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126화 (126/139)

제 126 화

공개 재판이 끝난 다음 날, 유스타나 제국의 귀족 회의가 빠르게 소집되었다.

아센 공작을 비롯해 귀족 회의를 구성하는 귀족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하나둘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자, 귀족 회의에서 의장직을 맡고 있는 아센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회의장 안을 한 바퀴 쭈욱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레녹스 공작과 대신관을 제외하고 모두 모인 것 같군요. 지금부터 귀족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아센 공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닫혀 있던 회의장 문이 열렸다. 안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한 순간, 신관 복장을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분은, 전 대신관이군요.”

“어찌 된 일일까요? 전 대신관이 귀족 회의장에 나타나다니 말입니다.”

전 대신관 에브게니아의 등장으로 잠시 회의장 안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에브게니아는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침착한 모습이었다.

“제때 시간을 맞춰 다행입니다. 귀족 회의가 소집되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서둘러 왔거든요.”

에브게니아가 침착한 태도로 원탁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녀의 말처럼 귀족 회의에 참석할 모양이었다.

“대신관, 아니, 호칭부터 정해야 할 것 같군요.”

아센 공작이 뭐라 불러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브게니아를 보았다.

“저는 지금 도미니크 대신관의 대리인으로서 귀족 회의에 참석했으니, 다른 호칭보단 대신관의 권한 대리인으로 불러주십시오.”

아센 공작을 비롯해 에드윈 리치문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으로서 귀족 회의에 참석한 명분을 확고히 한 것이다.

귀족들과 제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 여인을 세이란이 전 대신관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대신관의 권한 대리인으로서 귀족 회의에 참석하게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그대를 전 대신관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도미니크 대신관이 깨어나기 전까지란 전제 조건이 붙어 있는 상황입니다. 아직 그대의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데 귀족 회의에 참석할 권한을 주는 건 무리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아센 공작이 에브게니아의 참석을 거부했다.

“그럼 안건에 대한 의결권은 행사하지 않겠습니다.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면, 참석은 가능한 것이겠죠? 대신관님을 대신해서 말입니다.”

에브게니아가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아센 공작은 더는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공작님, 이렇게 된 이상 빨리 회의를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임스 에버콘이 마땅찮은 얼굴로 앉아 있는 아센 공작이 슬쩍 말을 건넸다.

그러자 아센 공작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귀족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대신전에 알린 자가 제임스 에버콘 공작인 건가?’

생각해 보면 정말 타이밍 한번 절묘했다. 갑자기 대신전에 침입자가 들어왔고, 그로 인해 도미니크 대신관이 다쳤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공개 재판장에 나타난 전 대신관이라니.

마치 이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었던 것처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이 모든 사건에 제임스 에버콘이 관련되어 있는 게 분명해.’

아센 공작은 그런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센 공작의 시선이 제임스 에버콘을 지나 전 대신관인 에브게니아에게 향했다.

그러곤 그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던 에드윈 리치문트와 눈이 마주쳤다.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 역시 나와 같은 의심을 하는 모양이군.’

아센 공작은 더는 지체할 수 없어 고갤 끄덕였다.

“리치문트 공작, 다들 이 문제에 대해 이의가 없다면 회의를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아센 공작의 말에 렌스터 공작을 비롯해 회의장에 있던 귀족들이 동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럼 모두 동의하셨으니,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황태자비에 대한 신탁 때문입니다.”

평소라면 신탁이 내려졌으니, 국혼 준비에 돌입하는 것이 순서긴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대상이 모두가 남자로 알고 있던 키안 레녹스 공작이다. 알고 보니, 여인이었지만.

“하지만 키안 레녹스는 제국법을 어긴 자입니다. 당연히 신탁은 무효입니다.”

“에버콘 공작, 말을 삼가세요. 대신관에게 내려진 신탁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만약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라면 그건 황실 모독은 물론, 유스타나 제국에 대한 도전이니, 신중히 말씀하셔야 할 겁니다.”

아센 공작이 준엄한 목소리로 경고를 했다. 그러자 제임스 에버콘이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황태자비로서 신탁을 받으신 분입니다. 처벌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때까지 잠자코 얘길 듣고 있던 캐슬리스 후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그 역시 어제 대신전의 광장에 있었다. 처음엔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키안 레녹스 공작이 여인이란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공개 재판을 받고 있던 죄인인 르위스 리셋의 아이에게 날아오는 돌멩이를 몸을 막던 키안을 보며, 성별을 떠나 키안 레녹스 공작이 어떤 인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제국법의 판례에 따르면 신탁을 받은 자가 죄인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의 말에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이 고갤 끄덕였다.

“문득 어제 대신전의 광장에서 법무대신께서 제국민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는군요. 법은 모든 이에게 준엄하며, 공정해야 하는 말이요.”

앤톤 데칸 후작이 에드윈이 했던 말을 일부러 꼬집어 말했다.

“그 말씀은 신탁과 상관없이 제국법에 의한 처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앤톤 데칸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스펜서 자작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저희가 판단할 영역이 아닙니다. 신탁입니다. 신탁은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란 뜻입니다.”

순간 회의장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실 귀족 회의를 소집하긴 했지만,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지 그들 역시도 알지 못했다.

“그럼 이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그때 대신관의 권한 대리인으로 참석했던 에브게니아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제임스 에버콘이 관심을 보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미 신탁을 통해 황태자비로 결정된 레녹스 공작에 대해 우리가 처벌의 유무를 결정할 권리는 없는 듯합니다. 그러니 모든 결정권을 제국민에게 주는 게 맞을 것 같군요.”

“제국민이라면, 공개 재판을 또 하자는 겁니까?”

렌스터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또다시 공개 재판을 열었다가, 레녹스 공작에게 돌이라도 던지는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이번엔 황태자인 세이란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죽일 테지. 감추려 했지만, 눈동자에 어린 살기가 대신전의 광장을 태울 기세였으니까.’

키안 레녹스를 옮길 필요가 없었다면, 대신전의 광장이 피로 물들었을 터였다.

그 모습을 보며 렌스터 공작은 절대 황태자의 반대편에 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공개 재판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렌스터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에브게이나를 향해 말했다.

“제가 알기론 며칠 후 황태자 전하께서 주최하는 검술 대회가 열린다고 하더군요. 신탁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검술 대회에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결정하는 겁니다. 키안 레녹스 공작을 황태자비로 받아들일지 말지.”

에브게니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장 안에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누구 하나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늦은 모양이군. 벌써 시작한 걸 보니 말이야.”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황태자인 세이란이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황태자의 등장에 귀족들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 예를 갖췄다.

“아센 공작, 에브게니아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전하?”

아센 공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세이란을 바라보았다.

그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 만에 하나 제국민들이 신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키안 레녹스뿐만 아니라 구스타프 황실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한 번은 거쳐야 할 의례입니다. 아마, 제국민이 더 잘 알 겁니다. 키안 레녹스가 그들의 황태자비로 적합한 인물이란 걸 말입니다.”

세이란은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결정이 났군요. 이틀 후 검술 대회에서 뵙는 것으로 알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제임스 에버콘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쳇, 내 예상대로 전 대신관인 에브게니아의 등장은 나와 키안을 검술 대회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군.’

하지만 너무도 눈에 뻔히 보이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는 건, 뭔가 또 숨겨진 음모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틀 후, 정오가 되겠군.”

세이란의 입가가 싸늘하게 비틀렸다. 그 냉소에 회의장을 나가려던 제임스가 움찔 몸을 떨며 걸음을 멈췄다.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특별한 뜻은 없다, 에버콘 공작. 검술 대회가 이틀 후 자정에 개최될 것이란 말을 한 것이거든.”

세이란의 말에 놀라 치켜 올라갔던 제임스 에버콘의 눈썹이 재빨리 제자리를 찾았다. 안심한 눈치였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제임스 에버콘은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기쁨에 세이란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

“흐음-”

뜨겁고 축축한 뭔가가 얼굴을 쉴 새 없이 핥아대고 있었다.

‘뭐지? 좀 더 자고 싶은데……. 왜 이렇게 끈질기긴 거지?’

키안은 얼굴을 베개에 묻으며 집요하게 따라붙는 축축한 뭔가를 손으로 밀어…….

‘잠깐, 여긴 전하의 침실이야.’

순간 꼭 감겨 있던 키안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자 보들보들한 은빛 털 사이로 앙증맞은 핑크빛 혀가 눈에 들어왔다.

“아, 너였구나. 은빛안개.”

키안이 반가운 마음에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온 은빛 늑대를 꼭 끌어안았다.

“어떻게 왔어? 아, 그렇지. 전하께서 널 내게 데려다주신 모양이군.”

안도감에 키안은 눈을 감고 은빛 늑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다행이야. 네가 옆에 있어서.”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늑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키안이 고갤 들었다.

“어떡하지? 전하께서 계시지 않는데…….”

거기다 지금 자신은 세이란의 커다란 셔츠만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 어제 대신전의 광장에서 흘린 피 때문에 갈아입힌 모양이었다.

똑똑!

“공작님,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습니다.”

키안은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그러곤 밖에 서 있는 시녀를 향해 말했다.

“들어와도 좋다.”

다행이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서. 이내 문이 열리고, 시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흘끗 보니 시녀가 들고 들어온 옷은 기사단의 제복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아두면 된다.”

시녀가 키안의 명령대로 옷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슬쩍 키안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식사는…….”

“걱정할 것 없다. 아직 배가 고프지 않거든. 그런데 전하께선 어디에 계시는지 알고 있나?”

“귀족 회의가 있어 다녀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곧 돌아오신다는 말씀과 함께요. 그러니 그때까지 쉬고 있으란 말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사실 그 말을 듣고 저희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다정한 황태자 전하시라니.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거든요.”

세이란의 말을 전하던 시녀가 조금 흥분한 듯 빠르게 말했다. 그러다 키안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갤 숙였다.

“귀족 회의라고?”

“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센 공작님께서 급히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고 하셨습니다. 신탁에 관한 문제를 의논…….”

시녀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재빨리 입을 다무는 게 보였다. 그제야 신탁의 주인공이 키안이란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미 내가 여인이란 사실은 다 알 테니까.”

키안의 말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시녀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어, 저는 그러니까…….”

“할 말 있으면 해도 돼.”

“저, 저는 그러니까, 처음부터 레녹스 공작님을 응원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 기뻤습니다.”

시녀의 말에 키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그 소문 말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공작님과 레이디 프로필리아 사이에서 양다리를……. 헙, 죄송합니다. 제가 또 말실수를 했습니다. 제발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시녀가 양손으로 입을 막고는 사색이 된 얼굴로 사과를 했다.

열셋이나, 열넷쯤 되었을까?

키안은 고갤 숙인 채 서 있는 어린 시녀를 보자, 곤두섰던 신경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사실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웠다. 하지만 시녀의 귀여운 모습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고맙다. 나를 응원했다니.”

한결 부드러워진 키안의 목소리에 시녀 역시 놀란 듯 살짝 고갤 들었다. 하지만 키안과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갤 숙였다. 이번엔 뺨이 붉게 변해 있었다.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밖에 있겠습니다.”

시녀가 서둘러 방을 나가자, 키안은 침대에서 내려와 서둘러 자신의 제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세이란이 귀족 회의에 참석했다. 분명 자신의 일에 대해 논의가 있을 터였다.

옷을 다 입었을 때쯤, 다시 노크 소리가 났다. 그 시녀인 모양이었다.

“들어와도 좋다.”

키안이 제복의 단추를 마저 잠근 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헬로이즈 공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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