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138화 (138/139)

제 138 화

순식간에 키안의 몸에서 폭발하듯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키안의 옆에 있던 은빛안개가 날개를 펼치더니, 키안과 헬로이즈를 감싸 날아오는 화살로부터 키안을 보호했다.

“하아, 은빛안개.”

키안은 방패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은빛안개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키안! 늦지 않아 다행이다.”

놀라 고갤 들자, 세이란이 대회장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와 동시에 키안에게 화살을 쏘았던 살수가 목에 단검을 맞고 바닥으로 쓰러지는 게 보였다. 세이란이 살수를 향해 단검을 던진 모양이었다.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우린 전하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장님께서 블랙이 전하라고 하셨거든요.”

황실 기사단의 드레이크가 세이란을 알아보곤 기쁜 듯 말했다.

“내가 블랙인 건 맞다. 하지만 저기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는 이는 내가 아니다.”

“그럼 대체 누구인 겁니까?”

세이란의 표정이 어두웠다. 차마 자신의 입으론 말할 수 없는 듯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블랙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는 냉혹한 얼굴로 말했다.

“키안, 내가 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 황실 기사단에게 명한다. 테란국의 기사와 그들에게 가담한 반역자를 붙잡는다.”

세이란의 명령이 떨어지자, 블랙 기사단과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이 대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순식간에 테란의 기사와 에버콘 공작가의 기사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세이란 님.”

키안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분명 블랙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런데 세이란이 살아 있었다.

“깨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건만. 운명 중에서 피해가지 않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요, 폐하.”

폐하라고? 키안이 놀라 고갤 들자, 언제 왔는지 엘렌이 쓰러져 있는 블랙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블랙은 유스나타 제국의 황제 폐하십니다.”

엘렌의 선언에 그제야 세이란이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은 유스타나 제국의 황제를 죽인 반역자이다.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 순간 엘렌이 손을 뻗어 블랙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겼다. 그러자 창백한 얼굴의 황제인 윈슬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헙!”

“말도 안 돼.”

경기장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반역자라고 했던 블랙이 황제 윈슬러였다.

그렇다는 건, 테란과 에버콘 공작가가 황제를 암살한 것이다.

“맙소사. 폐하.”

귀족들은 물론 제국민의 얼굴에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이 모든 사실이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폐하께서 나를 대신해 블랙의 가면을 쓰셨다.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 계셨던 거지.”

세이란의 목소리에 담긴 고통에 키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엘렌이 진을 보내, 날 막사 안에 감금시켰다. 그리고 의식을 되찾은 폐하께서 나 대신 블랙으로 대회장에 선 것이다.”

“맙소사.”

키안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믿기지 않았다. 황제인 윈슬러가 아들인 세이란을 대신해 죽음을 맞이하다니. 키안은 세이란이 어떤 심정일지 짐작이 되었다.

그래서 당장에라도 그에게 달려가 꼭 끌어안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키안, 나머지는 내가 해결하겠다. 반역자를 처단하는 일은 이제부터 내 일이다.”

세이란의 목소리에 키안은 정신이 들었다.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반역자를 붙잡아야 했던 것이다.

“황제가 아들인 세이란 대신 대가를 치른……. 윽!”

헬로이즈가 고통스러운 듯 심장에 박힌 화살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자신 역시 목숨을 끊으려는 듯 화살을 빼려 했다. 그러자 키안이 그녀의 손을 꽉 쥐어 제지시켰다.

“헬로이즈, 넌 죽을 수 없다. 살아서 네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키안은 이고르와 헬로이즈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죽기 위해 키안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이미 치른 건가? 너는 또다시 네 혈족에게 배신을 당한 것 같으니 말이다.”

서늘한 표정으로 헬로이즈의 심장에 박힌 화살을 보았다. 마지막 순간 테란은 헬로이즈를 버렸다.

“동정 따윈 하지 않는다. 이 모든 건 너의 선택이니까.”

키안의 싸늘한 목소리에 헬로이즈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에필로그

유스타나 제국의 법정 안으로 르위스 리셋과 그의 딸이 들어섰다.

그러자 법무대신이자 재판장인 에드윈 리치문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르위스 리셋에 대한 판결을 내리겠다. 황제 폐하의 명에 의해 쌍둥이에 대한 관습법이 폐지되었다. 이로써 르위스 리셋 역시 죄가 없다.”

에드윈 리치문트의 선언에 법정에 있던 귀족들과 참관을 위해 제국민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법정에 참석한 제국민의 대부분은 쌍둥이를 형제로 갖고 있거나 자식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순식간에 법정 안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르위스 리셋의 아내를 죽인 리셋 백작은 혈족을 죽인 죄를 물어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 르위스 리셋, 할 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

에드윈의 말에 르위스 리셋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딸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내와 전, 이 아이의 이름을 짓지 못했습니다. 만약 허락한다면, 제 딸아이의 이름을 키안이라고 짓고 싶습니다.”

자신의 딸을 구해준 키안 레녹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게 분명했다.

“허락하겠습니다.”

그때 법정 문이 열리며, 키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키안의 등장에 귀족들은 물론, 제국민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예를 갖췄다.

“공작님.”

원형 경기장에서 일어난 사건 이후, 제국민들은 키안과 은빛안개를 신성한 존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키안의 부탁에 의해 귀족들과 제국민들은 키안을 여전히 레녹스 공작이라 불렀다. 이로써 키안 레녹스는 유스타나 제국에서 첫 여공작이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르위스 리셋이 키안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때 르위스 리셋의 품에 안겨 있던 키안 리셋이 슬며시 키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에게 주는 거야?”

“제가 가장 아끼는 것입니다.”

키안이 아이가 건네는 것을 받아 손을 펼쳤다. 사탕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고맙다. 아껴 먹을게.”

“이로써 르위스 리셋에 대한 재판이 끝났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르위스 리셋이 아이를 안고 법정을 나가자, 에드윈이 키안에게 다가왔다.

“황제 폐하는 어쩌시고 혼자 오신 겁니까?”

얼마 전 세이란이 황제인 윈슬러를 대신해 황좌에 올랐다.

“황제가 되신 후에 더 바빠지셨습니다. 그래서 전 또 혼자고요.”

“안타깝군요. 모든 게 해결되면, 꽃길일 줄 알았는데. 또 일에 파묻혀 지내시다니 말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모두 꽃길이 예약된 것은 아니더군요. 그걸 새삼 깨닫는 중이랍니다.”

키안이 맞장구를 치자, 에드윈이 말을 멈췄다. 그러곤 웃음기를 지우곤 키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왜 이곳까지 절 찾아오셨는지 말씀하십시오. 혹시 헬로이즈 공주님에 대해 듣고 싶어 온 것이라면, 한발 늦으셨습니다. 한 시간 전에 테란으로 떠났거든요.”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다. 테란은 유스타나 제국과의 전쟁을 피할 목적으로, 모든 일을 헬로이즈가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처벌을 황제가 된 세이란에게 떠넘긴 것이다.

하지만 세이란은 자국의 국민만 처벌할 수 있다는 제국법을 근거로 헬로이즈와 살아남은 테란의 용병들을 테란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테란까지 가야 하다니 걱정입니다.”

에드윈의 말에 키안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치문트 공작님께선 마음이 넓으시군요. 유스타나를 위험에 빠뜨리려 한 자에게 동정심을 느끼시다니 말입니다.”

키안의 냉정한 목소리에 에드윈이 고갤 들었다. 헬로이즈 공주가 걱정되어 이곳까지 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키안은 감정을 숨기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아무리 죄를 지었지만, 혈육이었다. 천 년을 이어온 질기고 질긴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제가 누군가를 대신해 걱정해 드리는 겁니다. 무엇보다 동정심은 법에 저촉되는 것도 아니라서.”

에드윈의 말에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마운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공작님, 벨라와는 앞으로 어쩌실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에드윈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게…….”

“벨라는 직진남을 좋아합니다. 싫다고 자꾸만 밀어내더라도 물러서지 마십시오. 고양이과에 속하는 레이디라 그렇거든요.”

“고양이과라면……? 죄송합니다. 제가 레이디들의 성향에 관련된 책을 읽긴 했지만 아직 서툽니다.”

에드윈의 대답에 키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책으로 연애를 배우려 하시다니. 앞으론 도서관 근처에는 가지도 마십시오.”

“그럼 어떻게?”

“당연히 아키텐 공작가로 가셔야죠. 직접 부딪혀 마음을 얻어내세요. 아마, 지금쯤 애가 닳아 공작님께서 나타나시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키안이 힌트를 주자, 그제야 에드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대성당에서 뵙겠습니다.”

에드윈이 흥분한 얼굴로 법정을 나갔다.

“휴우, 이제 나도 집으로 가볼까? 카이우스가 기다리겠어.”

사실 마음 같아선 세이란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가 된 세이란은 잠깐의 짬도 낼 수 없을 만큼 바빴다.

아마 지금도 귀족회의에서 에버콘 공작가의 처벌과 앞으로 바꿀 법률을 두고 설전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키안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법정을 나왔다. 그 순간 강한 손이 키안의 손목을 붙잡더니, 힘껏 끌어당겼다.

“여기 있었군. 네가 보이지 않아 찾아다녔다.”

“회의는 벌써 끝난 겁니까?”

“끝나긴. 밤새 계속될 것 같아, 도망쳐 나왔다. 네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

세이란이 키안을 꼭 끌어안고는 길어진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야 기분이 좋아졌다.”

키안 역시 팔을 뻗어 그를 꼭 끌어안았다.

“도망쳐 나오셨다니, 아센 공작님께서 머리끝까지 화가 나셨겠군요.”

“설마 날 질책하는 건 아니겠지? 사실 나도 화가 났다. 잘못된 법률이며 관습들을 없애려는 것뿐인데, 무턱대고 반대만 하다니. 그렇게 안 봤는데 앞뒤가 아주 꽉 막혔다니까.”

세이란이 불만을 토로하자, 키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이 천 년을 이어온 유스타나였습니다. 한꺼번에 바꾼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의견을…….”

“나도 안다. 하지만 마음이 왜 이렇게 조급한지 모르겠다.”

세이란이 초조한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그러곤 키안을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되신 지 이제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 조급해하지 마세요. 분명 폐하께선 좋은 황제가 될 것입니다.”

키안의 위로에 잔뜩 찌푸려져 있던 세이란의 미간이 펴졌다.

“쳇, 처음부터 너에게 왔었어야 했어. 너와 함께 있으면 초조함도, 불안감도 다 사라지거든.”

“폐하께서 느끼시는 초조함은 제국민을 아끼는 감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니, 불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폐하께서 바꾸신 제국법으로 인해 르위스 리셋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르위스 리셋과 같은 이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역시, 나에겐 너밖에 없다.”

세이란이 고갤 숙여 입술을 겹쳐 왔다. 뜨거운 혀로 입술을 쓸고는 유혹하듯 키안의 입술을 헤집었다.

“흣-”

깊숙이 혀를 얽고 농밀하게 키스하던 세이란이 갑자기 고갤 들었다.

“널 안은 지 얼마나 됐지?”

“네?”

키안이 얼굴을 붉히며 반문했다. 그러고 보니 반역사건 이후 한 번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이렇게 가끔씩 입술을 겹치긴 했지만, 그의 말처럼 함께 있진 못했었다.

“짜증이 났던 이유 말이다. 널 안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키안의 손목을 붙잡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마음 같아선 내 침실로 가고 싶지만, 너무 멀어.”

그러곤 셀서스 궁에 있는 방 중 아무 곳이나 열고 들어갔다.

“잠깐, 여긴……. 안 됩니다. 누가 올지도 모르는데…….”

“걱정 마. 내가 있는데 간 크게 우릴 방해할 자는 없으니까.”

“하지만…….”

“하지만은 더 이상 없다.”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키안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곤 고갤 숙여 깊숙이 혀를 묻어왔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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