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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130화 (130/139)

제 130 화

키안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세이란이 옷장에 걸려 있는 코트를 가져와 그녀가 입을 수 있게 도왔다.

이젠 그녀의 시중을 드는 게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다른 귀족들이 알면 경악할 일이었다.

“그런데 전하께선 오늘 파티에 참석하셔야 하는 것 아니셨습니까?”

생각해 보니, 사교 시즌이 한창이었던 것이다.

반면 자신은 신분이 들통났으니, 더는 릴리스 프로필리아로 파티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이젠 참석할 이유가 없다. 너와 함께라면 모를까.”

사실 지금껏 파티며 무도회에 참석한 이유는 키안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황태자로만 대하는 키안에게 사내로 다가가기 위한 계략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 이상 그럴 이유가 더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난 좋기만 한데. 너도 알다시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교계엔 관심도 없었다. 네가 날 남자로 보길 원해서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정말 이유가 그것이었습니까?”

“그렇다니까. 넌 평범한 방법으론 네 마음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사실 네가 바레나 거리의 진이란 여인을 찾아갔을 땐, 놀라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잠깐, 이건 무슨 소리지?

분명 블랙으로……. 키안이 놀란 표정으로 세이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패트리샤가 너와 벨라 아키텐을 보았다고 했다.”

“그럼,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래. 난 너의 펫이 될 의향도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말이다.”

순식간에 키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니.

그러다 뭔가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혹시 일부러 제게 블랙이란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스텐호프를 이용하신 겁니까?”

“맞다. 네 성격상 몸 따로, 마음 따로일 순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난 널 안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 네가 상상할 수 없는 일까지 벌일 정도로.”

그래서 그런 계략을 꾸몄다는 뜻이었다. 놀라웠다.

대체 자신이 뭐라고…….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세이란이 외투를 꺼내 입으며, 키안을 돌아보았다. 뭐냐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천 년이나 지나 다른 이의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이 똑같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키안의 물음에 세이란이 한 발짝 다가섰다. 서로의 표정까지 살필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너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난 미래를 보았다.”

헬로이즈 공주를 통해 세이란이 미래를 보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키안은 잠자코 있기로 했다. 세이란이 어떻게 알았는지 따져 물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헬로이즈 공주와 나눴던 모든 것을 얘기해야 했다.

그가 테란이 자신의 쌍둥이 오빠와 부모님을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미래를 말입니까?”

“꿈을 통해서였지만, 모든 것이 생생했다. 널 잃고 거죽만 살아 있는 내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 깨달을 정도로. 그리고 널 또다시 놓치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말이다.”

세이란의 말에 키안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음속에선 수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헬로이즈가 했던 말, 자신을 살린 대가가 그의 목숨인지부터.

‘아니,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야. 그게 진실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묻는 게 무서웠다. 이미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가 뭔지 알고 있는 세이란이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될 테니까.

“세이란 님…….”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지금부턴 너만 생각해. 넌, 그럴 자격이 있다.”

자격이라……. 과연 그럴까?

내 혈족을 죽인 이가 누군지 알아버렸는데도, 난 그것을 외면한 채 내 행복만을 좇아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헬로이즈 공주를 죽인다면, 유스타나는 테란과 또다시 전쟁을 해야 한다.

그건 유스타나의 군사들이 자신 때문에 의미 없이 죽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니까.”

마치 키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세이란이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러곤 오롯이 그만을 바라보게 했다.

“네 눈동자엔 나만 담으면 된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가 고갤 숙여왔다.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도록 입술을 겹친 것과 동시에 깊숙이 혀를 묻어왔다.

순식간에 키스가 농밀해졌다. 서로의 숨결을 삼키며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길 반복했다.

“흣-”

나른한 신음과 함께 두 사람의 턱이 야릇하게 기울어졌고, 이내 하나처럼 얽혀 녹아내렸다.

“흐음- 키안!”

짙은 열기에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집요하게 파고들던 입술이 갑자기 떨어졌다.

안타까움에 키안이 멀어지려는 그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더니, 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걱정 마. 끝내려는 게 아니니까.”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키안을 놓고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창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키안 역시 창문 주위를 날고 있는 새를 발견했다.

“전서구인 겁니까?”

“그래. 블랙 기사단에서 보내온 것이다.”

전서구의 다리에서 붉은색의 천을 풀자, 돌돌 말린 쪽지가 세이란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서둘러 쪽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하던 세이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입니까?”

키안은 그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세이란은 쪽지와 붉은색 천을 벽난로 안으로 던져 버렸다.

“키안, 루시타니아 상단으로 가봐야겠다. 테란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다.”

테란에 보냈다던 정보원에게서 드디어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중간에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를 데려갈지, 아니면 혼자 움직여야 할지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혼자 움직이는 것이 편할 겁니다. 긴급한 일이라면, 최대한 은밀히 움직여야 할 테니까요.”

키안의 말에 그제야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곧 그들에게 널 소개할 것이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서둘러 황태자궁을 나왔다. 키안은 그와 함께 걷는 동안 조만간 패트리샤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

진의 전갈을 받고 데칸 상단으로 온 샤론 에버콘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테란의 기사와 마주했다.

“테란의 목적은 황태자 전하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도움이 필요합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에버콘 공작가의 용병들 역시 검술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해놓았으니, 때가 되면 함께 움직일 겁니다.”

샤론 에버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에 테란의 기사인 알버트가 고갤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틀 후 정오입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유스타나 제국민이 모두 지켜볼 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신탁을 부정하는 것.”

알버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잘됐군요. 나 역시 제국민 앞에서 현 황실이 부정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요.”

전혀 다른 이유였지만, 테란의 헬로이즈 공주나 자신이나 원하는 결과는 똑같았다.

‘첫 번째는 신탁이 정한 다음 황제와 황태자비를 부정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제국민 앞에서 신성시 여겨지는 구스타프 황실의 후계자인 세이란이 죽는 것’이었다.

샤론 역시 테란의 기사인 알버트를 배웅하려는 듯 따라 일어섰다.

“같은 목적을 가졌으니 걱정할 것 없겠군요.”

“그렇죠. 배신할 일은 없을 겁니다. 둘 다 위험한 일일 테니.”

이 일이 실패한다면, 그들은 황태자인 세이란의 손에 죽게 될 터였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죽여야 했다. 그것이 힘들다면, 황태자의 약점인 키안 레녹스라도 볼모로 붙잡아야 했다.

“앞으론 직접 얼굴을 뵙는 일은 없을 겁니다. 따라붙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알버트의 말에 샤론 역시 동의했다. 황태자인 세이란은 기민하고 영리한 자였다. 암살이 성공할 수 있도록, 최대한 은밀히 움직여야 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붉은 깃발이 신호입니다. 공작부인께서도 보면 아실 겁니다.”

샤론이 고갤 끄덕인 다음, 옆에 앉아 있던 앤톤 데칸 쪽으로 고갤 돌렸다.

“데칸 후작님, 이분께서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앤톤 데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 따라오시오.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알버트가 샤론에게 고갤 숙여 보인 후, 재빨리 앤톤 데칸을 따라 나갔다.

방에 혼자 남겨진 샤론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어느새 돌아온 앤톤 데칸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샤론을 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문득 궁금해져서요. 왜 헬로이즈 공주는 황태자인 세이란과 키안 레녹스를 죽이려 하는지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행동에 의심이 생긴다면, 지금이라도 손을 놓으면 된다. 내가 돕겠다.”

앤톤 데칸의 말에 샤론이 고갤 들었다. 그러곤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앤톤, 걱정할 것 없어요. 나에게 생각이 있거든요. 만약 저들의 계획이 실패했을 때, 우리는 저들을 죽이면 된답니다. 그럼 우리는 황태자를 시해하려던 적국의 기사들을 처단한 영웅이 되는 거죠. 그리고…….”

샤론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공한다고 해도 그자들은 우리의 손에 죽게 될 것입니다. 황태자 암살 사건의 배후로 말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에겐 그 어느 쪽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란 말이죠.”

음산할 정도로 낮게 울리는 샤론의 목소리에 앤톤 데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 말래도요. 나는 유스타나 제국을 가질 겁니다. 내가 주인이 될 겁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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