말에 아드리안이 씩 웃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엘렌.”
아드리안은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리며 그녀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툭툭 발장난을 걸던 엘레노어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무슨 일이야? 드와이트 축하해 주려고?”
“응.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머뭇대던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시에나 기억해?”
“네 조카? 당연히 기억하지. 와, 이제는 제법 많이 컸겠다.”
“응, 곧 아홉 살이 돼. 이번에 근처에 집을 얻어서 올라왔어. 요즘 아카데미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드리안의 입에서 ‘아카데미’라는 말이 흘러나온 순간 엘레노어의 등골이 오싹했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제발 ‘그 말’만 아니어라…….
하지만 세상은 늘 엘레노어의 바람을 배반했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엘렌, 네가 시에나의 선생님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
***
“끄응, 누굴 가르치는 일은 다신 하기 싫었는데. 리안이 조카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하는지 아니까 거절하기 어렵네.”
침대 위로 털썩 몸을 던진 엘레노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홉 살이 되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게 인생 최대 목표인 시에나는 드와이트의 인터뷰에 무척이나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수도로 올라오는 내내 엘레노어를 만나게 해 달라는 말뿐이었다며, 아드리안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에게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데, 어떻게 딱 잘라 거절하겠는가.
그날 이후로 사흘이 더 흘렀지만, 엘레노어는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분명 대답을 전해야 할 때였다.
‘그냥 한두 달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아드리안의 반짝거리는 두 눈을 떠올리자 마음이 슬며시 약해졌다.
‘하지만 전부 거절하겠다고 했는데! 괜히 또 귀찮아질지도 몰라.’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번뜩 정신을 차린 엘레노어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식으로 또 일개미 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었다. 돈도 있겠다, 젊음도 있겠다, 즐길 수 있는 일들이 넘쳐났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엘레노어가 책상 앞으로 가 펜대를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또 약해지고 말 테니 편지로 거절 의사를 밝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가씨, 잠시 나와 보셔야 하겠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달리 목소리에서 당황과 긴장이 잔뜩 묻어났다.
“아가씨를 찾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제 손님이요?”
“예. 그런데 그게…… 발렌타인 공작님이십니다.”
엘레노어의 입이 충격에 떡하니 벌어졌다.
카이델 이드리스 발렌타인.
발렌타인 공작은 제국에서 특별한 소개가 필요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모두가 그에 대해 알았고, 엘레노어도 그중 하나였다.
발렌타인은 제국에서 가장 부강한 가문이었다. 선대 공작이 전사하며 겨우 열아홉이었던 그 아들이 가주직을 이어받았을 때 사람들은 전부 의구심을 드러냈다. 겨우 검이나 좀 쥘 줄 아는 애송이가 그 큰 가문을 어떻게 이끌어 가겠느냐고.
하지만 일곱 해가 지난 지금, 카이델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카이델은 제 선조들처럼 뛰어난 무인이었을 뿐 아니라 완벽한 행정가였다. 그는 기계처럼 완벽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며 공작령을 더욱 융성하게 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를 따라다니는 소문들은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종류의 것들이 많았다. 감정이라고는 모르는 냉혈인간이라거나, 사람을 눈빛으로 얼려버린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허무맹랑하게 부풀려진 괴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를 상대하려 하니 엘레노어는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도대체 공작이 왜 나를?’
엘레노어의 작은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와 실수로라도 얽힌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파티장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을 제외하면 그와 그녀 사이의 접점은 전혀 없었다. 그마저도 아주 먼 발치에서 스치듯 본 것이 전부였다.
도대체 뭐야! 뭔데!
엘레노어는 엄지를 잘근잘근 씹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응접실로 향했다.
공작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옹송그렸다. 드와이트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그보다도 한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딱 벌어진 어깨와 넓은 등이 존재만으로 묵직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공작의 뒤에 선 엘레노어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발렌타인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엘레노어 에버렛입니다.”
엘레노어가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공작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엘레노어의 숨이 턱 하니 막혔다.
공작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멀리서 언뜻 보았을 때도 참 잘생긴 얼굴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가까이서 본 그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밤처럼 새까만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흰 피부가 금욕적이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반면 반듯한 이마에서 곧고 높은 콧대, 날카로운 턱선으로 이어지는 굵은 선은 지극히 남자다웠다.
엘레노어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던 카이델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은 사과하겠다. 오늘의 결례에 대해서는 차후에 적절히 보상하도록 하지.”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조금 느릿하게 뱉는 말에는 듣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결례라니요. 이렇게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엘레노어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치자 카이델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런데 왜…… 아무 말을 안 하시지?’
카이델은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이나 어색하게 그를 보며 미소 짓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일단 앉아서 차라도 한잔하지 않으시겠어요?”
카이델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엘레노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녀에게 손짓해 차를 내어오라 일렀다.
서먹한 침묵 속에 달그락대는 다기 소리가 간간이 이어졌다. 어색해서 몸이 배배 꼬이기 직전, 카이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답신이 왔더군.”
“답신이라면……?”
카이델의 시선이 엘레노어에게 그대로 내리꽂혔다. 네가 보냈으면서 무슨 소리 하느냐는 눈빛이었다.
다른 소문은 몰라도 사람을 눈빛으로 얼려 버린다는 것은 완벽하게 사실에 근거한 소문이었다. 그의 기운에 짓눌린 엘레노어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실은 공작가에서 편지가 왔다는 것조차 몰랐다. 반쯤 뜯다 지쳐 드와이트에게 답신을 전부 맡겼기 때문이다.
‘드와이트, 이 멍청이가! 공작가에서 온 편지 같은 건 나한테 따로 말을 했어야지!’
속으로는 드와이트를 향해 욕을 진탕 퍼부으며, 엘레노어가 밝게 대답했다.
“네, 답신이요! 제가 보냈죠. 네, 맞아요.”
“이유가 뭐지?”
카이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조건이 마음에 차지 않았나? 그대가 무엇을 요구하든 최대한 맞춰 줄 의향이 있다고 한 것 같은데.”
“조건의 문제가 아니에요. 저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럴 만한 재능도 없고요.”
“영애는 겸손이 지나치군.”
카이델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툭 내뱉었다. 분명 칭찬인 것 같은데 어쩐지 혼나는 기분이었다. 엘레노어가 죄송하다는 말을 간신히 삼켜냈다.
“알고 있겠지만 내게는 여덟 살 난 동생이 하나 있다.”
카이델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엘레노어는 편지를 읽지 않아 아무것도 몰랐지만,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거절한 이야기로 그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만남을 요청한 것은 그만큼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
잠시 말을 고르던 엘레노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공작님께서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발렌타인 공작가라면 저보다 유능하고 똑똑한 가정교사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텐데요.”
카이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깃든 미묘한 감정을 도무지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를 잠시 바라보던 엘레노어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공부하는 재주를 조금 가지고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저는 아카데미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않은 백작 영애입니다. 제 오라버니께서 저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과하게 자랑하신 부분이 많아요.”
“단순히 데미안의 공부만을 염려했다면 나도 굳이 그대를 찾지 않았을 거야.”
카이델이 갈등하듯 자꾸만 입술을 움찔거렸다. 엘레노어는 재촉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를 기다려 주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카이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디 재고를 부탁하지. 일단 한 번만 그 애를 만나 보았으면 해. 그때 다시 거절하더라도.”
내내 완벽한 조각상 같던 카이델의 얼굴에 희미한 실금이 가 있었다. 어딘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무척이나 괴로운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공작이라는 지위에 굽힌 것도 아니었고,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눌린 것도 아니었다. 그 순간의 공작은 너무 지쳐 보여서 도저히 그의 부탁을 내칠 수가 없었다.
카이델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편한 날짜를 편지로 알려달라고 말하고 떠나갔다. 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마차가 떠나가고, 엘레노어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얼어 있었는지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공작 앞에서 이 정도면 선방한 거지. 거절은 못 했지만, 그냥 한번 만나 보는 것뿐인데 뭐.”
그때 가서 거절하면 돼.
엘레노어는 불안한 예감을 애써 몰아내며 방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된 것이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이게 다 드와이트 그 자식 때문이라며 엘레노어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엘레노어는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