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134화 (134/139)

제 134 화

“긴장할 것 없다, 키안.”

대회장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세이란은 키안의 손을 꼭 쥐었다. 지난번 대신전의 광장에서 공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 터라, 세이란은 키안이 두려움을 느낄까 걱정인 모양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키안이 세이란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키안을 응시했다.

“너답다. 그래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뛴다.”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심장 위에 놓았다.

“어때? 느껴져?”

“네. 느껴집니다.”

“키안, 난 검술 대회에 참가할 것이다.”

“블랙으로 말입니까?”

“맞아. 블랙이란 용병으로. 또 그 표정.”

세이란이 손을 뻗어 찌푸려진 키안의 미간을 쓸어주었다. 키안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면, 말하지 않을 걸 하고 후회했다.

“널 걱정시키려고 말한 게 아니다. 내가 자릴 비우면 걱정할 것 같아 미리 말하는 거야. 어차피 내가 대회장에 들어서면 알게 될 테지만.”

“왜 참석하시려는 겁니까?”

키안의 물음에 세이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바꾸고 싶다, 유스타나 제국을.”

유스타나 제국에서 용병은 인정받지 못하는 귀족가의 차남들이었다. 한마디로 제국법에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나는 뿌리부터 바꾸고 싶다. 잘못된 법률과 맹목적으로 따르는 관습법, 그리고 신탁까지도.”

“전하…….”

“너를 포함한 많은 이들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유스타나다. 모두가 보호받는 그런 곳 말이다.”

전 대신관인 엘렌은 세 번째 신탁의 주인에 의해 유스타나 제국은 끝이 날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무너질 나라였다면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면 될 일이었다.

“이제 들어갈까?”

세이란의 말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서로를 바라본 후, 대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등장에 원형의 대회장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유스타나의 귀족들은 물론, 제국민과 대회에 참가할 용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키안 레녹스에게 향했다.

신탁이 정한 황태자비이자, 지금껏 남자라고 생각했던 황실 기사단장의 모습을 보려는 듯했다.

“드레스가 아니라 기사단의 복장입니다.”

여기저기서 키안의 복장을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회장에 모인 이들은 키안이 당연히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날 것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황태자 전하와 키안 레녹스 공작님이십니다.”

시종장 아이크의 목소리가 대회장 안을 울렸다. 아이크의 선언에 대회장에 있던 모든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지금부터 검술 대회를 시작한다. 대회에서 우승한 자에겐 신탁이 정한 황태자비가 포상을 내릴 것이다.”

세이란이 키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키안 역시 세이란의 손을 잡고는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허릴 숙였던 제국민들이 고갤 들었다. 그러곤 두 사람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 왔는지 키안과 세이란의 옆엔 은빛 털을 가진 늑대가 자릴 잡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신비로운 모습에 제국민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저건 유스타나 제국의 수호수입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수호수가 존재할 수 있는 거지?”

여기저기서 숨죽인 탄성이 새어 나왔고, 순식간에 키안을 바라보던 제국민의 시선이 바뀌었다.

신비한 힘을 지닌 제국의 수호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주인이 다름 아닌, 키안 레녹스였다.

“저건 은빛 늑대일 뿐입니다. 제국의 수호수가 아닙니다.”

제임스 에버콘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의 말처럼 제국의 수호수는 은빛 늑대와 닮긴 했지만, 특별한 힘을 지닌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이렇게 갑자기 등장할 리 없었다.

그 순간, 부우우웅- 하고 대회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검술 대회가 시작된 것이다.

**

챙, 채챙!

패트리샤의 손에 들린 검이 상대의 옆구리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순간 사내의 몸이 균형을 잃더니, 바닥에 넘어졌다.

“헉, 헉-”

바닥에 넘어진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졌다는 듯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패트리샤 역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황실 기사단의 드레이크를 향해 손을 들었다.

“이로써 본선에 진출할 열 명의 기사가 선출되었다. 오늘 시합은 이것으로 끝낸다. 다음 경기는 내일 오전 9시부터 시작될 것이다.”

오후 내내 치러졌던 경기가 끝나자 드레이크가 경기장을 나갔다. 패트리샤는 로열석에 앉아 있는 세이란에게 허릴 숙여 보인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원형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윽-”

그때 갈색 갑옷을 입은 사내가 패트리샤에게 부딪혀 왔다. 하루 종일 치러진 검술 시합으로 지쳐 있던 터라, 패트리샤의 몸이 강한 힘에 떠밀려 균형을 잃고 벽에 부딪혔다.

“이런, 미안하게 됐군. 땀 때문에 앞에 보이지 않아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패트리샤가 고갤 들었다. 그러자 덩치가 큰 갈색 눈의 사내가 서 있었다.

“시비를 걸고 싶다면 다른 데 가서 알아봐. 상대해 줄 마음 없으니까.”

덩치의 갈색 눈동자가 커졌다. 갑자기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놀란 듯했다.

“이런, 여인이었군. 소문에 검술 대회에 참가한 여인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난 거짓말인 줄 알았거든. 내 밑에 깔려 울 생각을 하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는군.”

성적인 의미가 내포된 음탕한 농담에 패트리샤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내 발밑에 깔려 살려달라 애원하고 싶지 않거든 비키는 게 좋을 거야.”

“세게 나오는데? 흥미가 돋게 말이야.”

덩치 큰 사내가 당장에라도 패트리샤에게 흥미를 나타냈다. 그러곤 천천히 다가오더니, 우악스러울 정도로 강하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쳇, 내일 본선 시합을 위해 힘을 빼고 싶지 않았는데.”

그 말과 함께 패트리샤가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사내의 손등을 찔렀다.

“윽- 젠장!”

사내가 욕설과 함께 패트리샤의 목을 조르려는 듯 커다란 손을 뻗어왔다. 하지만 패트리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사내의 손을 피한 그녀는 자신 쪽으로 기울어진 사내의 종아리를 힘껏 걷어찼다.

쿵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바닥으로 넘어지자, 패트리샤가 들고 있던 단검을 사내의 목에 겨눴다.

“여인이라고 함부로 대하면 큰코다친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군.”

사내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목에 단검을 겨눴는데도 웃고 있다니. 순간 패트리샤는 눈앞의 덩치가 미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블랙 기사단의 패트리샤에게 도전하다니 말이야.”

“쯧쯧, 남자 망신은 다 시키고 있군. 패트리샤, 남자 구실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은 놈은 그만 상대하고 우리랑 술이나 한잔하는 게 어때? 본선 진출한 기념으로 내가 한잔 사지.”

그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던 용병들이 말을 걸어왔다.

“술은 내가 사지.”

그 말과 함께 사내의 목에 겨눴던 단검을 거둬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피로를 풀어줄 술 한잔이 간절한 참이었다.

“역시 패트리샤밖에 없다니까. 자, 가지.”

패트리샤는 바닥에 넘어진 채로 누워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마시고 싶다면, 따라와. 술은 사주겠다.”

그 말에 사내가 머릴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패트리샤를 공격하던 덩치와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순진한 얼굴이었다.

“나는 맥스다. 북쪽에서 왔지.”

북쪽이란 말에 패트리샤가 찡그렸던 미간을 풀었다.

“그쪽 지역의 인사는 무례하기 짝이 없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군. 내가 리셋 부족에서 만드는 술을 가장 좋아하니, 네 무례는 용서해 주겠다. 유스타나인은 마음이 넓거든.”

패트리샤의 말에 맥스라는 이름의 사내가 반갑다는 듯 눈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험악해 보이던 사내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내가 리셋 부족의 맥스다.”

“그럼 술 좀 마시겠군. 따라와. 내가 직접 랜슬롯까지 안내하겠다. 아, 그전에 얼굴에 묻은 진흙을 닦는 게 좋겠다. 유스타나의 여인들은 더러운 사내에겐 야박하거든.”

그 말과 함께 패트리샤가 술집인 랜슬롯으로 향했다. 맥스란 기사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손등으로 얼굴에 묻은 진흙을 툭툭 털어냈다.

그러다 단검에 찔린 상처를 발견하곤 별것 아니라는 듯 손수건을 꺼내 질끈 동여맸다.

“내가 본 여인 중 최고군.”

맥스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그러곤 패트리샤를 놓칠세라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랐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테란국의 기사인 알버트가 패트리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여인의 몸으로 본선에 진출하다니. 아니,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조금 전 맥스라는 덩치를 단숨에 쓰러뜨렸다는 점이었다.

“제법이군.”

“알버트 님.”

그때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던 용병 하나가 알버트를 불렀다.

“뭐지?”

“이고르 님께서 뵙길 청하십니다.”

“어디에 계시지?”

“막사입니다.”

알버트가 고갤 끄덕인 후, 서둘러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오후 내내 원형 대회장에서 용병들의 시합을 지켜보고 있던 헬로이즈와 이고르는 별궁으로 돌아가는 대신 알버트의 막사로 향했다.

다행히 용병들의 대부분은 술을 마시러 갔는지 막사 주변은 조용했다.

“이고르, 진이 보이지 않는군.”

막사 안으로 들어가며, 헬로이즈가 이고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에버콘 공작가로 심부름을 보낸 후론 보이지 않아 저 역시 찾고 있었습니다.”

“에버콘 공작가라고? 혹시 그들 소행일까?”

“그건 아닐 겁니다. 같은 배를 탄 이상, 그쪽에서 우릴 배신하는 건 서로에게 손해일 테니까요.”

생각이란 게 있으면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였다.

“그럼 누굴까?”

“진에겐 어린 시절부터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황태자 전하의 편이고요. 아마 보셨을 겁니다. 유일하게 검술 대회에 참여한 여인을 말입니다.”

“그 패트리샤라는 용병이 진의 친구였던 건가?”

“그렇습니다. 조사해 보니, 용병들 사이에선 유명한 모양이더군요.”

“그럼 황태자 측에서 납치했다는 건가? 정체를 들켜서?”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알버트가 온 모양이었다.

이고르가 천막의 천을 들추고 밖으로 나가자, 알버트보다 덩치가 작은 여인이 서 있었다.

“너는……?”

“아무 말도 없이 자릴 비워서 죄송합니다, 이고르 님.”

진의 등장에 이고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누구지?”

“아, 진입니다.”

“안으로 들어오도록 해.”

헬로이즈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두 사람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진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며, 주먹을 꼭 쥐었다.

“어딜 다녀온 거지?”

“약을 만들어 오느라 늦었습니다.”

“약이라고?”

“네. 생각해 보니, 테란의 기사들이 유스타나 제국의 기사들의 숫자에 비해 너무 적은 인원이라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지? 방법이라니.”

“그러니까, 제가 설사약을 만들어 왔습니다. 무색무취라 음식에 몰래 섞어도 들킬 일이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유스타나 제국의 기사들은 설사 때문에…….”

“네 말은 유스타나 제국의 기사들을 먹일 약을 만들러 갔었다는 건가?”

“네. 사실 저만의 비밀 작업실이 있습니다. 유스타나 제국에선 영매나 몰약을 제조하는 자를 마녀로 여겨 처벌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은밀히 행동한 겁니다. 죄송합니다.”

진의 말에 그제야 납득한 듯 이고르의 얼굴에서 의심이 사라졌다.

“앞으론 사소한 것이라도 꼭 보고하도록 해. 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

“네. 앞으론 절대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진이 안도하며 고갤 들었다. 그러다 헬로이즈 공주와 눈이 마주쳤다. 전과는 달리 싸늘하게 변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자, 진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공주님, 얼굴이 창백합니다. 몸이 불편하시다면 제가 치료약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아니다. 두통이 있긴 하지만 그건 잠을 자지 못해서다.”

“다행…….”

그때 막사의 주인인 알버트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진이 옆으로 비켜서자, 이고르가 나가도 좋다는 듯 고갯짓을 했다.

진이 막사를 나오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문엔 블랙이란 자가…….”

그 말을 끝으로 막사의 천이 내려갔다. 그러자 안에서의 대화 내용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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