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136화 (136/139)

제 136 화

챙, 챙!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검날이 맞부딪혔다.

“헉- 헉!”

거친 숨을 내쉬며 리셋 부족가의 용병 맥스가 세이란을 응시했다. 검을 사이에 두고 블랙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맥스는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버텼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제길!”

챙! 맞닿았던 검이 떨어졌다 다시 부딪쳤다. 맥스는 뒤로 물러서며 블랙의 허점을 찾아 다시 공격했다.

“헉-”

천이 잘리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맥스의 입에서 단발마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덩치 큰 사내가 스르륵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공격하기 위해 검을 날린 순간, 블랙의 검이 그의 다리를 벤 것이다.

“더 싸울 텐가?”

거친 숨을 내쉬는 맥스의 목에 예리한 검날이 겨눠졌다. 맥스는 고갤 들어 블랙을 올려다보았다.

햇살을 받고 서 있는 블랙의 눈동자가 핏빛처럼 반짝였다.

“졌습니다.”

맥스의 선언에 숨을 죽인 채 시합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이내 블랙이 맥스의 목에 겨눴던 검을 거둬들였다. 그러곤 원형 경기장의 로열석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키안이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블랙의 승리입니다. 30분 휴식 후 시합을 계속하겠습니다.”

드레이크의 선언에 블랙이 대회장을 걸어나갔다. 이제 남은 경기는 세 개였다.

“시원한 물입니다. 갈증을 풀어줄 겁니다.”

대회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엘에 시원한 물을 건넸다.

“그런데 정말 너무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예선전을 치르지 않았다고 해도 본선에 진출한 열 명의 용병 모두와 시합을 치러야 한다니 말입니다.”

물을 다 마신 세이란이 임시로 마련된 자신의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30분 후 다시 시작이다. 잠시 쉴 테니, 방해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알겠습니다, 블랙.”

노엘을 남겨둔 채, 세이란은 서둘러 막사로 향했다.

**

시합을 끝낸 후 대회장을 나가는 세이란을 보며, 키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이란 님을 만나서 알려줘야 해. 헬로이즈가 세 번째 신탁의 주인이란 사실을.’

시합이 시작되기까지 30분이란 시간이 있었다.

“어딜 가시려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계단을 지나 용병들의 막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이고르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걸 내가 말해야 하나요?”

“말씀하실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헬로이즈 공주님께서 공작님을 뵙길 원하십니다.”

그 말과 함께 이고르가 검으로 손을 뻗었다. 길목을 지키고 있던 것을 보니, 처음부터 자신이 세이란에게 갈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례하군. 타국의 호위기사가 내 앞을 막아서다니.”

키안의 싸늘한 목소리에 이고르가 말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도 일이 커지는 걸 원치 않으실 겁니다. 저희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한마디로 조용히 따라오라는 말이었다.

키안은 서늘한 눈빛으로 이고르를 쏘아보았다.

‘어떡하지? 세이란 님을 만나야 하는데.’

하지만 그를 지나쳐 가려면, 그와 싸워서 이겨야 했다.

고민하던 키안은 어쩔 수 없이 고갤 끄덕였다. 이고르의 말처럼 자신 역시 일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우선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자릴 옮겨야 해.’

키안은 순순히 이고르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앞장서세요. 따라갈 테니.”

키안의 대답에 이고르가 검에서 손을 뗐다. 그러곤 앞서 걷기 시작했다. 키안 역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언제 왔는지 은빛안개가 그녀의 옆에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잠깐, 어딜 가는 거죠?”

경기장을 빠져나가 인적이 드문 숲길로 접어드는 그를 보며, 키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더 가도 이곳은 숲이었다. 이건, 함정이 분명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키안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이고르 역시 걸음을 멈추곤 돌아섰다.

“헬로이즈 공주는 어디에 있나요?”

“공주님께선 원형 경기장에 계십니다. 잠시 후면 아주 흥미진진한 일이 일어날 예정이라…….”

“그게 무슨 말이죠?”

순식간에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잠시 후 블랙이란 용병이 죽게 될 것입니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분명 이고르 역시 블랙이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란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나 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저와 여기에 있는 테란의 기사들을 죽이지 않고는 경기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고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숲에 몸을 숨기고 있던 테란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을 살폈다.

‘이고르를 포함에 모두 열 명이야.’

키안은 검을 빼 들며 싸울 준비를 했다.

“블랙이 누군지 알았다면 실수한 것입니다. 전하께선 절대로 지지 않을 테니까요.”

키안의 입가에 떠오른 냉소에 이고르 역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테란의 기사들은 실수 따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공작님께선 블랙을 걱정해야 할 게 아니라, 스스로를 걱정해야 할 것 같군요.”

“과연 그럴까요?”

키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이 그녀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가볍게 몸을 피한 키안이 상대의 급소를 찔렀다.

“헙!”

붉은 피와 함께 기사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또 다른 검이 키안의 목을 향해 파고들어 왔다.

서둘러 죽은 기사의 몸에서 검을 빼낸 키안이 몸을 숙이곤 자신을 향해 공격해 오는 자의 다리를 힘껏 차 넘어뜨렸다.

“헉-”

챙그랑. 검을 놓친 기사가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소문대로군요. 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이고르 역시 전쟁터를 누비던 잔혹한 유스타나 제국의 은빛 늑대와 검은 사자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다.

하지만 처음 키엘체에 도착해 키안 레녹스를 보았을 때, 소문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의심했었다.

이런 몸으로 테란의 기사들을 공포에 떨게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 검을 쥔 키안을 보며,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을 쥐니 표정은 물론, 분위기가 바뀌었어. 이러다 질 수도 있겠어.’

이고르가 검을 빼 들곤 공격 자세를 취했다.

“지금부터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우린 공작님을 생포해 볼모로 쓸 작정입니다.”

키안 역시 자세를 가다듬으며, 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내 목숨을 대가로 유스타나에서 빠져나갈 심산인 모양이군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내가 쉽게 붙잡혀 주진 않을 테니까요. 은빛안개, 전하께 가.”

키안의 명령에 이를 드러내며 경계를 하던 은빛 늑대가 테란의 기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은빛안개를 보며 키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를 도우라니까…….”

챙! 그 순간 이고르의 검이 키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급소를 향해 날카롭게 파고드는 검을 막기 위해 키안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어.’

검을 든 키안의 표정이 바뀌었다.

챙, 채챙! 날 선 검날이 부딪혔다. 서로의 심장을 향해 집요하게 날아드는 검은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예리했다.

한순간의 방심이 승패를 가눌 정도로 두 사람의 검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헉, 헉-”

“하아-”

동시에 두 사람의 입술 새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이고르의 실력이 뛰어날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생각 이상이었다.

‘서둘러 끝내야 해.’

키안은 서둘러 숨을 고른 후 공격 자세를 취했다. 이번엔 기다릴 새도 없이 키안의 검이 이고르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헉-”

거친 신음 소리와 함께 옷 위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제법이시군요.”

“생각보다 말이 많군요. 과묵한 줄 알았더니 말입니다.”

키안이 서늘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리자, 이고르의 얼굴이 분노가 떠올랐다.

챙! 또다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분노가 실린 이고르의 검은 거칠었다.

힘으로 밀어붙이며 집요하게 공격해 오는 검날을 피해 키안은 몇 번이나 뒤로 물러서야 했다.

키안의 호흡이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내리며 눈 속으로 들어가자, 키안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흣-”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고르의 검이 키안의 팔을 베었다. 서늘한 검이 살갗을 파고는 감각과 함께 뜨거운 피가 팔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똑같이 되갚아주는 성격이라.”

키안의 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이고르의 눈빛이 잔혹하게 빛났다. 키안은 고통을 삼키며,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조금 전 베인 상처 때문에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쳇!”

키안은 이를 악물곤 다시 한 번 검의 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끝내야 해.’

키안이 다시 검을 들고 공격 자세를 취하자, 이고르 역시 같은 생각인 듯 검을 쥐었다.

챙! 검이 다시 부딪쳤고, 검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 역시 맞닿았다. 서로를 쏘아보는 눈빛엔 살기가 번뜩였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날 선 긴장감에 숲의 공기 역시 흐름을 멈춘 듯 고요했다.

챙! 채챙- 검날이 떨어졌다 다시 부딪쳤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한순간 두 개의 검이 서로의 심장을 향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헉-”

“윽-”

동시에 두 사람의 입술 새로 날카로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뚝뚝. 붉은 피가 검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털썩! 키안을 날카롭게 쏘아보던 이고르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러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심장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끝이 났다.

“헉, 헉-”

키안이 거친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은빛안개에게 공격을 당하던 기사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은빛안개, 가자.”

키안이 숲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하아- 제발 무사하시길. 내가 갈 때까지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키안은 세이란이 있는 원형 경기장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

“헉, 하아-”

블랙은 자신을 향해 끝도 없이 날아드는 검을 막아냈다. 이런 형태로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테란의 헬로이즈 공주와 샤론 에버콘이 손을 잡고, 제국민이 보는 앞에서 용병 블랙을 반역자로 몰다니.

“전하, 이쪽은 저희가 막겠습니다. 그러니 반대편으로 빠져나가십시오.”

그나마 다행인 건 블랙 기사단이 원형 경기장 주변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다. 함께 싸우겠다.”

“하지만 용병 블랙이 반역자가 된 이상, 황실 기사단 역시 우릴 도울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황실 기사단 역시 반역자가 될 터였다.

“제길!”

헬로이즈와 샤론 에버콘이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인 모양이었다. 용병 블랙이 황태자란 사실을 알고 있는 키안이 블랙을 돕는다.

그렇게 되면 제국민이 보는 앞에서 키안 레녹스는 반역자로 낙인찍히게 되어 있었다.

“전하, 화살입니다!”

패트리샤가 다급한 목소리로 블랙을 향해 소리쳤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휘릭! 소리와 함께 화살이 블랙의 발 옆에 꽂혔다.

“블랙을 지켜라!”

패트리샤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블랙 기사단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블랙을 에워쌌다.

휘리릭! 공기를 가르며 또다시 화살이 날아들었다. 기사들은 날아오는 검을 방패도 없이 맨몸으로 막아냈다.

“이렇게 있다간 다 죽는다.”

블랙은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폈다. 원형의 경기장 안에 귀족들을 비롯해 제국민이 있었다.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경기장 한가운데 있는 자신들을 테란의 기사와 에버콘 공작가의 용병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거기다 화살 공격까지 더해지자, 더는 도망갈 방법이 없었다.

“전하, 가면을 벗어 신분을 밝히셔야 합니다.”

패트리샤 역시 더는 방법이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블랙이 패트리샤를 향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귀족들이 있는 로열석 쪽으로 고갤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내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이더니,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살수에게 고갤 끄덕이는 게 보였다.

그 신호와 함께 살수의 손에 들려 있던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블랙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전하, 피하십시오!”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가 경기장을 울렸다. 블랙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곤 공포에 가까운 표정의 키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화살이 블랙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붉은 피가 순식간에 블랙이 입고 있는 흰 셔츠를 물들였다.

황제의 독사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