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드와이트 에버렛, 황실 공채 수석 합격!’
제국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기사 제목이었다.
엘레노어는 푹신한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이어지는 인터뷰를 마저 읽어 나갔다.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황실에서 어떤 업무를 맡게 되셨나요?
: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늘 꿈꾸던 일이라 무척 설레고 기쁩니다. 최선을 다해서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연습하면서는 덜덜 떨더니. 역시 실전에 강하다니까.
엘레노어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합격자 중에서도 눈에 띌 만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셨는데요. 스물넷의 나이로 최연소 합격자라는 타이틀도 가지게 되셨고요! 그 비결이 무엇인가요?
: 거기에는 제 쌍둥이 동생 엘레노어의 도움이 컸습니다. 엘레노어가 정말 똑똑하거든요.
-혹시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고도 입학을 포기해 화제였던, 그 엘레노어 양인가요?
: 예, 맞습니다. 제 동생이지만 공부 머리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니까요. 가르치는 건 또 얼마나 잘하는지, 핵심만 콕콕 짚어 주는데…….」
엘레노어의 손에서 신문이 파스슥 구겨져 들어갔다.
엘레노어, 엘레노어, 엘레노어!
한 페이지 전체가 그녀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팔불출을 어쩌면 좋을까.
엘레노어는 씩씩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드와이트!”
소파에 반쯤 누워 쿠키를 오물거리던 드와이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하고 곱상한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에, 엘렌.”
“당장 설명해.”
그의 앞에 구겨진 신문을 툭 던지자 드와이트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그래도 전부 사실이잖아. 난 없는 얘긴 안 했어.”
“약속이랑 다른 게 문제지. 기본서 위주의 철저한 예습과 복습! 기출문제 분석! 그렇게 대답하기로 했잖아. 기억 안 나?”
“그러고 보니 엘렌, 너도 내 인터뷰 안 보기로 약속했잖아.”
“나는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엘레노어가 드와이트의 손에 들린 쿠키를 빼앗아 크게 베어 물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 쌍둥이의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드와이트가 슬금슬금 그녀의 곁에 따라 앉았다.
“엘렌, 너는 왜 그렇게 나서는 걸 싫어해? 내가 너처럼 똑똑했으면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을 텐데.”
“난 관심받는 거 싫어. 그냥 평생 이렇게 뒹굴뒹굴하면서 편하게 살고 싶다고. 드와이트, 네가 벌어온 돈 펑펑 쓰면서.”
엘레노어의 말에 드와이트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말은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돈 많은 백수가 내 인생 신조야. 기억해 둬.”
***
엘레노어는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났다.
전생의 그녀는 고여진이라는 평범한 한국 여성이었다.
외모도 평범, 성격도 평범. 이왕 평범할 거라면 집안도 평범했으면 좋았을 텐데, 여진은 소위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여진은 좁고 습한 집에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부모님과 똑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학창 시절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교에 들어갔고, 스무 살부터는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뛰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모았다.
치열한 강사 일을 택한 것도 결국은 돈 때문이었다.
바닥부터 시작했지만, 여진은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으며 이름을 알렸다.
밤새가며 만든 수업 자료는 매번 원장의 조카딸이라는 동료 강사에게 빼앗기고, 새벽까지 학부모들의 전화에 시달리면서도 여진은 악착같이 버텼다.
갚아야 할 빚이 있었고,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진 쌤, 사람이 참 독해. 가끔 보면 무섭다니까?”
“일밖에 모르는 것 같더라. 그럼 뭐해. 매번 윤 쌤에게 전부 뺏기기만 하는데.”
“그렇게 호구처럼 다 참아 주는 건 멍청한 거지. 얌체처럼 구는 윤 쌤도 윤 쌤이지만, 여진 씨도 진짜 문제야. 혼자 착한 척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백만금을 줘도 난 그렇게 안 살래. 절대 그렇게는 못 살아.”
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독하게 일한 끝에 여진은 빚을 전부 갚고 학원 근처의 고급 아파트 한 채를 계약했다.
부동산에서 도장을 쾅 눌러 찍었을 때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는 정말 나를 위해서 살 거야. 나만을 위해.’
그리고 두 달 뒤, 출근길에 쓰러진 여진은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겨우 서른셋, 사인은 과로사였다.
이 악물고 치열하게 살아온 대가가 과로사라니!
차가운 아파트 복도에 쓰러진 제 육체를 내려다보며 여진이 눈물을 터뜨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대충 적당히 살 걸 그랬다. 하고 싶은 건 해 보고, 쉬고 싶을 땐 쉬면서.
뒤늦게 후회해 봐야 이미 늦은 일이었다.
***
하늘도 좀 너무했다고 생각했던 걸까.
“네 이름은 엘레노어란다. 엘레노어 에버렛.”
여진이 번쩍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금발 신사의 품에 안겨 빽빽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분명 처음 듣는 낯선 언어였지만 신기하게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걸 환생이라고 하나……?’
박물관에서나 보았던 것 같은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천장을 올려다보던 엘레노어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몇 주간 주변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아무래도 그녀는 백작 영애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옆에 누워 칭얼거리는 남자 아기는 그녀의 쌍둥이 오빠일 테고.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변화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지만, 상황 판단을 마친 엘레노어는 곧 쾌재를 불렀다.
‘이번 생은 팔자 고치고 살 수 있겠다!’
내내 고생길만 걸었던 전생과 달리 이번 생의 엘레노어에게 펼쳐진 것은 아름다운 꽃길이었다.
백작가는 부유했고, 부모님은 온화하며 지적인 사람들이었다. 쌍둥이 오빠인 드와이트도 순한 성격으로 그녀를 잘 따랐다.
“엘렌! 정원에 놀러 나가자.”
“햇빛이 강하잖아. 피부 타. 싫어.”
“흥. 어제는 흐려서 싫다고 했잖아. 엘렌은 거짓말쟁이야!”
매번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어울려 주는 것은 퍽 피곤한 일이었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면 드와이트에게 집안일을 전부 떠맡길 생각이었기에 그 정도 귀찮음은 감수할 만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으려는 엘레노어의 야심 찬 계획에 약간의 차질이 생겼다. 호기심에 슬쩍 쳐 본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지나치게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이다.
델른의 아카데미는 수석은커녕 합격도 어려운 곳이었다. 마치 한국의 S대처럼.
“교수 인생 10년 차, 이런 학생은 처음입니다! 엘레노어 양은 확실히 천재성이 있어요. 제가 제대로 키워 보고 싶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울며불며 매달려 입학만은 막았지만, 백작의 관심이 그녀에게로 향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백작은 은근슬쩍 그녀를 집무실에 불러 그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게 했다.
‘이러다간 가문을 떠맡게 생겼어. 안 돼!’
엘레노어는 제 쌍둥이 오빠를 제대로 교육하기로 마음먹었다.
드와이트는 특별히 공부에 재능이 있지는 않았지만, 성실함만은 탁월한 학생이었다.
엘레노어는 전생의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를 전부 그러모아 드와이트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드와이트는 빡빡한 시간표에 툴툴거리면서도 엘레노어의 말에 곧잘 따라주었다. 서서히 그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백작도 장남인 드와이트를 다시 주목했다.
“엘렌, 나 합격이래!”
“진짜 잘됐다! 아버지께도 말씀드렸어?”
드와이트가 수석 합격 소식을 가져온 이후로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 남은 것은 편안하고 게으르게 여생을 즐기는 것뿐이었다.
내 사전에 더 이상의 노동은 없다!
……고 생각했었는데, 상황이 조금씩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이게…… 다 뭐예요?”
“아가씨 앞으로 온 서신입니다.”
“전부 다요? 아버지나 드와이트 앞으로 온 게 아니고요?”
집사 알베르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는 제 앞에 산처럼 쌓인 편지 더미를 바라보다가 할 말을 잃었다.
이 불안한 예감은 뭘까.
잠시 머뭇거리던 엘레노어가 편지 하나를 뜯어 펼쳤다.
「친애하는 엘레노어 에버렛 영애.
안녕하십니까. 에드먼드 젠킨스 백작입니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서 에버렛 영식의 인터뷰를 읽고 아주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 아들이 곧 아카데미 입학을 준비…….」
탁. 엘레노어가 다급하게 편지를 내려놓았다.
‘세상에 이런 끔찍한 편지가 있나.’
엘레노어가 어깨를 바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다 읽어 보지도 않고 편지를 내팽개친 엘레노어는 떨리는 손으로 다음 편지봉투를 뜯었다.
「제 아들을 맡아 가르쳐 주시기만 한다면 보수는…….」
「제 딸의 선생님이 되어 주시기를…….」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통과만 한다면…….」
다음, 다음, 그다음.
편지를 뜯는 엘레노어의 손길이 점점 거칠어져 갔다. 전부 입이라도 맞춘 것인지 내용은 틀로 찍어 낸 듯 비슷했다.
‘제 아이의 선생님이 되어 주세요.’
산처럼 쌓인 편지를 반쯤 뜯어 본 엘레노어가 탈진한 것처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문에 실린 드와이트의 인터뷰는 그야말로 엄청난 파급력을 자랑했다.
전생에서 이런 편지들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돈이라면 얼마를 원하든 그대로 주겠다니, 이만큼 달콤한 제안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이제 엘레노어는 아무 일도 할 필요 없는 부잣집 아가씨였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낮잠이나 즐기고, 풍경 좋은 곳이나 구경 다니며 유유자적 살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다.
엘레노어가 질린 얼굴로 편지 무더기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그런 엘레노어를 지켜보던 알베르가 친절하게 물어왔다.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그럼 따뜻한 차라도 한잔……?”
“아니요. 차보다는 드와이트 좀 가져와…… 아니, 데려와 주실래요?”
***
“엘렌, 손에서 쥐가 나. 좀 쉬었다가 하면 안 돼?”
“생각해 봐. 되겠니?”
엘레노어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우아하게 대꾸했다. 드와이트는 저릿한 손을 주물러 가며 다시 거절 답신을 쓰는 데 골몰했다.
드와이트에게 답신을 맡긴 엘레노어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누가 뭐라든 전부 거절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사건인 원흉인 드와이트가 이 문제를 해결할 테니, 그녀는 애초의 계획대로 편안한 백수 라이프를 누리게 될 것이다.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
‘며칠 여행이나 다녀올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수도에서 좀 벗어난 곳으로…….’
달콤한 상상을 펼치던 그때, 알베르가 똑똑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누구지?
설핏 눈썹을 찡그린 엘레노어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의 가슴팍이 그녀의 시야를 턱 가로막았다.
“아드리안 블레이크 소후작이십니다.”
집사가 입을 열기 전부터 엘레노어는 손님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챘다. 그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훅 끼쳐 왔기 때문이다.
엘레노어가 턱을 들어 눈앞의 남자와 당당히 눈을 맞췄다. 아드리안이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여상히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엘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