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9 화
어둠이 내려앉은 바레나 거리에 마차 하나가 멈춰 섰다. 이내 문이 열리고 검은 외투를 입은 남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괜찮겠습니까? 힘드시면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사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검은 외투를 입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럴 필요 없다. 너 역시 서둘러 그분을 만나야 한다. 나는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
“알겠습니다. 그럼, 그곳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사내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이내 마차가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하자, 검은 외투 차림의 남자 역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윽-”
하지만 몇 발자국 떼지 않아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휘청거리며 건물 벽에 몸을 기댔다.
“하아, 아직 회복되지 않은 건가?”
그렇다고 여기서 돌아갈 순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해야 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고통을 참고 있던 남자가 숨을 삼키며 재빨리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행인인 듯 그를 지나쳐 가버렸다.
“서둘러야겠어.”
남자는 고통으로 굳어진 몸을 잔뜩 웅크리곤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좁은 골목길을 지나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남자의 시선이 건물의 문 쪽으로 향했다.
“분명 이곳이라고 했었는데, 어디 있지? 검을 든 검은 고양이가.”
그때 남자의 눈에 벽 옆에 새겨진 그림 하나가 들어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로 구석진 곳이었지만, 분명 검을 든 검은 고양이였다.
남자는 주위를 살핀 후 서둘러 현관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어떡하지? 오늘이 아니면 더는 시간이 없는데…….’
남자가 지친 듯 몸을 벽에 기댔다.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의식이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정신을 잃어선 안 돼.”
남자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남자의 몸은 바닥으로 주저앉고 있었다.
“아하, 제길!”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빨리 움직인 모양이었다. 마차를 타기 전 먹은 진통제의 효과가 다 되어가는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고통을 삼키며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구시죠? 왜 제 집 앞에 있는 거죠?”
여인의 목소리에 남자가 눈을 떴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단검이었다. 아마 낯선 자가 문 앞에 주저앉아 있어 경계하는 듯했다.
그렇다는 건, 이 여인이 바로…….
“고귀한 자로부터의 전갈입니다. 그대는…….”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사내의 몸이 풀썩 바닥으로 넘어졌다.
“위험…….”
진이 재빨리 단검을 바닥에 던진 채 남자의 몸을 꽉 붙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느다란 손으론 남자의 큰 덩치를 감당하긴 역부족이었다. 순식간에 진은 남자와 함께 바닥으로 넘어졌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봐요.”
진이 남자의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가? 이봐요. 눈 좀 떠봐요. 전갈이 있다면서요. 이봐요!”
미동도 없는 검은 외투 차림의 남자를 내려다보며,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신을 잃기 전 했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분명 그는 고귀한 자로부터의 전갈이라고 했었다.
진은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곤 의식을 잃은 남자를 젖 먹던 힘을 다해 집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
술집 랜슬롯에서 나온 패트리샤는 용병 기사들이 숙소로 사용하는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럽게 치러진 검술 대회의 예선전 때문에 알버트는 랜슬롯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눈으로 직접 진이 첩자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아서.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무거웠다.
“휴우! 답답해 미치겠군.”
한숨을 내쉬며 걸어가던 패트리샤가 인기척에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패트리샤 님!”
“너는……?”
패트리샤가 사내의 얼굴을 알아보곤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의 모습을 살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지? 왜 너 혼자인 거지?”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은 황태자 전하를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말이냐?”
“네. 한시가 급합니다, 패트리샤 님.”
“우선은 내 막사로 가자. 지금은 밤이 늦어 만날 수 없다. 날이 새는 대로 내가 전하께 전갈을 보내겠다. 최대한 빨리.”
패트리샤의 말에 사내가 안도한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사내가 외투의 후드를 벗자,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앳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전하께 허락을 받지 않고 블랙 기사단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키엘체로 모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패트리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블랙 기사단을 호출하다니. 위험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했다.
“노엘, 이 길을 쭉 따라가면 검술 대회에 참가하는 용병들의 막사가 있다. 검은 깃발이 달린 막사다. 가서 기다리도록 해. 난 루시타니아 상단으로 가봐야겠다.”
“알겠습니다, 패트리샤 님.”
노엘이 막사로 가기 전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패트리샤에게 전했다. 패트리샤는 심각한 표정으로 노엘에게 고갤 끄덕여 보인 후, 루시타니아 상단의 루칸 백작을 만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카일 님 대신 노엘이 오다니. 뭔가 큰 일이 일어나고 있어. 우리가 모르는 위험한 일이.”
**
“제가 하겠습니다.”
키안이 얼굴을 붉히며, 세이란의 손에 들린 빗을 빼앗아 들었다.
“가만있어. 내가 해주겠다.”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키안이 빗을 등 뒤로 숨기며, 고갤 가로저었다. 그러자 세이란이 마음을 접은 듯 뒤로 물러섰다.
대신 그녀가 머릴 빗는 걸 감상이라도 하려는 듯 턱까지 괴곤 의자에 등을 기댔다.
“뭐하고 있어? 빗지 않고.”
“아, 네.”
그의 재촉에 키안은 빗을 들어 올려 천천히 머릴 빗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길이 자꾸만 더뎌졌다.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 보십시오. 부담스러워 도무지 머릴 빗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해준다고 했잖아. 지금이라도…….”
“그러지 말고 어서 가서 씻으십시오. 피곤해서 빨리 쉬고 싶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빨리 쉬고 싶었다. 어젯밤 다친 키안을 지켜보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잠보다도 더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게 문제였다.
“목욕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어?”
“네?”
키안이 들고 있던 빗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가 의자에서 몸을 떼더니 키안 쪽으로 몸을 숙이며 물어왔다.
“레녹스 저택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라면, 허락하지 않겠다.”
어떻게 안 걸까? 그가 욕실로 들어가 씻는 동안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는 걸.
키안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가 그녀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그럴 줄 알았지. 안 되겠다. 너도 함께 씻는 게 좋겠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그리고 집사인 가브리엘에겐 미리 연락해 놓았으니 걱정할 것 없다.”
키안은 그런 문제가 아니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신탁에 의해 황태자의 약혼녀로 정해졌다지만, 정식 혼약을 치르지도 않은 상황에서 셀서스 궁에 있는 황태자의 침궁에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키안!”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세이란이 초조한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키안의 한마디에 그때까지 거만해 보일 정도로 자신만만하던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돌아가게? 내가 이렇게 부탁해도?”
세이란이 방법을 바꾼 듯 동생인 카이우스처럼 매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사자라고 불리는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가 자신에게 어리광을 피우며 부탁하다니.
낯선 그의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키안은 하마터면 알겠다며 고갤 끄덕일 뻔했다.
“전하께서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 역시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참고 있는 중이고요.”
키안 역시 세이란과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했다.
남자인 키안 레녹스 공작은 세이란 옆에 있는 게 가능했지만, 여인인 자신은 할 수 없었다.
“이젠 제가 여인이란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레녹스 공작일 때완 다르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쳇, 마음 안 든다니까. 벌써부터 이런 제약이 생기다니.”
세이란 역시 불만인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빨리 국혼부터 치러야겠어.’
세이란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씻으시려고요?”
“아니, 널 데려다주려고.”
“아닙니다.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핑계를 찾는 것이다. 네가 이곳에 있을 수 없으니, 내가 너와 함께 있을 방법을 말이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