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1 화
진은 팔짱을 끼고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사내를 쏘아보았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직접 만든 약을 먹이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밤새 그를 간호하는 동안 알아낸 게 있다면, 그가 기사라는 사실이었다. 검을 들어 생긴 굳은살이 있었다. 손바닥에 패트리샤와 똑같이.
“우선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겠어. 정신을 잃기 직전, 분명 고귀한 자가 전하는 전갈이 있다고 했어.”
고귀한 자란 고대어로 에브게니아를 뜻했다. 그리고 에브게니아는 7년 전 돌아가신 그녀의 할머니의 이름이었다.
“대체 어떻게 할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유스타나에서 할머니를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나와 페트리샤, 그리고 엘렌 님 외엔 없는데 말이야.”
진은 눈살을 찌푸린 채 남자의 머리에 나 있는 상처를 쏘아보았다.
“어쩌다 다친 걸까? 아니, 그것보다 위험해 보이는 자를 집에 들이는 게 맞는 걸까? 지금이라도…….”
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에 있는 상처는 분명 최근에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몸을 하고 날 찾아오다니. 그 정도로 절박한 일이 있는 걸까?’
진은 어떻게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읏-”
그때 의식을 되찾으려는 듯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고갤 돌리다 상처가 베개에 짓눌렸는지, 고통스러운 듯 몸을 움츠리는 게 보였다.
“이봐요, 정신이 드나요? 눈 좀 떠봐요.”
진이 침대로 다가가 그를 깨웠다. 하지만 사내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인지 사내의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봐요!”
진이 그를 깨우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그와 동시에 강한 힘이 진의 손목을 붙잡았다.
“윽, 아파…….”
지독한 고통에 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잠결에 자신을 공격 대상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아, 미안합니다.”
사내의 눈이 커지더니,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이미 진의 손목엔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다 죽어가는 걸 살려줬더니, 손목을 부러뜨리려 하는군요.”
진이 욱신거리는 손목을 감싸 쥐며, 사내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사내기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눈빛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읏-”
“그냥 누워 있어요. 머리에 생긴 상처에 약을 발라놓긴 했지만, 다 나으려면 시간이 걸릴 거예요. 아, 그리고 이건 진통제니 먹도록 해요. 고통이 좀 가실 겁니다.”
진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약병을 들어 올린 후, 침대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순간 사내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설마 수줍어하는 건가? 사내의 반응으로 보아 여인과 단둘이, 그것도 침대에 있는 상황이 익숙지 않은 모양이었다.
“잡아먹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아무리 당신이 잘생겼다고 해도, 아픈 사람을 덮칠 만큼 굶주린 건 아니라서.”
농담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창백하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덩치는 자신의 배나 되는 사내가 순진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자, 진은 경계심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먹어요. 하지만 내가 또 입으로 먹여주길 바란다면 말해요. 해줄 테니까.”
이것 역시 당연히 농담이었다.
“그, 그만 놀리십시오.”
이번엔 남자 역시 진이 그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번엔 안 속네. 얼굴 빨개질 줄 알았는데.”
“제가 먹겠습니다.”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진에게 약을 받아 꿀꺽 삼켰다. 쓴지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충분히 기다린 것 같으니, 이제 말해봐요. 당신은 날 찾아온 건가요?”
순식간에 진의 목소리에 어렸던 장난스러움이 사라졌다. 입가에 어렸던 미소 역시도.
그러자 남자의 검은색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했다.
“그런 것 같군요. 그대가 검을 든 고양이 문장의 주인이라면 말입니다.”
“검을 든 고양이의 문장에 대해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문장의 주인은 아닙니다. 우리 가문은 그 가문의 가신입니다.”
진의 말에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주인이 아니란 말에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은백색의 눈동자를 가진 나이 든 여인을 만났습니다. 유스타나의 신관 복장을 하고 있었고, 자신을 에브게니아라고 하더군요. 혹시 알고 계십니까?”
“에브게니아는 제 할머니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제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7년 전에 말입니다.”
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사내를 쏘아보았다.
“날 속일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저 역시 아주 미약하긴 하지만 영매의 힘을 갖고 있으니까요.”
진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검은 눈동자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저는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 이유 같은 건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전하라는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겁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자신이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한 모양이었다.
“당신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들어보기로 하죠. 제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할머니가 살아 있다는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낯선 자의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었다.
“고귀한 자로부터의 전언이다. 파르마, 도망쳐라. 그들이 널 어둠의 나락으로 끌어당기기 전에.”
순간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금 파르마라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제게 준 쪽지에 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검을 든 고양이의 주인에게 전하라는 말과 함께.”
순식간에 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은 여전했다. 하지만 입술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당신 대체 뭐죠? 누구냐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할머니께선 돌아가셨는데…….”
“여기…….”
사내가 주섬주섬 뭔가를 찾았다. 손수건을 찾는 모양이었지만, 마땅한 것이 없는지 팔을 쓰윽 내밀었다. 자신의 옷으로 눈물을 닦으란 뜻인 듯했다.
그의 행동에 울고 있던 진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섭게 생겨서는, 당신 참 재미있네요.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고마워요. 그 상태로 할머니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날 찾아와 줘서. 파르마는 제 이름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녀의 또 다른 이름, 파르마.
“어디에서 보셨나요? 제 할머니 말입니다.”
진이 남자의 소매에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제발 말해주세요, 할머니가 계신 곳을.”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위험에서 벗어나는 게 먼접니다. 도망부터 치셔야 합니다.”
남자의 단호한 목소리에 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왜 날 도우려 하는 거죠? 이유를 들어야겠습니다.”
진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큰 부상까지 당한 상황에서 자신을 찾아오다니. 뭔가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믿지 않겠지만, 그분이 절 살려주셨습니다.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추적자를 따돌릴 방법을 알려주셨죠. 그래서 무사히 동료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갚으려는 것뿐이었다. 목숨을 빚졌으니,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갚는다.
“하지만 지금 당장 떠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이고르 님을 비롯해 알버트가 금방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7년 전에 일어난 마차 사고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할머니의 경고대로 도망쳐야 했지만, 테란의 정보망은 그녀가 쉽게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시체로 발견될 게 분명했다.
“갈 수 없습니다.”
진이 초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벽으로 걸어가더니 외투를 몸에 걸치며, 남자를 돌아보았다.
“여기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거동할 수 있게 되면, 즉시 떠나십시오.”
남자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상처 부위가 아픈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침대로 주저앉았다.
“지금 움직이는 건 무립니다.”
진이 다시 침대로 다가와 서랍에서 진통제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친구에게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자매 같은 아이죠. 그 애가 위험해지는 걸 원치 않아요. 떠나기 전에 해줄 말이 있어요.”
진은 패트리샤가 검술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카일, 제 이름은 카일입니다.”
“카일,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당신의 일은 끝났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그 말과 함께 진이 방을 나왔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할머니는 낯선 자에게 파르마라는 이름을 알릴 정도로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경고하려 하고 있었다.
“잠깐, 조금 전 신관 복장이라고 했었어.”
진은 카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며칠 전 대신전에 왔다던 전 대신관에 대한 일 역시도.
“설마……?”
순간 진은 전 대신관이란 여인이 자신의 할머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해 봐야겠어.’
진이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카일은 ‘파르마, 도망쳐라. 그들이 어둠의 나락으로 끌어당기기 전에’라고 말했었다.
그리 또 하나, 이 말을 검을 든 고양이의 주인에게 전하라고 했다.
“검을 든 고양이의 주인은 루틴 공작가야. 그렇다는 건, 설마 엘렌 님 역시 위험한 건가?”
헬로이즈 공주가, 아니, 테란이 정말 엘렌 님과 나를 죽이려는 건가?
‘엘렌 님께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해. 하지만 어떻게 전하지?’
그러고 보니 지금껏 한 번도 엘렌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떡하지? 미치겠군.”
한참을 고민하던 진은 먼저 대신전에 가기로 결정했다.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7년 전 일어난 그 레녹스 공작 부처의 마차 사고의 진실 역시도 들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
“카일은 어디에 있지?”
세이란이 루시타니아 상단으로 들어서자마자 방을 둘러보며, 카일을 찾았다.
“그게, 부상을 당한 모양입니다.”
“어딘지 말해. 바로 가서 그의 상태를 확인해야겠다.”
당장에라도 카일에게 가려는 듯 방을 나가려 하자, 패트리샤가 다시 그를 불렀다.
“전하,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카일이 전하께 급히 전달하라는 내용입니다.”
방을 나가려던 세이란이 몸을 돌려, 의자에 자릴 잡고 앉았다.
“무슨 말이지?”
“카일에게 보냈던 노엘이 돌아왔습니다. 그가 말하길 대신전에 있는 전 대신관은 가짜라고 합니다. 테란의 첩자라고요.”
패트리샤의 말에 세이란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전 대신관이라고 하는 여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패트리샤와 알베르트 루칸이 놀란 얼굴로 세이란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짜를 진짜로 받아들였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구실이 필요했다. 가짜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난, 황태자비를 얻었거든.”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