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7 화
“이곳이 황태자 전하의 침실인 모양이군요.”
방 안을 둘러보는 헬로이즈를 보자, 키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은빛 늑대가 헬로이즈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뭐지? 왜 경계하지 않는 거지?’
키안은 이를 드러내며 경계하는 대신, 익숙한 듯 헬로이즈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은빛 늑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많아 컸군요. 발톱도 제법 강해졌고.”
헬로이즈의 시선이 은빛 늑대에게 향했다.
“은빛안개, 이리 와.”
키안의 명령에 은빛 늑대가 헬로이즈에게서 떨어져 키안의 옆에 섰다.
“황태자 전하를 찾아오신 것이라면…….”
“제가 찾아온 사람은 공작님입니다. 신탁이 정한 황태자비이신.”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헬로이즈가 키안을 쏘아보았다. 그 모습에 키안의 얼굴 역시 서늘해졌다.
“우리 두 사람의 얘긴 어제 끝난 것 아니었나요?”
“그랬죠. 공작님께선 다 하신 모양이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제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았더군요.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순식간에 팽팽하게 날 선 긴장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에선 냉기가 서렸고,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는 분노로 뜨거웠다.
**
회의장을 나온 에브게니아는 대신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이것으로써 자신이 대신전에 들어온 목적 하나는 이루었다.
‘황태자와 키안 레녹스를 검술 대회장으로 불러냈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어.’
이제 나머지는 이고르를 비롯해 테란에서 온 기사단의 몫이었다.
에브게니아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하-”
에브게니아가 팔을 뻗어 벽을 붙잡았다. 그러곤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에브게니아.”
뒤에서 들려온 차분한 목소리에 에브게니아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변하더니,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려는 듯 주먹까지 꼭 쥐는 게 보였다.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온몸이 두려움에 떨릴 정도로.
“에, 엘렌 님.”
에브게니아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미동조차 없는 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7년 만인 건가요? 그 사건 이후, 그대의 존재는 세상에 없는 걸로 되어 있었으니 말입니다.”
7년이란 말에 에브게니아의 입가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엘렌 님.”
“그대의 유일한 혈육인 진이 그대의 목줄이었겠군요. 7년 전 때처럼.”
엘렌의 말처럼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진이 볼모였다. 그래서 기사 알버트의 손에 이끌려 다시 유스타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죄송하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습니다.”
에브게니아의 주름진 눈가가 어느새 붉게 변해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에브게니아. 하지만 이곳으로 돌아왔으니, 경고대로 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그대는 그대의 혈육을 지키는 대신, 다른 사람의 가족을 빼앗았으니까요.”
엘렌의 차분하던 갈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변해 있었다. 그 날카로움에 에브게니아는 등골이 싸늘해졌다.
‘잊고 있었어. 엘렌 님 역시 루틴 공작가의 사람이란 걸. 그리고…….’
에브게니아가 엘렌 앞에 무릎을 꿇기 위해 몸을 숙이려는 순간, 엘렌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에브게니아, 잊은 모양이군요. 그대는 지금 전 대신관입니다. 한낱 시녀인 저에게 무릎을 꿇어선 안 되는 존재입니다.”
“엘렌 님! 저는…….”
“그대가 불행하게 만든 분을 직접 보셨나요?”
엘렌의 물음에 에브게니아의 입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보았었다, 대신전의 광장에서. 키안 레녹스 공작을 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보았습니다.”
“어떻던가요? 불행해 보이던가요?”
엘렌의 물음에 에브게니아는 고갤 숙였다.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몰랐었다.
황태자인 세이란의 옆에 서 있는 아름답고 고귀한 빛이 나는 사람이 키안 레녹스 공작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아직은 봉인되어 있지만, 강력한 힘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음 순간 흔들림 없는 하늘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에브게니아는 황태자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와 똑같이 두려움을 느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그런데 그 사람이 키안 레녹스 공작이었다.
레녹스가의 쌍둥이. 저주받은 불행한 아이가.
“강하고 아름다우셨습니다. 고통스러운 사건을 다 겪어낸 사람 같지 않게 공작님의 얼굴엔 그늘조차 느껴지지 않더군요.”
그래서 놀랐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절대 맨정신으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하지만 이겨냈다. 그게 가능한 사람이 있었다.
‘당연한 건가? 천 년 전 대륙의 주인이었던 분의 환생이니까.’
에브게니아는 쓰게 웃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아팠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엘렌의 싸늘한 질책에 에브게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는 그러니까…….”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쌍둥이 오빠가 죽는 걸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친아버지인 레녹스 공작이 검으로 그녀의 등을 베었고요. 아마 영문도 몰랐을 겁니다. 모든 것이 다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을 했을 테지요. 오빠를 잃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분노한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엘렌의 목소리는 채찍처럼 날카로웠다. 에브게니아는 입술을 깨물 뿐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끝이었다면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한꺼번에 부모까지 잃어야 했지요. 그대들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말입니다.”
“후회했습니다. 진심입니다, 엘렌 님.”
“하지만 그대는 또 이곳에 있군요. 7년 전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한 채로 말입니다. 이젠 그대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그것이 당신과 당신 혈육의 목숨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을 끝으로 엘렌이 에브게니아에게 고갤 숙였다.
“대신전으로 가시는 길은 저쪽입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깍듯이 예를 갖추는 엘렌의 모습에 에브게니아는 고갤 들었다. 그러자 자신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는 세이란이 보였다.
“길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렌이 에브게니아를 지나쳐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혼자 남겨진 에브게니아는 세이란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아직 돌아가지 않았군.”
“오랜만에 황궁에 들어왔더니, 길을 잃었습니다.”
세이란이 멀어져 가는 엘렌의 뒷모습을 보며, 고갤 끄덕였다.
“내가 대신전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
“아닙니다. 조금 전 지나가던 시녀에게 길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리고 도미니크 대신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대신전에 갈 참이었다. 너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더는 거절할 수가 없게 못을 박자, 에브게니아가 고갤 끄덕였다.
세이란의 시선이 느껴졌다. 얼음처럼 차갑고 검처럼 날카롭다는 말이 떠오르는 눈빛이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세 개의 신탁을 받았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혹시 전하 신탁의 내용이 궁금하신 겁니까?”
“나에 관한 신탁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세 번째 신탁이다.”
세 번째 신탁이란 말에 에브게니아가 걸음을 멈췄다.
“세 번째 신탁이라고 하셨습니까?”
에브게니아의 떨리는 목소리를 알아챈 세이란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맞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세 번째 신탁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것이다. 네가 받았으니, 알고 있을 테지?”
“그건…….”
에브게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시선에서 그녀가 뭔가를 감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에브게니아는 긴장했다. 지금 황태자 세이란은 세 번째 신탁의 주인을 말함으로써 그녀가 전 대신관임을 증명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신탁의 내용과 그 주인에 대해서는 황제 폐하께서 함구하라 명하셨습니다.”
“이래도?”
세이란의 입가가 서늘하게 비틀리더니, 순식간에 날카로운 단검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살짝만 움직여도 날카로운 검 끝이 목으로 파고들 터였다. 에브게니아가 고갤 들자, 서늘한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맹세는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세이란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에브게니아의 얼굴엔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위협으론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세이란이 그녀의 목에서 단검을 거둬들였다.
“좋다. 폐하와의 약속이라니. 그럼 대신전으로 갈까?”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앞서 걷는 세이란을 보며, 에브게니아는 손으로 목을 꾹 눌렀다.
상처 하나 나지 않았지만, 마치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극심한 공포가 밀려들었다.
‘분명 붉은 눈동자였어.’
한순간 빛에 의해 번뜩였다 사라졌지만, 세이란의 눈동자는 붉은색이었다.
에브게니아는 두려움에 주먹을 꼭 쥐었다. 운명이 다시 반복되려는 모양이었다.
천 년 전 끝내지 못한 구스타프 1세와 마법사 마기코스의 싸움이.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