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137화 (137/139)

제 137 화

“마, 말도 안 돼.”

키안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가, 세이란이 화살에 맞았다.

그리고 붉은 피가…….

“전하! 황태자 전하!”

패트리샤가 창백해진 얼굴로 무릎을 꿇고는 화살에 맞아 쓰러진 블랙의 상태를 살폈다.

순간 원형의 경기장에 있던 모두가 놀라, 숨을 죽였다.

“황태자 전하라고? 용병 블랙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키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세이란에게 가야 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팔에 상처가…….”

드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사무엘 스텐호프의 목소리도.

하지만 키안은 충격으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죽었다, 세이란이. 헬로이즈의 말처럼 나를 살린 대가로 그가…….’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여전히 심장은 찢기는 듯 아팠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레녹스 공작 역시 반역자다. 블랙을 돕는 이는 모두 유스타나 제국의 반역자다!”

제임스 에버콘의 목소리가 원형 경기장을 울렸다. 그러자 경기장에 있던 모든 이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키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키안. 아니, 예언자 프로피티아.”

두 사람의 거리는 소리쳐야 들릴 수 있을 만큼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키안은 헬로이즈의 음성이 바로 앞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천 년 전에도 지금도. 자신의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다니.”

키안의 말에 헬로이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각성한 모양이군. 대마법사 프로피티아로.”

“조금 전 모든 게 생각났습니다. 왜 우리가 환생해야 했는지 말입니다.”

아마 세이란이 죽는 모습을 본 순간, 지독한 분노와 함께 의식의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던 뭔가 깨어난 듯했다.

키안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은빛안개가 따랐다.

키안이 블랙 앞에 서자, 블랙 기사단이 뒤로 물러섰다. 붉은 피가 흙을 적셔 검게 변해 있었다.

뚝뚝! 눈물이 또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때문에…….”

키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세이란이 그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을 살려야 했던 이유 역시도.

‘나와 똑같은 아픔 때문이었어.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로 지독한 고통 때문에 그랬던 거야.’

키안은 손으로 심장을 꽉 눌렀다. 심장이 타는 듯 뜨거웠다. 한 번도 느껴보지도 못한 강력한 힘이 핏줄 하나하나에서 각성하듯 깨어나기 시작했다.

“윽-”

그 지독한 뜨거움에 키안이 눈을 감았다. 그러곤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상자를 꺼냈다.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에서 가져온 상자. 이 상자 안에 자신의 힘이 봉인되어 있었다.

“테라의 주인이자, 루멘을 관장하는 프로피티아의 명이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키안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은빛 늑대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곤 탐스러운 은빛 털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등에 은빛 날개가 돋아났다.

“수호수다! 제국를 지키는 전설의 수호수야!”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원형 경기장에 모여 있던 구경꾼은 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전설의 수호수 옆에 서 있는 키안 레녹스 공작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신비로운 빛에 휩싸인 키안은 수호수의 주인인 빛의 여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맙소사. 루멘입니다. 빛의 수호자이자, 유스타나 제국의 수호신입니다.”

키안이 고갤 들자, 의자에 앉아 있던 제국민들이 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프로리티아, 대륙의 마법사이던 네가 유스타나에선 빛의 수호자가 된 모양이군. 천 년 전에 너 역시 인간들을 이 땅에서 모두 사라지게 만들려 했던 마법사의 일족이었는데 말이야. 만약 인간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배신감을 느끼겠지?”

헬로이즈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키안의 모습이 변한 것과는 달리 헬로이즈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인간을 모두 죽이고, 마법사의 땅을 만들려 했던 건 바로 너다. 그 욕심 때문에 쌍둥이 동생이었던 날 죽였지.”

그래서였다. 유스타나 제국에서 쌍둥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도록 하는 지독한 관습법을 만든 이가 바로, 대법사인 마기코스였다.

“인간들은 참 어리석더군. 내가 죽기 전 걸어놓은 주술을 믿고 천 년을 살아오다니 말이야. 잔혹하게 제 친자식을 죽이다니. 그러고 보면, 인간이 더 무서운 존재인지도 모르지.”

헬로이즈가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곤 키안이 서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그녀의 손엔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검이 들려 있었다.

“세 번째 신탁, 그 신탁의 주인이 바로 나다. 전 대신관이었던 엘렌이 말해주더군. 쳇, 루틴가에 태어난 주제에 테란을 배신하고, 유스타나 제국의 대신관이 되다니. 하지만 상관없다. 그녀가 받은 신탁의 내용대로 유스타나 제국은 내 손에 망하게 될 테니까.”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에 냉기가 어렸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군. 네가 왜 환생했는지 말이다.”

“내가 환생한 이유는 천 년 전 이루지 못했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너와 구스타프, 그리고 유스타나 제국을 없애는 것. 그리고 너와 구스타프의 피로 얼룩진 그 땅 위에 테란을 세울 것이다. 마법사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혈족이 대륙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

“마기코스, 너는 이번 생에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번엔 구스타프가 아니라, 내 손에 죽게 될 테니까.”

키안이 손을 들었다.

“테라의 주인이자, 루멘의 수호자인 프로피티아가 명한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 붉은빛을 띤 검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모든 인연의 끈을 잘라낼 때다. 혈족을 죽인 네가 다시 태어난 건 세이란의 간절함 때문이었다. 네가 경멸하고 하찮게 여기는 인간의 마음이 너에게 속죄할 기회를 준 것이다. 하지만 넌,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신탁이 내려진 대로 이곳에 서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신탁의 내용대로 널 죽이고 유스타나를 …….”

“아닙니다. 그 신탁은 거짓입니다.”

순간 경기장 안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갤 들자, 전 대신관인 엘렌이 서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모든 선택은 헬로이즈 님이 하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쌍둥이 여동생인 프로피티아 님을 죽인 죗값 말입니다. 용서를 비십시오. 혈족을 죽인 대가는 영겁의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죄입니다.”

“그 입 다물어, 죽고 싶지 않다면.”

그 말과 함께 헬로이즈가 엘렌의 목에 검을 겨눴다.

“윽-”

순식간에 엘렌의 목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마기코스, 네 상대는 나다.”

키안의 말에 헬로이즈가 엘렌의 목에 겨눴던 검을 거둬들였다. 그러곤 천천히 키안을 향해 다가왔다.

“이번에도 네 심장에 내가 직접 검을 꽂아 넣겠다.”

챙! 두 개의 검이 살기를 띠고 날카롭게 부딪쳤다. 서로를 죽이기 위한 마지막 전투였다.

팽팽하게 날 선 검이 부딪힐 때마다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구경꾼들의 얼굴엔 두려움이 서렸다.

날 선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테란의 기사인 알버트가 은밀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행동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챙! 또다시 검날이 맞닿았고,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와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부딪쳤다.

“넌 일족의 배신자다. 널 죽인 걸 후회하지 않는다.”

“나 역시 네가 용서를 빌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넌 모든 걸 알고 난 후에도 또다시 똑같은 선택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이번엔 그 누구도 네 죄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챙! 맞닿았던 검이 떨어지자, 키안의 검이 날카롭게 헬로이즈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윽-”

옷을 찢고 살을 파고드는 서늘한 감각에 헬로이즈가 재빨리 몸을 틀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옆구리에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키안은 냉정한 눈빛으로 재빨리 검을 날렸다. 헬로이즈가 고통을 참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키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헬로이즈의 다리를 검으로 베었다.

서걱 소리와 함께 검에 베인 다리가 꺾이듯 바닥에 닿았다.

“헉, 헉-”

헬로이즈가 거친 숨을 내쉬며, 키안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내게 할 말은 없나?”

“웃기는 소리. 이제 시작이다.”

헬로이즈가 다시 다릴 세운 후 공격 자세를 취했다.

챙, 챙! 또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부상 때문인지 헬로이즈의 몸이 균형을 잃고 자꾸만 뒤로 밀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런 생각이 든 순간, 키안의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너무 쉬운 싸움이었다. 그리고 자신과는 달리 헬로이즈는 인간의 모습…….

“한눈팔 여유가 있나 보군.”

그 말과 함께 푸른빛을 뿜어내는 헬로이즈의 검이 키안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방심한 사이 날아온 검이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피하며, 키안 역시 헬로이즈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엇? 뭐지……?’

그 순간 헬로이즈는 모든 걸 포기한 듯 피하지 않았다.

‘대체 왜……?’라고 생각한 순간, 키안은 검을 멈추려 했다. 하지만 이미 검이 뼈를 뚫고 들어가 심장 깊숙이 박혔다.

그 순간 뜨겁고 진득한 피가 얼굴에 튀자, 눈을 질끈 감았다.

“읏-!”

재빨리 손등으로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낸 키안이 눈을 떴다. 그 순간 공포로 떨리는 헬로이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고르!”

‘이고르라고?’

키안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자신의 검에 찔린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이고르가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된…….”

키안은 말을 멈췄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숲에서 자신의 검에 찔린 이고르가 헬로이즈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원형 경기장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그녀를 위해 몸으로 검을 막아선 모양이었다.

“이고르, 네가 왜?”

“저는 공주님의 호위기사입니다. 그것이 제 의무……. 콜록콜록!”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안 돼. 그럴 필요 없었다.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공주님께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쯤은.”

헬로이즈가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이고르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공주님께서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헬로이즈가 허망한 표정으로 이고르를 보았다. 사실 헬로이즈는 세이란을 죽인 후 자신 역시, 쌍둥이 여동생인 키안의 손에 죽을 작정이었다.

“용서를 비십시오. 로렌스 루틴 공작님을 잃은 슬픔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시면 안 됩니다. 하아, 공주님의 혈족에게……. 윽!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하는 일 또한…….”

“이고르, 정신 차려. 이고르!”

헬로이즈가 검을 내려놓고는 이고르의 몸을 흔들었다.

그 순간 테란의 기사인 알버트가 테란의 살수에게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날카로운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더니, 헬로이즈의 심장을 관통한 것이다.

순간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극심한 고통으로 흔들렸다.

“헬로이즈!”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테란의 살수가 자기 나라의 공주인 헬로이즈를 향해 화살을 쏘다니.

놀란 키안이 헬로이즈를 보호하기 위해 몸으로 막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화살이 키안의 심장을 향해 날아왔다.

‘제길! 이제야 깨닫다니. 테란은 처음부터 헬로이즈까지 죽일 계획이었던 거야.’

키안은 테란국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분노로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을 막기 위해 검을 들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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